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요구할 때, '내가 무슨 슈퍼맨이냐!', '내가 무슨 원더우먼이냐!'하는 불평들을 하곤 한다. 이런 초인적 영웅들이 하는 일들이 그만큼 많다는 소리다. 그러나 막상 뜯어 보면, 그들이 하는 일은 사회 안전을 보호한다는 거 외에는 그리 많지 않다. 슈퍼맨은 원래 출신 성분이 외계인이라 그런지, 사랑에 대한 고민 말고는 그리 인간적인 고민이 보이지 않고, 배트맨은 자기 정체성이나 과거에 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지만 그역시 재벌인, 재정적 기반이 '확실히' 받쳐주는 존재다. 말 그대로 '복에 겨운' 고민인 것이다.-_-;; 그러나 지금 이야기할 이 캐릭터 스파이더맨은 그야말로 힘든 삶을 산다. 슈퍼맨같은 천부적으로 초인적 능력을 지닌 외계인도 아니고, 배트맨같이 돈이 받쳐주는 부유한 이도 아닌, 그야말로 거리를 걷다 보면 백이면 백 발견할 평범한 고학생이기 때문일까.
전편에서 '운좋게도' 슈퍼 거미에게 물리고 난 뒤로 보통 인간은 가질 수 없는 동물적(?) 능력을 소유하게 된 피터는 수퍼히어로의 길에 들어서지만, 그 삶이 쉽지만은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도 해야 하는데, 뉴욕을 수호하느라 정신이 없다 보면 피자 배달은 항상 늦고, 데일리 뷰글 지의 사진기자 역할도 소홀하기 일쑤다. 여자친구인 메리 제인과의 사이는 또 어떤지. 없으면 죽고 못살 절친한 친구 사이지만 하는 약속마다 본의 아니게 어기기 일쑤여서, 메리 제인은 급기야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기에 이른다. 역시 절친한 친구인 해리 오스본과도 자신의 아버지인 노먼 오스본을 죽인 스파이더맨과의 친분(해리에게 알려져 있는 바론 그렇다)때문에 사이가 다소 껄끄럽다. 이런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더한 상황이 닥친다. 피터가 존경해마지 않던 옥타비우스 박사가 핵융합 시연을 하던 중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자신이 조종해야 할 '조종 팔'에 그만 정신을 빼앗겨 포악하게 변한 것이다. 이 닥터 '옥토퍼스'는 해리의 사주를 받아 스파이더맨을 잡기 위해 나서고, 피터는 이런 갈수록 태산인 상황에서 영웅으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블럭버스터의 속편답게 영화는 일단 스케일면에서 전편을 가히 능가한다. 스파이더맨의 액션은 한층 유연해지고 거미줄을 타고 도시를 유영하는 장면들도 한층 더 역동적으로 변했다. 도심의 바닥이나 꼭대기 가릴 것 없이 스파이더맨을 따라다니는 카메라워크를 보고 있자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그 스릴감은 실로 '장난이 아니다'. 거기다 속도감을 배가시키는 지하철 위에서의 액션은 여타 블럭버스터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스피드에 긴장감이 더해져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이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전매특허인 3차원 액션이야 이 이상 말해 무엇하리오.
배우들의 연기도 비교적 좋다. 토비 맥과이어는 아마도 그 아니면 누구도 이 피터 파커 역을 해낼 수 없을 듯할 만큼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다. 스파이더맨 가면을 썼을 땐 한없이 용감하고 날쌔지만, 평상시 피터의 모습은 그야말로 어리버리의 결정체이다. 사랑하는 메리 제인과의 관계도 확실히 결정짓지 못할 만큼 소심하고, 돈 걱정에 애인 걱정에 일 걱정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전형적인 소시민의 전형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메리 제인 역의 커스틴 던스트의 연기도 좋다. 피터에게 한없는 사랑의 상상을 심어줄 만한 매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고, 도도하면서도 사랑 앞에선 약해지는 복합적인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고 있다. 해리 오스본 역의 제임스 프랑코는 이 영화에서 부쩍 그 모습이 성숙해진 듯 하다. 전편에서 그냥 부잣집 아들로써 그저 철없는 청소년의 분위기가 강했는데, 이 영화에서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불러온 스파이더맨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뭔가 알 수 없는 카리스마가 풍겨나오는 연기를 선보였다. 이 배우를 보고 외모도 닮아 '작은 제임스 딘'이라고 도 하는데 잘만 하면 그만한 거목이 될 수 있을 듯 싶다. 악당인 닥터 옥토퍼스 역의 알프레드 몰리나는 악당이라는 캐릭터답지 않게 대단히 이웃집 아저씨처럼 생겼다. 그런 때문인지, 어떤 때는 뼈가 되는 충고를 해주는 따뜻한 과학자로, 어떤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악당으로 변신하며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다만 이 닥터 옥토퍼스라는 캐릭터가 원작 만화에서 가장 사악한 악당 중 하나라는데, 인간적인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주어 그 사악함이 좀 희석된 듯 한 게 아쉬웠다. 이게 이 배우 잘못은 아니지만...-_-;;
