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피스토텔레스가 주님에게 말한다.
"내기를 할까요? 당신은 결국 그 자를 잃고 말겁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녀석을 슬쩍 나의 길로 끌어 내리리이다."
그러자 주님은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진정한 진리를 체험하고 싶었던 파우스트는 험난한 과정을 겪으며 '구도'의 결과를 쏟는다. 결국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와의 계약을 용인하면서 진리로 향하겠다는 독특한 내용을 가진 괴테의 <파우스트>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 본연이 가진 진리를 향한 의지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이 가지고 있는 '파우스트'적 사고는 폭력의 순환을 야기하며 현존하는 역사의 이면에 들춰진 어둠을 얘기한다.
PART 1 - '폭력'의 메피스토와 손잡은 스필버그의 구도적 욕망
<쉰들러 리스트>이후 다시 한 번 본격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본연적 태생의 정체성을 건드리고 있는 <뮌헨>은 스필버그의 암울한 유년기만큼이나 어둡다. -자신을 코피가 날 정도로 때린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 스필버그가 어린 시절 영화를 찍을 때 때린 친구들을 자신의 영화 속 주인공으로 삼게 해주겠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결국 스필버그에게 '카메라'는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태생적 정체성이 가져다 준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
<뮌헨>이 추구하는 '근원'으로의 회귀와 집과 조국, 민족 등 인간이 구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의 단위에 대한 향수로 폭력의 불안감을 치유하려는 것은 늘상 스필버그의 필모 그라피에서 강조되어온- 부모의 이혼에 대한 충격, 유대인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참상을 전해 들으며 누적되어온- 트라우마의 잔존이 그의 영화 속 '공상'과 '현실'을 영위한다는 연장선상에 있다.
<뮌헨>을 아우르는 정서는 에드바르드 뭉크의 <절규>가 연상된다. 그만큼 이 영화는 '피'와 '폭력'가운데 불안한 내면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쉰들러리스트>가 야수주의 화가 앙리 마티스가 추구했던 '밝음'을 향한 휴머니즘의 구현이었다면 <뮌헨>은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의 '어둠'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러한 어둠의 본질은 '폭력'이라는 메피스토와 손잡은 에브너(에릭 바나)와 그의 팀원들이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중 가장 잔악하다는 '검은 9월단'이 자행한 1972년 뮌헨 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살인 사건을 통해 '복수'를 하게 되는 과정으로 재현된다.
이 영화는 정치적 모험수가 느껴지면서도 아슬아슬한 '외줄타기'같은 현존하는 역사적 대상의 논란으로 남을 수 있는 이 '이야기거리'에 대한 적잖은 스필버그의 부담감도 나타난다. 결국 본 작을 통해 아직 미결 상태의 '역사'를 통해 '구도'의 길을 떠나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뭔가 '초월할 수 있는' 가치를 찾아 나선 스필버그의 욕망 또한 '미결'상태로만 남아 있는 모순도 존재한다.
PART 2 -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는 공포의 몰입과 전이
이 영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아직 끝나지 않은 분쟁을 통해 각자가 떠맡은 집단의 공포를 이야기하면서 점점 그 공포를 타파하기 위해 임무를 맡은 에브나와 그의 팀원들의 갈등과 방황, 특히 팀의 리더인 에브나에게 가중되는 자신의 자아와 대면하는 공포의 순간까지 집단에서 개인으로 공포의 촛점을 전이시키며 '피'와 '폭력'의 순환이 가져다 준 오류와 폐해들을 전달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감'의 탱탱한 끈을 놓지 않은 채, '살인' 이라는 '악'의 가치가 응징하고자 하는 타인에 의해 실현되는 것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적응해가는 에브너와 그러한 팽팽한 긴장의 호흡에 약간씩 틈을 주는 에브너의 아내인 데프너와의 커뮤니케이션, 어머니와의 대면으로 점점 자신을 둘러싼 '현재'에 치를 떠는 에브너의 양가성으로 결국 '폭력의 역사'가 가져온 이중성의 잣대를 고발한다.
PART 3 - '근본'으로의 회귀
하지만, 역시 이 영화는 결말에 관한 상당한 부담감이 잔존하고 있는 듯 하다. 아무래도 실화의 현대적 의미들이 실재적으로 나타나는 가운데 이것을 어떤 한 편이 가진 가치의 우위로 볼 것 인가라는 목소리는 본 작에선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이 영화는 '보편의 가치' , '공통의 진리' 를 내세우며 마무리를 향해 달려간다. 그것은 곧 '근본'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조국보다 우선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깨닫게 된 '그것'의 가치는 결국 '가족' 인데 그러한 '가족'을 고수하는 입장이 헐리웃이 전통적으로 내세웠던 집단의 횡포 가운데 수호해야 하는 최선의 가치는 '가족이다'라는 면과 흡사하다.
'폭력'의 메피스토와 계약하여 진리를 체험하겠다던 구도자 스필버그의 문제 지정과 인식의 과정은 흥미롭게 전개되며, 영화가 보여주는 역사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관객의 취향도 고려한다. 다만 스필버그가 추구하려 했던 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가치의 문제는 여전히 '미결'상태의 난제로만 남아있다.
이러한 '미결'과 '순환'의 구조가 이 영화의 가장 중점적인 매력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결국 진리는 그저 앉아 있는 사람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며 '폭력'의 정당성을 추구하고 그 가운데 민족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에 대한 문제로 시행착오의 트라우마를 겪는 에브너를 통해 남은 것은 무엇인가?
스필버그는 파우스트를 구원해 준 '그레트헨'의 영혼처럼 에브너의 아내 데프너가 말하는 '사랑해'란 한 마디로 '모성'의 온기가 서린 '근원'만이 모순된 역사의 순환을 끊을 수 있다 말하지만 그 목소리 자체가 사람들 모두에게 납득할 수 있는 개연성으로 돌아올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한다는 점은 이 작품을 통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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