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이라는 것은 관객에게 전달되는 진실성 그 자체의 중량에서 기인한다. 사실 수많은 영화들이 나름대로 관객에게 감동을 전해보려 하지만 보는 이 민망할 정도로 어설픈 몸짓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한 것은 지나친 의욕으로부터 번진 설정적 작위성에 있다.
솔직히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허구적인 것이고-이는 비단 영화뿐은 아니지만- 그 허구적인 이야기에서 뽑아내는 감동 역시 진실되다고 말한다는 것은 오류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진실되게 받아들여지는 감동은 존재한다. 허구라지만 현실을 재창조했음이고 무관하지 않은 현실적 감동은 스크린 안에서도 살아나기 마련이니까.
현실과 무관한 허구가 아닌 현실을 반영한 허구라는 것. 그것이 영화가 관객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고 자극할 수 밖에 없는 요인이자 근원이 된다.
사실 이 작품의 코드는 2005년 상반기 대한민국 극장가에 관객을 끌어모으던 '말아톤'와 밀접하다. 실화에서 기반한 스토리. 마라톤과 장애우라는 소재적 코드. 이것만 보아도 두 작품의 외관적인 뼈대는 동질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음이 느껴진다. 비슷한 코드로 빚어내는 두 영화는 다른 국면의 감동을 묘사한다.
사실 '맨발의 기봉이'는 '말아톤'에 비해 웃음을 유발하는 씬이 많다. 물론 '말아톤'에서도 웃음은 엿보이지만 그보다는 진지한 드라마적 감성 자체에 축이 실려있었기에 그 웃음은 미약했고 대수롭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기봉이는 다르다. 물론 이 영화의 웃음도 작위적이거나 지독한 설정으로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웃음이 주는 측면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는다.
사실 '말아톤'에서 초원이는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세상에 내던져질 수 없는 미숙아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 미숙아에게 세상을 보여준 것은 어머니라는 존재였다. 그래서 말아톤에서는 초원이만큼이나 어머니가 중요했다. 그에게 '말아톤'을 일깨워준 것은 어머니의 지각이였고 그를 달리게 만든 것도 어머니의 노력이었으며 그에게 마라톤의 즐거움을 가져다준 것도 어머니의 헌신이었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어머니를 통해 성장하는 한 젊은 장애우의 드라마틱한 이야기 자체로부터 추출되는 감동을 관객에게 어필한다.
'맨발의 기봉이'의 기봉이(신현준 역)는 정신적으로는 미숙하나 육체적으론 성인이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그를 기봉이 삼촌이라고 부른다. 그는 미숙하지만 무엇을 해야되는지 안다. 말 그대로 그는 능동적인 캐릭터다. 이것이 '말아톤'의 초원이와 기봉이의 근본적인 차이이며 두 영화의 감동적 노선이 다른 양상을 띄는 이유다. 물론 그에게 마라톤을 종용하는 것은 백 이장(임하룡 역)이지만 그가 마라톤을 결심하는 것은 어머니의 틀니를 위해서이다. 세상과의 조우를 꿈꾸던 초원이의 말아톤과는 달리 기봉이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마라톤을 뛴다. 그리고 분명히 1등을 하겠다는 확고한 목표의식마저도 지닌다.
어쨌든 두 작품이 KBS의 '인간극장'을 모태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실화라는 것. 그것은 이 영화의 감동이 단순히 영화적인 작위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긍정적 요인으로도 여겨질만하다. 물론 그럴만한 물건이 나왔을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럴만한 물건으로 여겨진다.
사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현준의 연기이다. 그동안 그가 다양한 연기를 보여준 것은 사실이나 이토록 철저하게 망가진 연기를 보여준 것은 이례적이다. 코믹했던 적은 있지만 바보스러움 그 자체로 온몸을 무장한 그의 연기는 놀랍다. 사실 바보 연기는 어렵다.-여기서 '바보'라는 단어는 장애우에 대한 폄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상징적인 소통적 의미라고 여겨주길 바란다.- 특히나 단순히 지능적인 측면에서의 바보가 아닌 신체적인 동작에서 평범하지 않은 모습을 띄는 장애우를 몸에 밴 것처럼 소화해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 기봉이를 연기하는 신현준을 대면한 관객들은 낯설음을 느끼지만 이윽고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그의 연기가 자연스러움을 공감할 수 있다. 초반의 낯설음은 기존적인 '신현준'에 대한 잔상이 주는 거부반응일 따름이다. 그 거부반응을 잠시만 견뎌내면 그의 연기를 여유있게 볼 수 있다.
또한 욕쟁이 할머니로 일관하던 김수미의 모정넘치는 어머니로의 회귀 역시 영화의 감동에 여유를 얹힌다. 그동안 거침없는 욕설로 관객을 포복절도하게 만들던 그녀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좀 더 온순한 어머니상-물론 다소곳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도적인 측면의 변화를 의미한다-을 보여주는 그녀의 연기 역시 이 영화의 감동에 무게를 얹는다.
이 영화가 내세우는 감동의 중심축은 효에서 기반한다. 몸도 성치 않은 장애우가 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시는 모습 그자체에서 느껴지는 가슴 찡한 감동이 이 영화가 노리는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형세는 적당히 맞아떨어진다. 이 영화는 지나치게 눈물을 요구하지도 않고 배우들의 연기력을 밑천으로 하여 진솔한 이야기를 소박하게 끌어나간다. 그리고 각자 음색에 맞게 조율된 각각의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감정적 변화와 충돌을 통해 빚어지는 이야기의 화음이 자연스러운 선율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편안한 감동을 전달한다.
물론 이 영화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았을 때 이야기의 전개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는 모양새도 가끔 눈에 띄고 결말부의 호흡이 다소 장황하여 초중반의 감동이 살며시 감소되는 듯한 아쉬움도 보이지만 이것때문에 이 영화의 감동이 폄하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누구나 효도해야 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효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알지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필자도 그리 효자는 아니다.-갈수록 삭막해지는 세상이다. 자식이 부모를 내다버리는 21세기 고려장은 비단 근래일이 아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고 했다. 또한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다. 이 두 구절은 부모님의 자식 사랑을 간단하지만 명료하게 설파한다. 기봉이는 어머니를 위해 뛰었다. 비록 1등은 못했고 어머니 틀니는 사주지 못했지만 어머니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는 것은 훈훈한 감동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초원이의 말아톤과는 분명 다르지만 기봉이의 마라톤과 초원이의 말아톤이 보여주는 감동의 무게적 차이는 결코 다르지 않다. 아무리 닳고 닳은 소재일지라도 진실된 것은 와닿는 법이니까.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인간극장에 소개된 엄기봉씨의 현실적 일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영화일 뿐 엄기봉씨의 삶 자체를 그대로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착각하지 말 것.
-written by kharisman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