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취업문제가 장난이 아니라는 건 굳이 다시 인지시키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 사실이다. "청년실업이 몇십만에 육박~" 어쩌고 하는 모 시트콤의 유행어를 굳이 상기시키지 않아도 주변에서 워낙에 취업이 궁하다는 소리가 많이 들리고, 대학교 4학년생들이 그래서 졸업이 더욱 두려워진다는 얘기도 많이 들린다. 개인적으로 나도 한창 알바를 나름대로 구하러 다니고 있는 실정이고.
그래도 이런 일자리의 고충이 비단 우리나라 만의 고민은 아니라는 생각이 이 영화 <뻔뻔한 딕 & 제인>을 보며 들면서 그나마 동병상련의 기분을 느꼈다.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한번 일자리를 잃거나 아니면 새로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그런 생계의 고민이 이 영화에는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오죽 먹고 살기 힘들었으면 강도짓까지 하게 되었으랴. 물론 이 영화는 장르가 코미디이나 보니 최대한 웃기게 이런 상황들을 묘사하곤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웃기만 하기도 좀 그렇다.
우리의 주인공 딕 하퍼(짐 캐리)는 꽤 큰 IT 기업인 "글로보다인"에서 홍보담당을 맡으며 착실히 일하고 있는 한 집안의 가장이다. 아내 제인(테아 레오니) 역시 그렇고 그런 직장에서 무난히 맞벌이를 하고는 있지만, 이들 부부의 소원은 더도 덜도 아니고 남편 딕은 적절히 승진해주고, 아내 제인은 집안에서 전업주부로써 남편 내조하고 자식들 키우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것. 그런데 어느날 딕이 부사장으로 승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들의 꿈은 거의 현실이 되고, 아내는 그 자리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는 잔디를 깔고 수영장을 파는 등 본격적으로 중산층 생활을 즐기려고 한다. 그런데 즐기려고 폼을 잡기도 전에 또 다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찾아드니, 딕이 처음으로 나가게 된 경제 TV프로그램에서 글로보다인이 실은 그동안 적자를 흑자로 가장해왔으며 그동안 쌓인 수많은 적자로 결국 회사가 파산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회장이라는 인간(알렉 볼드윈)은 혼자 주식만 챙겨가지고 날른 상태이고. 순식간에 딕은 실업자가 되어버리고, 어련히 직장 구해지겠거니 하지만 몇개월이 지나도 백수 상태는 면하기가 어렵다. 아내까지 보톡스 실험 알바를 뛰는 등 고군분투하지만, 집안사정은 갈수록 영화 <아무도 모른다>처럼 대책없이 빈곤해져간다. 더 이상 지친 이들, 급기야 강도짓을 해서라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고, 부부의 콤비 플레이로 본격적인 강도 행각을 시작하는데.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배우라면 뭐니뭐니해도 딕 하퍼 역의 짐 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짐 캐리를 볼 때마다 참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이, <트루먼 쇼>, <맨 온 더 문>, <이터널 선샤인> 등에선 제대로 진지하고 깊은 연기를 선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브루스 올마이티>, <레모니 스니켓...> 등에선 다시금 그만의 오버스런 코믹 연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재능은 이번 영화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승진의 기쁨에 엘리베이터에서 혼자 "I Believe I Can Fly"를 부르는 생쑈를 펼치는 호들갑스러움, 강도짓을 위해서라면 여장까지 불사하는 뻔뻔함, 남의 집 잔디들을 하나하나 떼와서라도 집 앞 잔디를 만들려는 당황스러운 모습까지 이번에도 그의 극과 극을 오가는 오버모드 연기에 힘입어 부담없이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짐 캐리 말고도 또 한명의 주목해야 할 배우가 있었으니, 바로 아내 제인 역의 테아 레오니이다. <딥 임팩트>, <패밀리 맨> 등 많은 작품에서 야무지고 당찬 현대 여성의 모습을 많이 보여줬는데, <스팽글리쉬>의 촐랑거리고 시끄러운 아내 역에서 엿보였던 코미디에 대한 재능을 이 영화에서 마음껏 펼쳐 보이지 않았나 싶다. 한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는 특급작전에서 본의 아니게 실수연발을 일삼고, 보톡스 시술 알바를 갔다가 부작용으로 온 얼굴이 누구한테 신명나게 얻어맞은 양 부어오르는 등 여기 치이고 저기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외모도 꽤 받쳐주는 배우인데 이렇게 제대로 망가질 생각을 하다니, 이전부터 연기 참 다부지게 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코미디 연기에서도 망설임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가 참 특이한 것이, 분명 장르도 코미디이고 실제로 영화를 봐도 참 웃기지만, 막상 이 영화의 소재들만 놓고 보면 그렇게 대놓고 웃을 수 없는 소재라는 것이다. 실직, 파산, 강도... 하나같이 엄한 소재들이다. 그런데 영화는 신기하게도 이런 엄한 소재들을 놓고 절묘하게 코미디와 잘 버무려 관객들을 실컷 웃긴다. 에피소드들도 충분히 웃음을 자아낼 만한 경우들이 많이 있고. 