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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가미 류의 '69'가 영화화됐다는 소식을 듣고 첨엔 귀를 의심했다. 하루키가 자신의 소설들을 절대 영화화하지 않는 것처럼 류의 이 작품도 재밌긴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땜에 영화화되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데 재일교포 신예감독 이상일이 메가폰을 잡고는 츠마부키 사토시와 안도 마사노부라는 그야말로 화려한 캐스팅을 앞세워 순식간에 영화화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버린 셈인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1984년에 발표된 소설을 20년만인 2004년에서야 영화화했으니 거의 불가능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하지만 영화를 보러 가면서 나는 은근히 속으로 걱정을 좀 했다. 우선 이 작품은 소설적 재미 즉 읽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지만 막상 스크린으로 옮기면 그 맛이 대부분 사라질 거라는 점, 그리고 류의 자전적 아이콘인 켄 역을 맡을만한 개성넘치는 젊은 남자 배우가 과연 현재 일본에 존재하느냐 하는 점,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들은 워낙에 일본적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데 과연 이런 내용을 가감없이 영상에 담을 수 있을까 하는 점(예를들어 소설의 하이라이트인 고등학교 바리케이트 봉쇄부분이라든지...), 또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60년대의 카운터컬처 분위기를 영화속에서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점, 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69'같은 소설은 엉망으로 할 바엔 차라리 영화화하지 않는게 작가와 이 소설을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예의라는게 내 생각이다.
근데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까 영화를 보기전 가졌던 이런 막연한 불안감은 다 해소됐는데 대신 또다른 아쉬움같은게 마음에 남는다. 무척 좋아하던 소설이라 영화화 소식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고 기대반 걱정반으로 영화를 보긴 했는데 보고난 소감은 '안타임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만루홈런은 아닌...'정도여서이다. 내가 이 소설을 워낙 좋아한 탓에 기대수준이 너무 높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우선 유명 소설을 영화화하려면 방법은 두가지다. 하나는 소설내용을 충실하게 영상화하는 것 또하나는 감독이 새롭게 재해석해 내는 것이다. '해리 포터'같은 영화들이 전자라면 '포레스트 검프'같은 영화는 당연히 후자가 되겠다. 이상일감독은 전자의 방법을 택했다. 소설내용을 거의 그대로 충실하게 영상으로 옮겼다. 근데 이런 방법은 안전하긴 한데 잘못하면 감독의 스타일이나 배우의 열연이 소설 자체의 아우라에 묻혀버릴 수가 있다. '69 식스티나인'이 꼭 그런 느낌이다. 감독의 역량도 충분히 느껴지고 특히 주연을 맡은 츠마부키 사토시의 열연이 그야말로 감동적일 정도인데도 이 영화는 무라가미 류의 소설 '69'의 영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꼭 그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영화는 60년대말 나가사키 사세보의 한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사고뭉치 켄이 같은 학교의 얼짱 마츠이 가츠코에게 잘보이기 위해 멍청이 친구들과 함께 온갖 소동을 일으키는 과정을 담고 있다. 여름을 배경으로 해서인지 나가사키 부근의 경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고 특히 켄이 친구들과 어울려 갖은 사고를 다 치고 다니는 동안 가끔씩 카메라가 응시하는 그 파란 하늘은 참 놓치기 아까운 감상거리이다. 그러나 가이 리치의 영화에서나 어울릴법한 저속촬영과 점프컷은 별로라는 생각이다. 이런 테크닉은 영화자체가 실험적이고 도전적일때나 돋보이는거지 이 영화처럼 소설 내용을 그대로 옮긴 영화와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 법이다.
