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이 영화를 놓칠 뻔 했다. 10개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의 목록이 화려했다. 다섯 개의 시선, 청연, 퍼햅스 러브, 홀리데이, 야수, 싸움의 기술, 태풍, 킹콩, 당신이 그녀라면까지. 교차상영을 하고 흥행성이 없어 언제 막을 내릴지 모른다는 문제가 있어 7시 20분에 시작하는 티켓을 끊고 저녁을 먹고 상영관에 들어섰다. 상영시간이 1분도 남지 않았는데 관객석은 텅 비어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유일한 관람객인 셈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조명이 꺼지고 바로 본 영화가 상영되었다.
첫 번째 영화는 박경희 감독의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한 소녀의 생활을 추적해서 재구성한 영화이다. 은헤는 같은 반 친구들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음도 제대로 못내는 플룻을 배우려 애쓰며 장애인에 대한 처우가 달라져야 한다고 그녀 앞에서 말하는 엄마 친구들에게 자기 앞에서는 장애인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할 줄도 아는 자존심 강한 소녀이다.
말이 어눌한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은 엄마 말고는 동네에 사는, 은혜보다 40살은 더 먹었을 아줌마이다. 그래도 둘은 서로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친구이며 은혜는 아줌마한테 놀러가서 아줌마의 오토바이 뒤에 타서 <바닷가에서> 노래를 부르는 즐거움을 만끽하곤 한다. 친구가 없다 보니 은혜는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가상의 친구는 은혜의 분신들이다.
친구 아줌마한테 놀러갔던 어느 날, 아줌마는 손님들이 왔다며 은혜와 많이 놀아주지 못하니 집에 가라고 말하고 은혜는 서러움에 흐느낀다. 집에 돌아와 엄마의 친구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학교괴담을 들려주기 시작하지만 어눌한 어조로는 실감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다. 그만하면 안 될까? 하고 물어보는 엄마의 친구에게 은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애가 있거든요. 그 애는 나쁜 애가 아니거든요.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
말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고 소리 높여 얘기하지만 막상 그들이 우리 앞에서 이야기할 때 끝까지 들어주고 그들의 행동을 다정하게 받아들여줄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와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건강한 우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집안에서만 있도록 해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한 할머니의 의견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의견이 아니라 극소수의 의견이기를 바랄 뿐이다.
두 번 째 영화는 류승완 감독의 <남자니까 아시잖아요>
친구들과 만나 술자리를 즐기는 것은 이 시대 한국 남자들의 유일한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우식은 오랜 친구들과 만나 술에 취해 다시 포장마차에 들른다. 그곳에서 그는 전형적인 속물근성을 모두 보여준다.
실업자 친구가 듣고 있는데 취업외국인들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놀고 있는 인구가 얼마나 많은데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어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고등학교만 졸업한 친구에게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를 심화시키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커밍아웃한 친구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큰소리치는 그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속물근성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친구들이 그의 거친 말에 마음이 상해 모두 떠나버리자 그는 포장마차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손님들의 자리에 가서 술을 권하며 중얼거린다. "남자니까 .........아시잖아요? "
한 달, 혹은 일 년의 계약에 얽매어 마지못해 살아가는 남자의 인생에서 술을 마시면서 그런 스트레스를 풀지 언제 풀겠느냐는 논지였겠지만 술에 취한 채 엎드려있는 손님들은 묵묵부답이다. 드디어 우식도 취할 대로 취해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쓰러지고 그 서슬에 술에 취한 채 엎드려 있는 손님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선다.
푸하하하~. 우식이 지금껏 남자인줄 알고 취중진담을 지껄이던 사람들은 ......낯익은 얼굴. 그녀가 까메오로 출연하다.
세 번 째 영화는 정지우 감독의 <배낭을 멘 소년>
탈북청소년 현과 진선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진선은 학교에서 동급생들이 그녀와 같은 탈북자들에게 보이는 호기심-마치 신기한 짐승을 보는듯한 시선을 가지고-어린 질문들에 대답하기 싫어서 벙어리 행세를 하며 밤에는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현이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배낭을 꾸려놓고 있으며 그 안에는 북한에 있는 자신의 부모에게 줄 선물이 들어있다.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오긴 했지만 그들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그들에 대한 호기심만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들 틈에서 소외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현이가 밤에 오토바이를 질주하는 이유는 또 다른 갇힌 세상에서의 탈주를 희망하기 때문이며 그가 남한 청소년보다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선은 노래방에서 노래방 손님이 요구하는 사항을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만큼의 돈을 제외한 월급봉투를 받자 현과 함께 영업이 끝난 노래방에 숨어들어가 받지 못한 금액만큼의 음료수 캔을 현의 배낭에 담아온다. 배낭은 너무 무겁고 둘은 함께 오토바이를 탈 수 없어 결국 택시를 타고 가게 된다. 무거워 보이는 배낭과 자신과는 다른 말씨에 택시기사는 그들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고 그들이 북한에서 왔다고 하자 그들을 무장간첩으로 오인하고 택시를 세워둔 채 파출소로 달려간다.