현란한 액션도 액션이지만, 무엇보다 이 속편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액션 못지 않게 더 깊어진 드라마적인 측면이다. 세상엔 영웅이 필요하다는 둥, 영웅은 우리들 마음 속에 있다는 둥, 다소 교과서적인 몇몇 대사들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수퍼히어로 영화에서 이런 요소를 빼면 논할게 없으니 이런 불평은 제쳐구겠다.첫째는 뉴욕을 책임지면서 살림도 책임져야 할 피터의 수난기가 잘 드러나 있다. 폼 잔뜩 나게 뉴욕을 유영할 때 입고 다니던 스파이더맨 복장은 소재가 부실한지(?) 다른 빨래와 같이 빨았다가 색깔이 번져 온통 붉으락푸르락한 옷들로 변하고, 일하던 피자집에서는 해고라는 통보, 일하는 신문사에서는 생활비라고 할 수 없을만큼 짠 수당, 창고같은 집에 오면 집주인이 시도때도 없이 집세 달라고 악을 쓰지, 학교에선 허구한 날 강의에 늦어 거의 낙제 직전이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그야말로 폼나는 영웅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안그래도 수퍼히어로라는 소재부터가 비현실적인데, 그저 심각하게 정체성 고민만 하고 있는 다른 수퍼히어로 영화에선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삶의 냄새가 묻어나는 인간적인 모습인 것이다. 거기다가 정상적인 소시민의 삶과 영웅의 삶 사이에서 고민하는 피터의 모습은 그 배경에 이런 힘겨운 상황이 있음을 고려할 때 충분히 수긍이 갈만한 모습이다. 둘째는, 메리 제인과의 애틋한 로맨스다. 이 영화를 그저 스피디한 액션영화라고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멜로영화라고 해도 믿을 만큼 이 영화에는 멜로적인 요소가 만만치 않게 짙다.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신분때문에 본의 아니게 연인을 멀리 해야 하는 피터의 모습, 자신에 대한 피터의 불성실한 모습을 보며 그의 사랑을 의심하며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그를 향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메리 제인의 복잡 미묘한 심리 등은 여느 멜로 영화 못지 않게 이들의 로맨스를 드라마틱하게 이끌어주는 요소다. 영웅이라는 신분을 두고, 친구와 애인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여성 관객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만큼 블럭버스터에선 흔치 않은 감성적 요소이다. 셋째, 주인공의 운명을 시험하는 다양한 상황들이다. 이 속편에서 스파이더맨이 맞서게 되는 악당 닥터 옥토퍼스는 피터가 가장 존경했던 최고 권위의 과학자이고, 스파이더맨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해리 오스본은 피터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연이서 꼬리를 물면서 천하의 영웅이 맞닥뜨리게 되는 설상가상의 상황을 더 극적이면서도 관객이 충분히 공감하고 빠져들 수 있도록 만든다.
규모만 불리기 일쑤였던 기존의 속편들과는 달리 이 <스파이더 맨 2>는 안으로도 더 깊이 파고든 보기 드문 영화다. 그저 지구를 지키는 영웅으로만 생각했던 이들에게도 인생의 고달픔은 있고, 우리가 흔히 겪을 수 있는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지하철에서 닥터 옥토퍼스와의 결투를 마친 후 가면을 벗은 모습이 지하철 승객들에게 드러나자, 사람들은 말한다. '그냥 학생이네. 내 아들보다도 어린데...' 이 말처럼 영웅이란 여태까지 우리가 보아 왔던 거창한 캐릭터인 것만은 아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이 영화는 영웅이란 우리 주위의 어떤 사람도 될 수 있다는 기대감(?)과 우리같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다. 도시 한복판에서 우리처럼 삶의 고충을 똑같이 겪고 있기에, 우리처럼 사랑 걱정, 집안 걱정을 끊임없이 하기에, 같은 수퍼히어로 중에서도 이 스파이더맨은 특히나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족 : 스파이더맨이 거미줄을 뽑기 위해 손동작을 취하는 장면에서 계속 초난강의 '사랑해요' 손동작이 생각난 건 왜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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