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면서 공허감과 허무가 수학 공식처럼 찾아드는 순간이 있다고 합니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께서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건가'라는 말씀들을 내뱉으실 때가 그 중 하나죠. 하지만 그 세월의 무게를 겪어보지 않은 젊은 세대가 짧은 몇 마디 말 속에 들어있는 엄청난 무력감을 무슨 수로 이해하겠습니까?
무력함이 파고드는 다른 하나는 가정을 꾸리고 오순도순 살아가며 세상살이에 버둥대다가 문득 자기 자신을 되돌아본 때입니다. 물론 가정을 꾸리지 못한 사람들과 새파랗게 젊은 세대들은 똑같은 경험이야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유사 체험은 가능한 무기력인 셈이기에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능한 감정이죠.
'허무'라는 단어는 쓰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어르신들 앞에서 꼴사납게 '허무'라는 말은 감히 들이대기도 송구스럽거니와 이 영화에서 존(리처드 기어)이 느끼는 감정 역시 '무기력' 쪽에 가까우니까요. 그리고 '허무'보다 어딘가 모르게 급(?)이 낮은 이 '무기력'은 열정과 관심, 더 나아가 진정한 자아의 인식을 통해서 얼마든지 치유가 가능합니다.
영화는 존과 그의 주변 인물들을 이용해서 바로 그와 같은 무기력의 치유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댄스처럼 열정적인 게 어디 있으며, 부부 사이만큼 관심이 필요한 게 또 무엇이며, 남편으로서 또는 아내로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그 안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만큼 교과서적인 자아 인식을 어디서 구경이라도 해 보겠습니까?
그래서 이 영화는 대단히 즐겁고 유쾌하며 흐뭇합니다. TV 속 불륜 드라마처럼 자극적이지도 않고, 흔하디흔한 삼각관계처럼 통속적이지도 않아요. 긍정과 희망, 행복으로 꽉 찬, 밝기 그지없는 드라마죠.
그게 <쉘위댄스>의 최고 장점이지만 거꾸로 최대 단점이기도 합니다. 삶의 무기력을 '행복하지만 더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와 동일시해버리는 그 과감한 낙천주의는 자칫 이 영화를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로 머물게 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긴 리처드 기어가 캐스팅된 순간부터 이미 영화가 갈 길은 정해졌는지도 모르죠. 개인적 편견일 수 있으나 완벽한 로맨티스트이자 매력 덩어리인 그의 어느 부분에서도 글자 그대로의 '무기력함'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트집 잡기 좋아하는 낙서가가 벽에 휘갈겨 쓴 낙서에 불과합니다. <쉘위댄스>는 그 낙서를 휘갈긴 자가 보기에도 유쾌하고 그 낙천적 관점이 부럽기까지 할 정도에요. 이 이상의 칭찬이 필요한가요?
(제가 원작을 보지 않은 관계로 원작과의 비교는 하지 않겠습니다) (낙서는 무시하면 그만이죠. 당사자 입장에선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게 낙서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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