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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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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8 오후 4:4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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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우선 제목부터 살펴보자면 상당히 깔보기 쉽게끔 지어져 있다. '퀸카'라는 은어가 붙어 있는 것부터도 그렇고, 생각없이 봐야 재밌는 무식하고 그렇고 그런 10대 코미디물로 보이게끔 만들 우려도 있는 제목이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생각보다 그렇게 무식한 코미디는 아니다. 아니, 상당히 영악하다. 흔히 볼 수 있는 달콤하고 유쾌한 10대 코미디물과는 상당히 다른, 좀 차가운 구석이 있는 영화다.
주인공 케이디 헤론(린제이 로한)은 어린 시절은 동물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보냈고, 17살이 될 때까지 학교를 가지 않고 집안에서만 교육을 받아 왔다. 그러다가 17살이 되면서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을 가게 된다. 사회성을 길러준다는 명목 아래 부모님이 보내주신 학교. 그러나 그곳은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을 몰고 다니는 제니스라는 여자아이와 친구과 되면서 학교의 숨겨진 이면을 알게 되는데, 아이들 사이에서도 식사 시간에 서로 정해진 자리와 등급이 있고, 그 때문에 정신차리지 않으면 학교 생활 제대로 못할 것이라는 것을 케이디는 깨닫게 된다. 그러던 중에 제니스로부터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학교에 있는 '플라스틱'이라는 존재들이다. 학교 내 아이들의 유행을 선도하고, 화려한 복장들로 가는 곳마다 주변을 압도하는 아이들. 그중에서도 '퀸카'인 레지나 조지(레이첼 맥애덤스)가 이른바 학교의 '여왕벌'로 군림하고 있는데, 이 아이가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남을 파멸시키는 게 주된 특기인 악랄한 아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케이디는 그녀를 경계하려고 하는데, 때마침 레지나는 케이디와 친해지려고 하면서 그녀를 경계하려고 하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재미를 한층 배가시켰던 것은 첫째로 주인공인 케이디의 나레이션이었다. 케이디는 자신이 과거에 겪은 일을 회상하듯, 영화 전반을 나레이션으로 끌고 나가는데, 이 나레이션이 평면적으로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영화가 전개되면서 거의 실시간으로 진행되면서 관객의 감정을 함께 조절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레지나가 자신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케이디의 당황스런 표정과 함께 '나쁜 X'하며 감정을 표현하는 식이다. 이런 나레이션이 영화에 한층 몰입하게 쉽게 해주었다. 또한 상식적인 전개가 아닌, 상상력이 나름대로 첨가된 만화적인 전개도 마음에 들었다. 영화에는 케이디가 맞닥뜨리는 실제 상황이 아니라 그녀의 생각도 가끔씩 화면으로 표현되는데, 이를테면 자신의 약을 올리는 레지나와 대면했을 때, '아프리카같았으면 이랬을 것이다'와 같은 나레이션과 함께 인물들이 갑자기 네발로 기면서 으르렁거리는 맹수 흉내를 내며 돌변하는 식이다. 마치 인기 TV 시리즈인 <앨리 맥빌>을 보는듯한 이런 기발한 상상 신들도 영화 보는 재미를 더욱 배가시켜주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현재 미국 최고의 10대 스타 중 하나인 린제이 로한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사실 그녀를 영화에서 본 건 쌍둥이로 출연한 <페어런트 트랩> 이후 두번째인데, 깜찍한 여자어린이로 나왔던 데 비해 정말 엄청 컸다는 데 놀랐다. 나이는 나랑 동갑이지만 성숙미가 물씬 풍겼다는... 역시 서양 아이들은 발육이 남다르다.-_-;;하지만 이런 외모상의 변화뿐 아니라, 연기도 무르익은 듯 보였다. 순진하다가도 차츰 영악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소녀의 모습을 재치있게 잘 소화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다른 10대 코미디들과 다르게 튀는 점은, 흔히 10대들을 타겟으로 한 영화들이 갖추고 있어야 할 우정, 믿음, 사랑과 같은 덕목들이 무참히 깨진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주된 키워드가 바로 불신과 배신이다. 얼굴 마주보면서는 치마가 이쁘다니 상의가 이쁘다니 온갖 입에 발린 칭찬은 다 해대면서, 정작 뒤에서는 뭐 씹은 표정으로 '저런 촌스런 옷은 처음 봤다'하며 호박씨를 까는 식이다. 이런 불신과 배신 등의 요소가 학교 생활을 맹수들이 다투는 듯한 약육강식의 세계로 만들어간다. 친구들과 서로 사이좋게 지내며 사회에서 익혀야 할 생활 태도들을 미리 익혀나가는 이상적인 학교의 모습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것이다. 이런 점들이, 영화가 단순히 철없는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파티나 하는 영화가 아닌, 좀 더 뼈있는 시선으로 시기와 질투로 가득찬 학교내의 세계, 나아가 사회의 모습을 비판하는 영화로 나아가게 한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인 케이디가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어린 나이에 맹수들이 득시글거리는 아프리카에 살면서 그곳의 생활습관에 적응해왔다면, 그만큼 왠만한 무서운 상황이라면 잘 대처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비하며 훨씬 편할 거라고 생각했던 학교 생활과 마주치면서 케이디는 더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목숨을 위협하는 맹수는 없지만,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져오는 학교내의 사회가 케이디에겐 아프리카보다 더한 두려움을 가져온 것이다. 이런 모습은 앞에서 말했듯이 케이디의 생각으론 또 다른 '맹수들의 세계'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렇게 학교 생활을 맹수들의 싸움을 연상시킬 만큼 살벌하기 그지없는 인물들의 심리전으로 표현하는 영화는 그 모습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가득찬 듯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런 삐딱한 시선이 다른 10대 영화들과는 뭔가 다르게 해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미국 고등학생들의 생활을 그린 영화인지라, 한국사람인 나의 입장에선 그리 공감할 만한 요소들을 주진 않았다. 실제로 미국 고등학생들의 생활도 이만큼 살벌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겪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마치 뉴스나 드라마 등에 나오는 사회생활의 모습을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최고로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고, 상대방을 골려먹기 위해 오히려 상대방의 편이 되는 척하고, 그런 식으로 불신과 배신이 계속되는 세상. 그런 세상의 모습을 이 영화는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투영하고 있다. 아마 작가도 이런 풍자 정신을 담고 대본을 썼으리라.
일전에 내가 접했던 10대 영화들 중에 수작으로 평가받았던 것들이 소설 '엠마'를 현대적으로 각색해 10대들의 과시욕과 욕망을 꼬집은 <클루리스>와 학생회장 선거에서 벌어지는 각종 비리와 음모를 풍자한 <일렉션>이 있다. 이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그 중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렉션>처럼 냉소 가득한 시선으로 현상을 비판하다가도 <클루리스>처럼 결국엔 다소 상식적이기도 한 행복한 결말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화해로 끝맺는, 진부하기도 한 결말이 약간 아쉽긴 했지만, 그것만 뺀다면 이 영화는, 오랜만에 만나는 생각있는 틴 무비다. 10대들의 모습을 그리고, 10대들을 주타겟으로 했겠지만, 10대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도 즐길 수 있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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