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이 알고보면 참 인간적인 장소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건 <러브 액츄얼리>를 보고 나서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휴 그랜트의 나레이션은 가족, 친구, 연인 등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공간인 공항의 따뜻함을 예찬한다. 솔직히 이전까지는 공항이라는 곳이 나에겐 참 사무적이고 냉철한 장소라고 여겨졌었다. 서류가 가장 믿을 만한 것이고, 입국하기까지도 까다로운 절차를 수없이 거쳐야 하고, 주변은 경비원들의 예리한 눈초리로 점철되어 있지 않은가. 영화 속에서도 기껏해야 헤어질 위기에 처한 연인들이 극적인 엔딩을 맞이하는 배경이 되는 곳이었고.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 본의 아니게 9개월동안 공항에 살림을 차려야 했던 불운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 <터미널>을 통해 다시 한 번 공항 속의 인간적인 면을 끄집어 냈다. 거기에 두말할 나위 없는 최고의 배우 톰 행크스와 캐서린 제타 존스까지 가세했고. 아시다시피 이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파리 드골 공항에서 10년이 훨씬 넘도록 살아야 했던 이란 인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런 영화보다 기막힌 사건을 스필버그는 놓치지 않았고, 이렇게 인간미 넘치는 휴먼 드라마로 '재구성'했다.
러시아 근처의 조그만 나라인 크라코지아라는 나라에서 뉴욕으로 날아온 빅토르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생판 모르는 타국에 오자마자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는다. 그의 조국인 크라코지아에서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국적이 없어지게 된 것. 결국 입국절차를 받지 못하게 된 나보스키는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결정이 날 때까지 무기한 공항을 살아야 할지도 모를 궁지에 처하지만, 어쩌다가 결국 나보스키는 살 방도를 찾게 된다. 그를 내쫓으려는 감독관의 계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트를 운반하고 공사일을 하며 돈을 벌고, 허드렛일을 하는 청년의 요청으로 인해 커플 매니저(?)도 하는 등 나름대로 공항 생활에 적응을 한다. 그 와중에 아멜리아(캐서린 제타 존스)라는 아름다운 승무원과 애틋한 사랑에도 빠지게 되는데...
우선 영화를 보고 나서 딱 드는 생각은, 확실히 스필버그는 영화를 재밌게 만드는 재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SF, 역사드라마 등 주로 큰 스케일의 영화에서 재능을 보여왔던 그는 요즘 들어 <캐치 미 이프 유 캔>부터 자그마한 규모의 드라마에 관심이 가는지 그쪽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는데(하긴, 곧 톰 크루즈와 <세계의 전쟁>이라는 대작 블럭버스터를 만든다고 하더라만...), 이런 장르에서도 그의 실력은 여전한 듯 보인다. 공항에서 24시간을 생활해야 하는 이방인의 모습을 엉뚱하면서도 어리석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내었고, 처음 설정에서 오는 재미를 중간에 가서도 재치 넘치는 에피소드를 통해 잃지 않고 유지한 점이 좋았다. 거기다가 다소 뻔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력있는 스필버그식 휴머니즘을 첨가해 감동까지 선사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실력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고 깔끔했다.
우리가 여전히 좋아라 하는 배우인 톰 행크스는 이 영화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며 왜 우리가 그를 믿고 좋아하는지를 다시 한번 실감케 했다. 에이즈 환자, 정신지체아에서 이제는 외국인 연기까지 도전한 그는, 어색하기는커녕 자연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며 보는내내 폭소를 자아내거나 적어도 느긋한 미소를 짓게 했다. 최근 <로드 투 퍼디션>, <레이디킬러> 등에서 냉철하거나 혹은 못된 역할들로 변신을 시도했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준 그의 따뜻하고 재치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톰 행크스는 역시나 이웃집 아저씨같은 포근하고 따뜻한 이미지가 제일 어울린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외모 얘기부터 하는게 배우에게는 실례겠지만, 캐서린 제타 존스의 미모는 이 영화에서도 빛을 발했다. 사랑때문에 상처를 받고 난 뒤 낯설지만 따뜻한 남자와 우정을 나누는 그녀의 눈빛은 그녀가 나오는 장면에서 몰입하는데 더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연기도 빼어났다. 기타 영화에서 도시적이고 이지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었던 그녀에게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그야말로 찰떡궁합이었다. 거기다가 여러 장소를 옮겨다니며 바쁘게 다니는 승무원이지만 그 때문에 외로움을 잘 타고 사람에 목말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도도하면서도 연약한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이제 좀 더 깊이 들어가보자. 이 영화의 소재는 영화화하기에 좋은 색다른 소재이긴 하지만, 어찌보면 상당히 민감한 소재이기도 하다. 국적이 사라져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다른 나라로 들어올 수도 없게 된 이런 상황은, 국가가 한 개인을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제미아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에서 인권유린이라는 쟁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이런 소재에 특유의 휴머니즘을 덧입혀 한층 따뜻하고 감동적인 드라마도 다시 만들어냈다. 현실의 씁쓸한 단면도 보여주는 것이 좋은데 너무 휴먼드라마적인 면에만 치중하지 않았냐는 비판이 일 기에 충분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스필버그의 선택이 옳지 않았나 싶다. 중간에 미국의 틀에 짜이고 위선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구석이 보이긴 해도 그것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한 남자의 드라마틱한 공항 생존기가 중심이 된 것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스필버그는 잘 했다고 본다. 사실, 이제까지의 스필버그 영화들을 가로지르는 공통된 키워드는 '인간애'였고, 이 영화에서도 이 주제는 어김없이 구현되고 있다. 그 점이 다소 뻔할 수도 있겠지만, 스필버그는 이 주제를 질리지 않게 또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따끔한 칼날을 들이대고 비판할 수도 있었겠지만, 스필버그에겐 이런 점이 장기였고, 이 영화에서도 그런 장기를 효과적으로 발휘한 것이다. 거기다가 톰 행크스, 캐서린 제타 존스 등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까지 가세해 한층 세련된 휴머니즘을 선사했다. 뻔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절묘한 설득력에 절로 넘어가게 되는 것, 그것이 스필버그의 장기이고, 우리도 이런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물론, 인정하지 않으셔도 괜찮다.^^;;)
헐리웃의 두 거물인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 거기에 캐서린 제타 존스까지 가세해 더없는 기대감을 불어넣은 데 비해, 영화의 주제는 스필버그의 다른 영화들에서 강조되어왔던 '인간미'가 또 한번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그 주제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촘촘했고, 또 편안한 재치도 있었기에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좀 더 웃을 필요가 있는 시기에, 영화가 그런 점에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감독인 스필버그가 말했듯이, 그렇게 하기 위해 만든 이런 영화에까지 굳이 돋보기를 들이대며 현실의 냉혹한 면을 찾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도 이제는 확실히 나이가 들은 만큼, 이 영화에선 이전에는 찾을 수 없었던 스필버그의 여유로움이 담겨 있었다. 영화의 배경이 한없이 분주하고 바쁜 공항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아이러니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참 여유로운 영화다. 바쁜 일상 속을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쾌하게 삶을 즐기는 한 남자의 인생을 보면서, 부담없이 너털웃음을 지을 수 있는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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