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빈 집>에 살고 있지 않나요 - 대중성과 작품성을 지닌 김기덕의 11번째 영화
2005년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상 후보작 출품을 놓고 한 동안 논란이 된 영화 <빈 집>(영어 원제 : 3 iron)이 외국어상 후보작 출품을 위한 요건을 채우려는 건지 이달 15일 정상 개봉 보름 전인 지난 달 추석 연휴기간에 특별 상영회를 가졌다.
이미 61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영화 <빈 집>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은 영화계의 이단아로 불리우며 그의 영화는 일부 김기덕 매니아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브레이크뉴스와 스타뉴스 등 인터넷 매체의 논박 기사를 통해 관심을 모았던 영화 <빈 집>은 김 감독이 전작 영화에서 보여준 폭력성과 충격적인 영상을 어떻게 이어갈지 관심이 모아졌고, 그와 함께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처럼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화와 접목을 시도할지 주목하며 이야기 흐름에 집중했다.
영화는 시종일관 침묵과 분위기에 따라 흐르는 아랍풍의 이국적인 음악에 맞춰 다소 조용하고 무료하게 진행되는 듯하다. 다만, 주인공 태석(재희 분)은 다양한 표정으로 입체적인 캐릭터를, 선화(이승연 분,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주인공 이름도 선화인데..)는 대부분 무표정한 모습의 평면적 캐릭터를 맡아 '빈 집'을 둘러싼 특이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영화 초반, 김 감독의 폭력성을 잘 드러낸 영화 <나쁜 남자>처럼 폭력과 성적욕망이 가득한 선화의 집 풍경이 펼쳐질 때에 인간 사이의 관계와 소통을 공포스럽게 그린 윤종찬 감독의 영화 <소름>이 문득 떠오르며 김 감독이 <섬><수취인불명><실제상황><해안선> 등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적잖이 우려도 됐다.
태석은 고급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집집마다 전단지를 붙인 후, 휴가나 장기 출장 등으로 인해 비워진 집에 들어가 집주인이 오기 전까지 마치 자기 집처럼 지낸다.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손빨래를 해놓는 등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태석으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생명력을 잃은 공간들은 생기를 되찾는다. 증거라도 남기려는 듯 태석은 디지털 카메라에 빈 집의 가족과 자신의 모습을 찍는데 그의 기행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러던 어느 날, 태석은 여전히 광고전단지가 붙어있는 선화의 집에 들어간다. 선화에게 섹스를 강요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으로 인해 멍들고 상처입은 선화의 집은 매우 공포스럽고 생명력을 잃은 빈 집과 같이 죽은 공간이다. 그러한 선화의 집에 태석이 들어 오면서 관객은 그 동안 태석의 기행에 대한 한 가지 궁금증을 풀 수 있다.
태석이 다니는 집은 오늘날 해체된 가족의 모습이고 신혼부부 집에서 고장난 것을 고치며 손빨래를 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핵가족 제도가 가져온 가족의 원형을 회복시키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빈 집의 가족사진을 배경으로 선화와 태석이 찍는 사진은 태석이 정신적인 공허함을 채워가는 은유적인 모습이다.
또한, 영화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도구로서 골프클럽은 폭력과 욕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소유와 집착이 가져오는 헛된 욕망은 가장 사용 빈도가 적은 3번 아이언(Iron)을 통해 관계 속에 폭력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결국 태석이 날린 골프공이 부메랑이 되어 태석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마치 성녀처럼 감싸 안은 선화는 구속된 자아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 자아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폐병으로 숨진 독거노인의 빈 집에서 위기가 발생한다. 타자와 대화를 통해 관계회복이 될 수 없음에도 태석은 납치와 무단 가택침입의 죄명 아래 성적 욕망의 화신이 되버린 선화 남편과 결탁된 형사가 놓은 덫에 걸려 교도소에 수감된다. 수감된 그에게는 가혹한 폭력이 가해지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탈출 욕망은 더욱 커진다.
태석이 수감 후 벌이는 기이한 행동을 벌이는 장면부터 우리나라에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김 감독이 전작에서부터 계속 탐구해온 일관된 관계 회복과 타자와 소통이라는 주제를 보다 쉽게 풀어낸 김기덕 특유의 판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작가주의는 매니아의 전유물이지만 시리즈물의 판타지에 익숙한 관객에게 이 보다 더 좋은 소통의 도구가 어디 있을까. 김 감독 스스로도 대중과 관계 회복을 시도하는 작품이란 느낌이 들게 되었다.
뭔가 욕망하는 밝은 표정으로 계속된 연습을 하는 태석과 간수의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간수가 휘두르는 폭력이 가혹할수록 그의 표정은 더 밝아지고 몸짓은 더 빨라진다. 김 감독은 영화 곳곳에 다양한 유머와 재치를 숨겨 놓았지만 이 부분만큼 미소를 머금지 않는 사람은 없을 듯 하다. 감독의 철저한 계산 속에 가장 마지막에 숨겨진 장치를 발견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며 비로소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 세레모니에서도 연출한 '손바닥에 그린 눈동자'의 의미를 알게 된다.
마치 영화 <영웅>의 절대 고수들이 마음으로 무공을 펼치는 판타지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에서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도 들게 하지만 이에 앞서 판타지를 전제로 했기에 간수의 시선으로 본 태석의 감방은 어느새 요술램프가 되어 버린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해서 태석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태석이 없는 빈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선화. 하지만 예전 같지 않다. 그녀는 남편을 완강히 거부하며 태석과 기거했던 빈 집을 차례로 찾는다. 이 부분은 김 감독의 전작 <사마리아>에서 여진이 죽은 친구 재영의 흔적을 따라 교제 남자들을 한 명씩 만나 재영이 받은 화대를 돌려주는 것처럼, 선화는 태석의 흔적을 따라 그와 기거했던 집(마침, 문이 열려있다)에 들러 그와 교감을 나눈 뒤 집에 돌아오곤 한다.
또한, 교도소에서 출감한 태석 역시 자신이 거쳐온 빈 집들을 따라 선화의 집에까지 이른다. 이제 선화와 태석은 완전한 타자로서 가족 해체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이에 따른 그들만의 소통을 준비하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남편을 거부하던 선화가 돌연 밝은 미소로 내뱉은 두 마디나 영화 내내 불편하던 관객이 선화, 태석과 함께 웃음 을 띤 채 영화관을 나설 수 있다면 영화 <빈 집>이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알게 된다. 이제 관객은 영화 스틸컷으로 많이 이용되는 선화와 태석이 정면을 응시하는 장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며 김 감독이 '이 그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영화를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며 시상식 퍼포먼스에서 언급했던 것에 무릎을 치며 미소지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서며 '아직 우린 빈 집에 살고 있지 않는가'하는 강한 여운이 남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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