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패럴리 형제의 작품들 속에서 비정상적 외양을 지닌 캐릭터들은 대부분 소외받지 않는 무대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형제가 내지르는 코메디적인 역설을 통해 사회 내에서 도려내지지 않은 체 악취 속에서 부패해가는 편견과 선입견의 완고한 성채를 내보여주고는 했었다.
이번 작품 [붙어야산다]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은 체제를 지니고 있다. 비극의 한 토막일 수밖에 없을 샴쌍둥이에 대한 편견과 당연시되는 한계적 상황의 나열들은 모두 뻔뻔하게 내러티브 상에서 움직여주고 있는 밥과 월트에 의해 역설의 경로를 지니게 되어 스크린 밖으로 투사되버린다. 관객은 자신의 입가에 머금어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웃음 속에서 잠복해있던 비아냥과 조소를 각성하게 되고 긍정적인 경로를 쫓는 눈은 웬지모를 필연적인 불행의 도래를 내심 볼 수 있기를 불안해하며 또한 갈망하게 되버린다.
분명 하나로서 유지되고 있는 체제 속에 길들여진 그들 형제가 가슴 속에 품고 있을 도약에 대한 희망과 실체화되어 있는 한계점의 비극이 얼마나 실제적인 갈등의 탑 안에 갇혀 있는 지 미처 감지하지 못한 체 우린 스스로에 대한 위선의 자각과 그들이 펼치는 코메디 속에서 그만 자연스럽게 패럴리 형제의 복합적 골자의 틀 안에 가두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린 그 골자 안에서 서서히 시작되는 강박에 의해 단순히 개인이 지닌 한계적 상황의 대면이 아닌 하나의 인간이 세상과 얽혀드는 데 있어서 지녀야할 사회학적인 보수론을 여실히 경험케되고 그로부터 도저히 탈주할 수 없을 한계를 인지하게 된다. [붙어야 산다]에서 밥과 월트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단순히 그들 샴쌍둥이의 독자적인 경험과 충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측면으로 내부의 모든 심연의 망상들을 가리워 내보이지 않은 체 사회화의 겹을 내던진 존재는 결코 사회의 망 속으로 스며들 수 없다는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샴쌍둥이는 설정에 불과했을 뿐 사실 그것은 우리내가 최소한 유지하고 있는 실재적인 심연에서의 동반자이며 우리 존재들 자아의 자화상이 아니었던가. 사회는 결론과 책임에 종속된 결과의 조합들일 뿐 그 누구도 개인 내면의 실체적 자아의 동반자들을 맞닥뜨리거나 같은 축에 서있기 바라지 않는다. 은폐와 단정. 사회는 바로 준비되지 아니한 존재들에게 세상에 나설 준비물로서 이 두가지를 내던져주는 것이었다. 월트의 꿈을 위하여 과감히 감춰지는 밥의 실체와 밥의 활동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같이 지쳐야만 하는 월트는 더 이상 존재치 않은 체 명백히 공유하는 경계선에서 떨어져 나와 하나의 측면으로 세상에 서있기 강박하는 것이었다.
패럴리 형제는 이들을 고향에서 다시 만나게 하여 공존을 수행하게 했을진 몰라도 실지로는 엄연히 분열되어버린 존재를 증명하고 '보니 & 클라이드' 라는 실화의 극적 상봉을 통해 패럴리 형제 자신들의 한계 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붙어야 산다] 라는 것은 다름아닌 세상의 율법에 대한 묵시적 긍정이며 또한 개인으로 존재키 위해 새겨야 하는 역설과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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