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기현상이다. 밤 12시 50분에 영화가 끝나고 극장문을 나섰을 때 함께 쏟아져나온 그 많은 사람들을 보며, 이 많은 사람들이 이 늦은 밤까지 애를 쓰며 이 영화를 보려고 했던 이유를 생각했다.
<복수>시리즈라고 명명되는 이 영화의 전작들을 생각해 볼 때 흥행의 전망이 불투명해야 함이 당연한데도 지금 <무비스트> 사이트에서는 몇명의 관객이 들 것인가를 가지고 때려맞춰!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답으로 쏟아져 나온 평균은 흥행대박을 예감케 한다. 극장에서 내가 확인한 것도 그것이다. 대체 이 영화의 정체는 무엇이지?
2. 만약에 <올드 보이>와 같이 액션과 스릴러가 결합된, 복수를 둘러싼 흥미진진한 블록버스터를 기대했다면 많은 관객이 실망할 것이다. 그 영화가 원작이 있었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박찬욱>감독은 어떻게 보면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었슴에도 그 길을 버리고 원래의 샛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결과는?
몇년 안되는 짧은 세월 동안 <박찬욱>감독의 작가적 역량이 인정받고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인지? 그전까지 영화판에서 그닥 작품으로도, 연기력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던 장금이 <이영애>가 출연한다는 것 때문에 관객들의 궁금증이 확 몰려서? 두가지 다라고 생각하고 속편하고 싶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친절한 금자씨>는 현재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평을 올린 것처럼 컬트적이거나 엽기적이거나 괴기 내지는 공포스러운게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3. 이 영화는 세상물정을 전혀 모른다고 할 수있는 20살 어린 나이에 유괴 살해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13년이 넘게 감옥살이를 했던 <이금자>의 휴먼 네트워킹을 통한 인맥 쌓기와 복수에 대한 예행연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의 전반부를 할애한다. 이 부분에서 <박찬욱>감독은 전편들과는 다른 시도를 보여주는데, 복수는 여전히 한 개인의 문제이며 그 사람의 치유해야할 상처이지만 이의 진행과정을 집단화한다.
<이금자>는 그가 쌓은 휴먼 네트워크를 통해서 도움을 얻고, 실제로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인물들은 모두 그녀의 복수에 대해 공감한다. 이 순간 이미 복수는 <이금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집단의 문제로 성격이 변화한다. 그런데 이 집단화의 과정을 보면 <치유>의 과정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즉 그녀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역시 그녀를 위해 치유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기서 치유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렇게 당했으니 너도 이만큼 당하라는 경리 장부의 수입/지출을 맞추듯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서로가 최대한 상처를 받기전의 상태로 돌아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 후반부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배치되고 있다.
4. <친절한 금자씨>는 웃음이 많은 영화다. 어떤 관객은 이 웃음의 과정에서 엽기성이나 혐오를 느꼈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웃음이 이 영화를 보고자 그 자리에 있는 존재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특히나 <최민식>이 <이금자>와 딸 <제니>를 위해 영어통역을 담당하는 부분은 그 상황설정의 역설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최민식>에 대한 분노 내지는 증오가 그 웃음을 정당화시키는, 극 전개상의 상황 배치가 탁월했음을 인정해야 하겠다.
그리고 이 웃음의 이면에서 이제는 <최민식>마저도 이 <치유>의 과정에 동참하여 자신이 복수의 객체이지만 동시에 치유를 담당해야 할 주체임을 보여줌으로써 앞서 언급한 복수의 성격의 연장선상에 있슴을 보여준다.
5.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실제적으로 진행되는 복수의 과정은 많이 보아왔던 익숙한 스토리 전개를 따르고 있다. 마치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연상케하는 <집단 치유>의 과정은 하나의 복수 환타지를 구성하는데 극전개상 인물의 행위에서 보여주는 리얼리티는 극도로 절제하고, 심리적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면서 이 영화를 보고있는 관객의 공분과 심리적연대를 끌어올리려 하고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서 감독은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긋고자 한다.
결코 아름답지 않으며 오히려 민감하고 대단히 사회적 소재이기에 항상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복수>를 다루어왔던 만큼 감독은 이 영화에서 현실적 공분/분노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영화가 극전개의 전체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는 우화적/환타지적 성격에서 그러한 부분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이 <복수는 나의 것>이 보여주었던 복수가 드러내는 개인적 성격과 사회적 성격의 충돌과 모호한 결말이 의도했던 부분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 <친절한 금자씨>의 후반부 결말을 통해서 관객들은 아름답게 영화속에 갇힌다.
6.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를 영화적 소재로 다루고 있슴에도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복수극과는 다르게 그 집단적/치유적 과정을 드러내어 복수의 개인적 성격이 가질 수 있는 잔혹성을 오히려 완화시킴으로써 연착륙에 성공하고 있다.
요즘 TV 공중파 방송에서 하는 일일 연속극과 주말 연속극이 보여주는 인물설정의 엽기성과 드라마 전개의 잔혹성에 비하면 <친절한 금자씨>는 인물 설정의 우화적 성격이 오히려 더 강조되고 있다고 할까?
<몽테 크리스토 백작>과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모티브와 전개적 특성을 섞어놓은 듯한 익숙한 영화의 전개도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장르적 낯설음과 컬트적 성격을 오히려 제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최민식>이 영화전개의 구조적 틀에 갇혀 연기가 충분히 뻗지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이영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모호한 표정연기는 이 영화를 보러온 선택이 충분히 그 값을 했슴을 인정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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