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최근 몇 달간 소위 말하는 한국영화 기대작 중 관객의 기대치를 배신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영화가 많았었다. 박찬욱 감독은 전작 <올드보이>와 같은 부글부글 끓는 복수극을 기대했던 관객에게 (어찌보면 중반부 이후 삼청포로 빠져버린다고 할 수 있는) 한 여인의 서글픈 속죄담 <친절한 금자씨>를 내놓았으며, 누구 말처럼 ‘하나만 꺼내도 16부작 미니 시리즈를 끌어갈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설정 두 개’를 끌고 간 <사랑니>는 알고 보니 한 여인(두 여인이라고 해야할까?)의 자아찾기에 관한 영화였다. 한국판 <러브 액츄얼리>로 흥보되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 뚜껑을 열어보니 멜로판 <매그놀리아>였다는 것은 애교에 가깝달까? 나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허진호 감독의 신작 <외출>역시 감독의 특징으로 꼽히던 거리 두고 찍기와 소소한 일상의 묘사를 상당히 벗어났다니, 기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의아스러우면서 놀라웠던 영화는 <형사 Duelist>였다. ‘이번 추석을 재패할 이명세 감독의 액션 블록버스터’로 흥보되었던 영화는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한 이야기꾼의 사설로 시작한다. 주인공인 강동원과 하지원의 등장은 전혀 없이 옹기장이가 한 요사스러운 여인에 의해 음침하고 불길한 집에 들어가서 진행되던 이야기는 서서히 진행되려다가 갑자기 중지되고 이야기의 정체가 얼마 안 있어서 밝혀진다. 장터에서 술을 마시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이 보이는 장돌뱅이가 자기 이야기랍시고 꺼내놓는 이야기인 것이다. 관객들을 다소 당황스럽게 한 도입부가 끝나고 이제 제대로 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원과 안성기는 장터에서 잠복근무를 하고 있고, 강동원(으로 추정되는 자)는 귀면탈을 쓰고 춤을 추고 있다. 그러다가 사건이 터진다. 그런데 이 영화 이상하다. 장터에서는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사극스러운' 음악과 액션 대신에 배우들이 서양식 행진곡에 맞춰 미식축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움직임이라던지 유화를 방불하는 색감, 사운드의 활용 등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 뒤로 전개되는 영화도 이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각과 청각적 쾌감을 극도로 끌어올린 화면에 일반 사극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다소 당황스러울 정도로 현대적인 전개가 이어지는 것이다. 병판대감은 턱수염은 있지만 콧수염이 없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탱고를 추듯이 검투를 하는 식이다. 거기에다 시청각적 쾌감에 봉사하기 위해서 최대한 간소화된 이야기 전개가 등장한다. 마치 이야기 전개가 영상의 표현을 주도한다기보다는 영상의 표현에 봉사한달까? 이렇게 정신없는 카오스의 세계를 뚫고 가다 마지막에 와서는 "정말 대단한 꿈을 꾸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그러나 웬걸, 같이 봤던 친구들은 모두 "아아... 정말 최악의 영화였어."라고 진저리를 치고, 흥행 성적은 철저히 망해버려서 결국 이번 추석 시즌의 승자는 추억의 개그 콩트들을 총집합시켜놓은 듯한 모 조폭 코미디 영화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시청각적 쾌락의 극치를 이루던 영화가 도대체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불친절한 이야기 구조를 들 수 있겠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영화의 구조는 영상의 표현을 위하여 이야기 구조가 봉사하는 꼴이다. 영화의 줄거리 전체가 히치콕 감독이 즐겨썼다던 맥거핀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전개는 전통적인 이야기 중심의 영화에 익숙한 한국 관객들에게는 뜬금없고 당황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이야기라는 동기가 없이 질주하기만 하는 영상에 관객들은 하품만 하게 되는 것이다. 지나치게 빠르고 현란한 전개도 관객을 피곤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이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그야말로 요란하다. 붉은색을 주조로 한 원색의 향연에 장면의 전환은 통속적인 화면의 끊기가 아닌 와이프 효과가 판을 치고, 중간 중간에는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를 이용해서 눈을 최대한 자극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자극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강강중강약"식의 뚜렷한 완급 조절 없이 "강강강강강"으로 밀어붙이는 화면은 관객을 쉬이 질리게 만들기 충분하다. 나중에 가서는 어지러움증을 유발할 정도로 현란한 화면을 끝까지 버티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어떻게 하겠는가, 포기하고 자는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보통 바라는 사극의 전형성을 지나치게 탈피한 것도 관객과의 공감대 형성에 장애가 되었으리라 본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술에서 무국적성을 강조한다. 앞서도 말했던 미식축구를 방불하는 장면의 전개에 애꾸눈 악당이 등장하고 (우리나라 사극에서는 금기시되는) 일본도의 등장 등 TV에서 방영되는 사극의 분위기를 기대하고 봤다가는 많이 당황스러운 설정 덕분에 개봉 당시에도 네티즌의 반응 중에는 "이것이 일본인지 중국인지 우리나라인지 모르겠다."라는 식의 불만이 많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글을 쓰는 나의 입장으로써는 고증에 맞게 제작해야한다는 보이지 않는 부담에서 벗어난, 보기 힘들게 자유로운 분위기의 미술이었지만,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시대극 영화에 이러한 무국적인 분위기가 과연 먹힐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오히려 매국노 소리는 안 들어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나의 입장을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에 매우 만족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한테 권하고 또 의견을 물어보고는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별로 좋은 이야기는 없는 듯하다. 영화가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지나치게 이른 영화일까? 아니면 그냥 나의 취향이 독특한 것일까? 그것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 영화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볼 수 없을 영화라는 것이다. 점점 영화가 상업화되고 철저히 계산되어 만들어지는 시대에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고려하지 않고 날뛰면서 순수한 영화적 쾌감을 보여주는 거대예산의 영화는 지금과 같은 과도기가 아니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이러한 영화들의 실패에서 배운 제작사들은 점점 공산품과 같은 영화를 찍어낼 것이고, 이번 추석 연휴에서 공산품 코미디가 승리를 거두었던 것처럼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러한 영화를 별 의심없이 잘 볼 것이다. 아마 나와 같은 소수의 관객들만 과거에 나왔던 그 수많은 실험작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한 10년이나 20년 뒤에 이 영화는 과연 어떤 위치에 올라와있을까? 화려했던 혼돈의 과도기를 빛냈던 저주받은 걸작이 될까? 아니면 지금 대부분의 관객들의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난해하고 지루하고 정신없기만 한 돈낭비에 머물러있을까? 아무래도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정립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DVD나 출시되면 구입해서 봐야지, 적어도 두고두고 영상에 빠지기에는 충분한 영화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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