진선은 중국에서 탈출하려다 붙잡혔던 기억 때문에 겁에 질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도망가고 현은 배낭에서 택시요금에 해당하는 수의 음료수 캔을 놔두고 내린다. 진선의 아파트에 가서 배낭에 들어있던 음료수 캔들을 내려놓는 현에게 진선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다시 그 음로수 캔을 돌려놓자고 말한다. 북한 사람은 다 도둑이라는 인식을 노래방 주인에게 심어놓고 싶지 않다며. 그리고 음료수 캔을 돌려놓으러 가는 길에 말한다. 좀 천천히 오토바이를 타라고. 그들에게는 가야할 곳이 있으니까 말이다.
영화의 엔딩부분은 열아홉의 탈북 청소년이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했다는 자막이 올라가는 것으로 처리된다. 자신의 몸이 있는 곳이 자신의 고향이라는 말을 누가 했던가? 그러나 자신의 사상이나 모든 경험이 형상화되었던 곳을 떠나 전혀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산다는 것은 스스로 선택했음에도 늘 절망적인 불안과 슬픔을 안겨줄 수밖에 없나 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함에도 그들은 늘 이방인이며,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현의 모습은 맹수 우리에서 탈출했으나 갈 곳이 없어 도심을 배회하는 야생동물을 연상시킨다. 슬픈 우리의 현실이다.
네 번 째 영화는 장 진 감독의 <고마운 사람>
군부정치 시대의 취조실 풍경을 장 진 감독이 그 특유의 위트로 그려내고 있다. 학생운동을 하다 붙잡힌 경신. 그리고 그를 취조해 관련 학생의 이름을 알아내야 하는 수사관 주중. 처음에 고문을 하던 주중은 말하려 하지 않는 경신에게 주말도 없고 보너스도 없이 일해야 하는 열악한 근무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고 경신은 그런 주중에게 안쓰러움을 느낀다. 심문자와 심문받는 사람의 입장이 뒤바뀐 풍경은 급기야 그들이 남은 시간까지 노트에 줄을 그어 바둑판을 만들고 오목을 두는 상황으로까지 진행된다. 교대자와 바뀌면서 주중은 경신에게 쓸데없는 민주주의가 어떻고 부르짖기 전에 자신과 같은 비정규직을 위한 투쟁도 해보라고 말을 건네고 고문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들도 가르쳐준다. 경신은 나가게 되면 비정규직을 위한 운동도 하겠다 약속하고....
주중과 교대해서 들어온 다른 수사관에게 경신은 먼저 말을 건넨다. 힘드시지요? 라고...
입혀진 옷으로 사람을 판가름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 역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감독은 이야기하고 있다.
다섯 번 째 영화는 <송환>을 만들었던 김동원 감독의 <종로, 겨울>
2003년 겨울, 종로 혜화동 거리에서 동사한 채 환경미화원에게 발견되었던 중국동포 김원섭 씨에 대한 필름이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면서 체불임금이 이천만원이 넘어가고 그래도 항의 한 마디 할 수 없는 중국동포들. 게다가 다른 재외동포하고는 차등적으로 적용되는 재외동포법. 그들의 경제적 위치가 그들의 사회적 계급을 만들게 되는 자본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씁쓸한 현주소를 실감하게 한다.
돈 한 푼 없이 차갑기만 한 거리에 쓰러져 의식을 잃어가면서 그는 119와 112에 각각 전화를 하지만 그가 받은 응답은 취객으로 오인한 상담원들의 냉담한 말 뿐이다. 돈이 없으니 택시를 타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그만큼 사람들의 인정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실감한다.
바늘로 쿡쿡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 없는 자들에 대한 이 나라의 차별이 없어지게 될 날이 과연 올 수 있을 것인지.....
다섯 편의 영화를 보면서 웃다가, 울다가.......엔딩 크레딧이 올라감에도 한참 일어나기가 힘들었던 것은 내가 진정 아무 것도 가져보지 못한 자의 처지에 있어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하는 물음 때문이었다. 스스로 원해서 갖지 않은 적은 있었겠지만 어떡하든지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었던 많은 것들로 둘러싸여 살아온 삶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어떤 것도 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스스로 체득하지 못하는 한, 없는 자들, 소외된 자들에 대한 나의 감정은 값싼 동정과 연민에 불과한 것이다.
다섯 명의 감독이 사회의 주변부에 보내는 따뜻한 다섯 개의 시선 외에 우리의 관심어린 시선을 더해야 하지 않을까? 소수자란 ‘나의 너’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