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코미디 입니다. 영화를 보며 무릎을 치며 웃지 못했다면 다른 곳에서 힘들게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마십시요. 그러한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우니까요. 어쩌면 그것이 박찬욱 감독의 악질적인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수 1부, 복수 2부 와는 달리 이번 친절한 금자씨는 매우 단순한 구조로 짜여져 있습니다. 최민식은 밥먹다가도 그짓을 하는 더 이상 고려의 여지가 없는 순수한 악마같은 인간이고, 금자씨는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한 속죄를 위해 악마 최민식을 처단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에는 아무런 반전이 없습니다. 결국 금자씨는 유괴범을 잡고 피해자 가족들은 준엄한 처단을 내립니다.
이쯤되면 뭔가 잘못되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이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니까요.
얼굴에서 후광(!)이 비칠 정도로 아름답고 너무나 친절한 금자씨. 피해자 가족을 찾아가 식칼로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자를 정도로 속내를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이 속죄에 여념이 없는 금자씨. 집에서는 촛불을 키고 기도를 하다가 쓰러져 잠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는 어김없이 유머가 따르고 있습니다. 새끼 손가락을 치료하는데 13년간 번돈을 다 써버리고, 기도는 눈을 감자마자 벌써 졸면서 몸이 흔들거립니다. 또 속죄를 통해 자신속에 있는 천사를 발견할 수 있다면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합니다.'저 여깄어요~'
그 자식은 찾았냐는 질문에, 왜 아직 안 죽였냐는 질문에 '바빴어'라고 대답하는데 이르러서는 확실히 뭔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유머라는 것은 순수하게 재미를 위해서 혹은 숨막힐 듯 지나친 진지함 속에서 관객에게 호흡할 여유를 주기위해 사용되는데 반해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유머는 영화의 주제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쓰리, 몬스터에서 잠시 보여줬던 그 기괴한 유머들 말입니다.
그런점에 있어서 이 영화는 김성모 화백(!)의 작품과 맞닿아 있는 면이 있습니다. 김성모 화백의 그 유치한 연출들이 회자되면 회자될 수록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너무나 '낯설은' 유치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친절한 금자씨도 그러한 기묘한 낯설음 투성이입니다. 그것이 이 영화를 가장 창의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금자씨가 딸과의 오해를 푸는 씬입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딸과 금자씨 사이에서 감정을 넣어가며 열심히 통역하는 유괴범. 그리고 딸은 결국 어머니를 이해하고 감동적인 포옹을 합니다. 한국어와 영어의 괴리감과 맞물려 더더욱 웃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복수를 끝맺게 되는, 유괴범을 처단하는 장면에서도 일반적으로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전혀 느낄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복수가 아니라 속죄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박찬욱 감독이 생각하는 속죄와 구원의 의미에 대해 좀 느낌이 오나요? 이 기분나쁜 복수 시리즈 중에서 가장 불쾌한 편이 아닐까 합니다.
오래전 해외에서 한 인터뷰에서 왜 폭력적인 씬을 그렇게 잔인하게 묘사하냐, 가학적인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violence 란 것은 관객에게 고통스럽게 묘사되어야 한다, 그것이 미화되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매우 정상적이고 맞는 말입니다. violence 의 본질이 그러하니까요.
복수 3부작을 통해 다룬 복수, 속죄, 구원의 본질적 의미를 파해쳐 봤지만 때로는 진실을 아는 것이 우리 이기적인 인간들에 불쾌함만을 안겨 줄 수 있습니다.
위선의 말들만이 난무하는 이 영화속에서 유괴범 백선생만이 단 하나 진실된 한마디를 합니다.
'세상엔 완벽한 사람은 없는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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