산다는 건 어쩌면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두 개의 갈림길을 쉼없이 택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하루에도 인식할 필요도 없이 길가의 스쳐지나는 자질구레한 인연들을 만들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한번쯤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듯하다는 이야기를 해본적도 있고 들어본적도 있을 것이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언젠가 무심코 스쳐지나는 망각의 인연안에서 번쩍이는 데자뷰처럼 떠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렇게 주워담을 필요도 없던 일회성 조우가 필연으로 가는 예비적 낯익힘일수도 있지 않을까.
가이 리치의 영화는 그런 자질구레한 인연을 필연으로 섞어버린다. '락 스톡 앤 스모킹 배럴즈'같은 영화가 대표적인 케이스인데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간의 동선이 맞닥뜨리며 나비효과처럼 하나의 큰 사건으로 발전해가는 양상을 경이로우면서도 재치있게 펼쳐놓는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영화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저마다 사연을 지니고 있고 저마다의 삶을 지니고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굴레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과 그 일상을 통해 머금게 되는 사고방식들이 충돌하고 갈등하고 귀결적으로는 하나로 뭉뚱그려지며 각자의 또다른 결론으로 도출된다. 마치 각자의 삶이 각각의 뿌리를 타고 솟아오르다 하나의 기둥에서 혼합되고 다시 각자의 줄기로 뻗어나가 자신의 잎을 열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것만 같다.
사실 영화는 시종일관 무미건조하며 상당히 독설적인 대사를 내뱉는다. 시작부터 영화는 이별을 고하고 비정한 세태를 반영하며 빌어먹을 욕설을 토해낸다. 하지만 종래에는 재회하고 비정하지만 보람을 얻으며 웃음을 자아낸다.
레히프(콜린 패럴 역)는 달콤한 언변으로 웨이트리스에게 사랑에 대한 언사를 늘어놓으며 그녀를 유혹하다가 갑작스럽게 강도로 돌변한다. 그는 이렇게 세상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본인 역시 갑작스럽게 가게를 들린 경비원들에게 좇긴다. 시작부터 영화는 주제를 선명하게 비춘다.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사와 인연의 굴레를 손쉬우면서도 강렬하게.
오랜 연인이었던 데어드라(켈리 맥도날드 역)와 이별한 존(킬리언 머피 역)은 오랫동안 연인이 없던 친구에게 되려 복을 차버렸다고 질책을 받는다. 그는 직장에서도 상사인 핸더슨(오웬 로 역)에게도 신뢰받지 못하고 항상 주시당한다. 그러면서도 이별한 그녀가 중년의 남자와 교제한다는 것을 알고는 격분하여 그녀의 집에 들이닥쳐 욕설을 쏟아붓는다. 이별앞에서 담담한 듯 하지만 정작 본인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그는 그 애틋한 연정을 분노로 변주하고 엉뚱한 복수극에 동참한다.
이 영화는 각각의 인물들이 그리는 동선의 둘레에서 맞딱뜨리게 되는 경계선의 교집합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사실 모든 사람이 각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은연중에 의식하지 못하는 타인의 삶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누군가가 그러했음에 본인이 그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고 누군가가 그러하지 않았음에 본인이 그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미 흘러간 과거에 확률을 대입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오늘이라는 하나의 결론이 만들어지는 것은 분명 타인이 창출해 낸 결론에 본인도 인과적으로는 포함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동네에서 벌어지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하나의 거대한 사건으로 귀결되어 각자의 단편으로 도출되는 양상은 상당히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비관적인 상황들을 하나로 엮어내며 한치 끝도 알 수 없게 내달리던 결론을 망설임없이 확고하면서도 여유롭게 끌어내는 디테일한 연출은 경이롭다.
이 영화에는 수많은 배우들이 출연하며 낯이 익은 인물들도 있다. '알렉산더'의 콜린 패럴이 양아치 연기를 선보이며 '28일 후'의 킬리언 머피가 반항적이지만 순정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또한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켈리 맥도날드가 그의 연인으로 출연한다. 그밖에도 샐리 역을 맡은 셜리 핸더슨과 제리 역을 맡은 콤 미니 등이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마치 트레인 스포팅과 같은 영국 특유의 거친 질감에 가이 리치 식의 인물 조합공식이 어우러지는 이 작품의 재미 그 자체도 쏠쏠하다.
인터미션(intermission)은 기사와 기사 사이, 혹은 공연에서 연기와 연기 사의 짧은 공백 시간을 뜻한다. 삶에도 이런 공백이 가끔 필요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끊임없이 부딪치고 충돌하는 그런 부대낌을 벗어나 한번쯤은 한발 물러서 인연의 부재가 부르는 소원함을 느껴볼 여유가 필요하다. 물론 이 작품의 인물들이 그러한 의도로써 서로간의 인연에 공백을 꾀한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건 자신의 소중한 인연이 부재했던 시간 덕분에 그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으니까. 그만큼 이 영화의 무미건조하기만 할 것 같은 인상은 생각보다 명료한 감성을 던져준다.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외면하고 있는건 아닌지 말이다. 그래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소중한 인연은 그 굴레를 벗어나지만 않으면 다시 되돌아올 것만 같다. 그만큼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인연은 소중해보인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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