츠마부키 사토시의 열연은 눈부시다. 이 영화가 성공이라고 말할수 있다면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사토시의 열연 덕분이다. 사토시는 최근 주요한 일본영화들에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고 있어서 이제는 차세대 스타가 아니라 당당히 정상급 스타라고 해야할 것 같다. 하지만 '로렐라이'같은 2차대전 영화에까지 출연하는건 좀 지나치다. 야쿠쇼 코지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칠 그런 영화에 뭐하러 크레딧을 올린단 말인가. 완급을 조절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다마역을 맡은 안도 마사노부의 열연도 빛난다. '키즈 리턴'의 주인공을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고 또 이 영화에서는 상당히 망가지는 역인데도 주저없이 그 역을 소화하는 걸 보면서 역시...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세월은 어쩔수 없는지 이제 이 청춘스타도 고교생 역할을 맡기엔 너무 늙어보인다. 이 영화에서 미스캐스팅이라는 느낌이 든건 다름아닌 레이디 제인 마츠이 가츠코 역을 맡은 오오타 리나이다. 이런 평범한 느낌의 여배우를 왜 캐스팅했을까..이 여배우는 섣불리 영화할 생각말고 지금 하는대로 시세이도 화장품 광고모델이나 계속하는게 나을 듯 싶다. 솔직히 츠마부키 사토시도 켄 역에 그다지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워낙에 열연을 하고 있어서 봐주는건데 이 여배우는 그럴 여지조차 없다. 이 영화의 남녀 주인공은 대표적인 미스캐스팅 영화인 '위대한 게츠비'의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아 페로 커플같다. 남자주인공은 소설에서보다 더 잘생겼고 여자 주인공은 소설에서보다 훨씬 못하단 얘기다.
이 영화에서 또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건 음악이다. 사운드 트랙말이다. 소설을 충실히 영상화한만큼 영화속에 삽입된 음악들도 소설에 등장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나 소설로 읽을때와 달리 크림의 '화이트 룸'이나 '선샤인 오브 유어 러브'를 영화 속에서 직접 듣는 기분은 특별하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페스티벌 장면에서 켄의 밴드가 라이브로 연주하는 '선샤인 오브 유어 러브'는 정말 그만이다. '선샤인 오브 유어 러브'는 워낙에 유명한 곡이라 그동안 숱한 영화에 등장했는데 심지어는 '지옥의 7인'이나 케빈 코스트너의 '작은 전쟁'같은 영화에까지 등장했었다. 나는 페스티벌 장면에서 '선샤인 오브 유어 러브'가 연주되는 동안 '지옥의 7인'에서 월남전 참전용사들이 이 음악을 들으며 춤추던 장면이나 케빈 코스트너가 월남에서 베트콩들과 육박전을 벌이며 이 노래를 흥얼거리던 장면을 떠올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은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는 켄과 그 일당들이 무사히 페스티벌을 치러내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소설은 그렇지 않다. 켄은 페스티벌을 마치고 마침내 마츠이 가츠코를 꼬시는데 성공, 둘이 같이 겨울바다를 보러 여행을 간다. 그리고 감동적인 결말이 이어진다. 감독은 왜 이 대목을 뺏을까. 소설의 이 마지막 대목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걸까. 아님 겨울바다에서 벌어지는 예상 외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아쉽기 그지없다. 어차피 소설대로 갈 거라면 켄과 가츠코의 겨울 데이트 대목을 넣는게 좋았을텐데..영화에서는 소설의 이 멋진 마지막 장면이 통째로 빠져있다. 대신 영화속에서는 여름에 켄이 가츠코와 호수를 산책하며 짧은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니까 그걸로 아쉬움을 달래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교육현실따위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답도없는 문제로 고민해봐야 골치만 아프니까. 대신 영화가 가진 장점들에 최대한 집중했다. 다행히 이 영화는 기획단계에서부터 안전빵을 선택하고 들어간만큼 장점만 보자면 꽤 즐겁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에나 나올법한 그 믿어지지 않는 파란 여름하늘, 점프컷으로 이어지는 우드스탁 페스티벌 스틸컷들, 귀를 찟는 듯한 60년대 록 넘버들, 사토시와 마사노부의 열연, 아무래도 웃음을 참기 힘든 영화속 에피소드들에 눈길을 고정시키고 마음껏 즐겼다. 무라가미 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 츠마부키 사토시와 안도 마사노부의 팬들, 일본영화 매니아들, 60년대 싸이키델릭 록 매니아들께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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