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토이치! 나 어디에서 웃을까?
슬랩무비라고 하기엔 카타노 타케시(자오이치 역)의 영웅성이 너무 두드러져 있고 뮤지컬이라고 하기엔 잠시 잠깐의 음악적 효과가 영화와 일체 되어 즐길만한 시간이 너무 짧다.
키타노 타케시의 천재성이라고 말하는 잔혹의 미학이 크로스오버로 녹아든 새로운 타케시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의 수동적인 움직임이 단연 더 돋보이길 바랬던 것은 욕심이었을까?
느리다.
맹인 검객답게 자토이치의 움직임은 느리다. 줄거리를 이끄는 것은 그가 아니라 많은 조연이 담고 있는 이유있는 움직임이었을 뿐 그는 단연코 느리다.
그의 대화는 늘 사람의 촉각을 곤두세운다. 느릿느릿한 말투에 다 아는 듯한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화술. 어쩌면 타케시의 감독성은 주연이기에 더 빛을 발하는 일면이 아닐까.
그의 표정은 느리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프로라는 말을 인정하게 만드는 비장미까지 준다. 그러기에 그의 궁극적인 권술이나 검법이 미학으로 추대되는 관객의 착각을 정당화시키는 뭔가가 있다.
머리 좋은 사람의 대꾸정도로 치부되기에는 그의 원래 직업이, 코메디언, 너무 도드라져있고 그만의 냄새가 녹아있는 그의 영화는 분명 새로운 장르의 예술임은 틀림없으나 자토이치로 분한 그는 어느 경계에서 직접 느림을 푸는 표정을 보여줬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예술은 언제나 관객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기 마련이기에.
빠르다.
조연의 어설픈 종종걸음이 짙게 배인 줄거리의 진행은 적당히 빠르다. 새롭게 시도된 크로스오버형의 군무가 배경이 되기엔 아주 큰 비중으로 관객을 조롱하기도 한다.
밭갈이와 망치질, 톱질에 이르는 일본식 난타. 어떻게 보면 자토이치는 속도를 조롱하는 그의 창작성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을지.
긴조 일당을 처단하기 위한 정의의 칼을 뽑는 자토이치의 빠르고 정확한, 놀라운 검술.
완벽함이 더 어울리는 타케시라는 개인적인 믿음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잔인함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았던 것 처럼 그가 뭘해도 다 믿을 수 있다는 종교화된 믿음은 이미 나에게 그의 존재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가능할 수 없는 사실로 영웅이 되어 있는 자토이치,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고 그가 희두르는 칼은 정의성이 있으니 이야말로 절대성이 없이는 영화를 끌고 나갈 수 없는 힘을 가진 그에게 맞는 캐릭터 일지도 모를일이다.
너무 빨라 놓친 아니 너무 설명없이 등장한 군무를 몸으로 느끼기에는 영화의 시간이 짧다. 아니 그가 너무 성급했던 것은 아닐까. 실은 그의 그 비장성을 느낄 여유도 없이 짜증나게 등장한 조연의 시선끌기가 참 거슬렸던 것은 사실이기에.
그의 영화에는 웃음이 녹아있다. 비장함을 덮는 충분한 도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태껏 <하나비>나 <소나테네>. 그리고 <키쿠지로의 여름>에서 보여준 슬픈 웃음들은 오히려 신선함 기폭제 처럼 그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자토이치를 보면서 계속 불편했던 것은 목말랐던 그의 슬픈 웃음이 경계를 벗어나서 속도감을 잃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케시는 강하다. 아직까지 그의 믿음이 충만하고 그의 영웅성도 살아있으며 그의 천재성을 우상의 거리에서 늘 움직이고 있다. 자토이치에게 감히 물을 수 있는 것도 그를 믿기때문이니….그래 이번에는 어디에서 웃을까! 계속 고민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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