딕은 처음 방송나간다고 좋아했다가 생방송 자리에서 회사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인은 그래도 돈 좀 벌겠다고 보톡스 실험 알바에 갔다가 험한 꼴을 당한다. 부부가 강도에 나서고 난 뒤에는 어느 정도 여유가 붙으니 커피집에 들어가서는 물총을 겨누고 한다는 말이 "여기 커피 두 잔 내놔!! 설탕은 얼만큼 프리마는 얼만큼~"이고, 강도짓 중에 절친한 친구나 이웃을 만나기도 하는 등의 웃음을 유발할 만한 해프닝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그런데 이런 해프닝들 이면을 한꺼풀만 벗겨놓고 보면, 마냥 웃을 상황은 아니고 좀 안타깝고 슬픈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승진의 기쁨에 젖은 딕은 뭣도 모르고 TV 프로그램에 회사 대표로 나갔다가 회장이 회사를 말아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뒤통수를 맞게 되고, 얼마나 형편들이 어려우면 한집 건너 이웃을 은행에서 같은 은행 강도로서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도 벌어진다. 보톡스 알바까지 뛰면서 돈을 조금이라도 벌려고 하지만 여전히 돈은 안들어오고 집안은 갈수록 궁핍해져만 간다. 영화 속에서는 배우들의 살짝 오버스런 코믹 연기에 힘입어 웃기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마냥 웃기에는 좀 미안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영화 속 딕의 처지는 더욱 더 안쓰럽다. 자기는 뭣도 모르고 TV 프로그램에 회사 대표로 출연했다가 회사가 파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걸 또 영 허술하게 수습하는 바람에 대표로 두고두고 놀림을 받기도 한다. 사실 회사 파산의 주범은 적자를 흑자로 속인 윗사람 쪽의 책임이 큰데, 윗분이라는 인간은 혼자 주식 몰래 챙겨가지고는 겉으로는 "나 요즘 정말 힘들다" 하면서 뻔뻔하게 사냥 활동까지 하질 않나, 정작 생계를 위협받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건 그 밑에서 그저 작은 꿈들을 가지며 묵묵히 일해 오던 평범한 가장들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쉴새없이 우리를 웃기면서도, 사회의 거대한 틀 속에서 늘 자기 구멍은 알아서 잘 찾아가는 윗사람들과, 그들 밑에서 착실히 일해오다가 윗분들의 실수 때문에 애꿏게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져 피흘리는 소시민들의 일상이 대비되면서 씁쓸한 현실의 모습 또한 은연중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 정도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진지하게 나가려고는 하지 않은 듯하다. 상사와의 갈등, 강도일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등의 갈등들이 결말에 가서 너무 쉽게, 이상적으로 풀리는 점은 사실 좀 허무하다. 절대 현실은 저렇게 호락호락하게 우리와 타협해 주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에 말이다. 후반부에 가서 딕이 새삼 가장으로서의 의지를 몸소 드러내는 부분도 얼마 안있어 상사를 골탕먹이려는 전략으로 변해버리는 점도 "역시 그냥 웃고 즐기자는 헐리웃 코미디 영화였구나" 하는 생각에 좀 아쉬웠다. 힘든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집은 지켜야지 하는 가장의 진지한 의지마저도 그냥 웃음으로 넘어가 버리려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차라리 끝까지 상사 골탕을 먹이려고 맘을 먹었으면 제대로 된 술수를 써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방법으로 골탕을 먹이든가. 그렇지 않고 따뜻하게 나가고자 했다면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딕의 눈물 어린 의지를 "연기"가 아니라 진짜의 모습으로 좀 보여줘서 더 악다구니 있게 범죄행각을 벌이게 했더라면 영화는 웃기기 뿐 아니라 가슴 찡한 감동도 충분히 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짐 캐리의 연기도 코믹과 진지가 뒤섞여 한층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점에서는 한국 코미디 영화 특유의 공식인 "선코믹 후감동" 공식을 조금 차용했더라면 어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렇게 이 영화 <뻔뻔한 딕&제인>은 그 소재 면에서 현실에 어느 정도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그 현실에 천착하지 않고 적당히 한 발짝 물러선 코미디다. 그래서 현실의 정곡을 찌르기보다 그냥 한바탕 웃어보자는 주의로 흘러간 것 같아 좀 아쉽긴 했지만(그래도 결말에서의 "엔론 게이트" 사건(영화 속 글로보다인의 경우가 매우 유사하다) 풍자는 예술이었다), 그래도 두 남녀 배우들의 연기 호흡이나 기발한 상황 설정들이 어우러져 웃고 즐기기에는 부담없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다만 일자리 못구하는 현실, 회사 상사들이 직원들을 맘껏 우롱하는 현실들이 간간히 보이다보니 그런 현실들을 지나치면서 마냥 웃기만 하기에도 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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