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최근 애인 B와 헤어졌다. 그녀가 유부남인 잡지사 편집장 C와 관계를 가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A는 C가 일하는 잡지사에 기자로 들어가게 된다. 그 잡지사에 새로 일하게 된 연상의 사진기자 D(배종옥)에 A는 호감을 갖지만 그녀도 편집장 C와 관계를 갖게 된다. 결국 젊은이는 두 번의 사랑을 도둑맞은 셈이다. 하지만 젊은이도 편집장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권리는 없다. 그는 하숙집 처녀(서영희)와 관계한 후 그녀의 결혼 요구를 거절한다. (줄거리 인용)
컴퓨터 사양이 엉망이다.이젠 영화한편 제대로 보기도 어렵다. cpu가 셀러론 500인지라 음성과 화면이 따로놀았다. 고작 17인치 전체 화면의 1/10정도 크기로 보았지만서도 영화에 몰입할 수 없는 악조건이었다. 불평으로 감상기를 시작하는게 미안하지만서도 그때문인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어 이게 끝이야~"싶었다. 뭔가 중간에 놓친게 많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그게 이영화의 정체성이다. 제목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강렬해서 영화의 내용은 상대적으로 더더욱 평범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런 평범함은 꾸준히 반복되는 일상성과 맥이 닿아있다. 살아가는 순간순간 어디에서도 갑자기 툭~하고 이 영화가 튀어 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대사 "바람피는 여자한테 잘하고 아내한테도 잘하는 게, 바람도 못피고 마누라한테도 못하는 놈보다 백배낫지." 명언이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아내한테만 잘하고 아내와 잘하는 것일테다. 그러나 그건 가장 이상향이고 현실태를 말한다면 문성근이 정답일지도 모다. 사실 박해일은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문성근에게 끌릴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제대로 못하는 해일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해일 첫애인 종옥)에게도 잘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잘한다. 사실 이 두사람의 "사랑"과 "잘한다"는 개념사이에는 사실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문성근의 사랑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가 문제가 되며 잘한다는 것이 주위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건지 진실을 전달하는 건지가 문제가 된다. (이야기가 점점 산만해지지만 사실 늦은시간이라 육체적으로도 산만하고 영화를 본뒤 실은 정리되지 않은 정신도 산만하다.^^) 문성근은 글쓰기와 여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감정과 본능에 솔직하고도 주위사람들을 잘 다룰 줄 아는 인물이다. 이것이 때로는 적절한 가식이며 적절한 부조리라는 것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일단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인간 관계는 어느정도의 그런 테크닉이 필요하고 진실하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문성근은 대단하다. 이미 인간을 조정하는 법을 알고 있기에. 이런 그에게 해일이 양가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혹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도 했는데. 자신이 제거하고 싶은 "질투의 힘"을 준 성근이지만 동시에 그는 내가 넘볼 수 없는 대상이다. 그 질투라는 것이 또하나의 본질인데. 질투는 싫어하지만 바로 열등감의 표출이다. 내가 싫어하지만 그는 이미 나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바로 문성근이 박해일에게 그러하다. 그래서 박해일은 단순히 문성근을 탄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명료한 인생을 살아가는 문성근에게 우유부단하고 미약한 박해일을 끌릴 수 밖에 없다. 문성근은 이미 인간 관계의 테크닉을 마스터한 인물이다. 반면 박해일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청년에 불과하다. 박해일이 순수한 사랑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모자란 하숙집 처녀의 사랑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돌아서는 걸 보면 그의 사랑이 과연 순수하고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모든 20대의 사랑이 아마도 그럴 것이다. 사랑은 흑백논리적이다. 영희가 아니면 순이를 택해야 한다. 영희와 순이를 택할 수는 없다. 영희와 사귀며 (나와 서로 아주 열렬히 사랑하며) 순이를 챙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은 영희와 사귀며 순이를 챙겨주고 순이의 남자친구와 우정을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혹은 영희와 사귀며 영희의 전 남자친구과 순이와 순이의 남자친구와..... 관계는 이미 어느정도는 이율배반적이고 내가 모든이의 사랑을 감싸아우를 수는 없으며 그런 배타적 관계속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문성근은 대단하다. 아내와도 잘 지내며 여자친구와도 잘 지내고 여자친구의 전 남자친구와도 잘 지낸다. 어느것이 진실인지 어느 것이 거짓인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 한명 챙기기도 버거운데 저러는 것 보며 문성근은 인복이 있는 건가 타고나나 카사노바인가?
이쯤에서 기형도의 시를 보자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메었으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자아정체성의 혼란과 자존감의 부족으로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가 없다. 자신만만 자아도취 천상천아 유아독존 스타일 만이 카사노바가 될 수 있다. 카사노바가 진정한 사랑을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위에서처럼. 영화를 보고나서 혹은 보는 중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어느순간 툭 와닿았다.
나는 박해일이다. 혹은 대부분의 20대는 박해일이다. 아마 우울해 하는 화랑이도 그럴테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간 관계란 무엇인가? 늘 웃게 만들고 걱정이 없으면 그게 사랑인가? 치열하게 서로를 탐구하고 때로 실망하고 때로 감동하고 슬퍼하고 웃는 것이 사랑인가? 냉정과 열정사이? 질투는 나의 힘의 그 힘은 어떤힘인가? 영문 제목을 누가 정한건지는 모르겠지만 middle name로 해석한다. power이 아닌 것이다. 미들네임이라. 퍼스트 네임 라스트 네임은 들어봤어도 미들네임은 또 뭔가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그런게 있군. '메리 앤 포트'가 이름이라면 앤이 미들네임이란다.) '서 질투 유민'쯤 되려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질투를 가지게 마련이고 그것은 바로 해일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 질투를 어떻게 이용해먹느냐는 것이다. 인간이 되기 위한 밑거름으로써 말이다. 질투를 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게 사랑이고 사람이니까.
p.s 횡성수설 했습니다. 이렇게라도 안하고 미루다 보면 기약할 수 없어서요^^ 나중에 수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해하고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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