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보고 말았다. 설경구란 이름 하나만으로 한참을 기다린 영화.
130분이 넘는 시간동안 영화를 보고 나와선 한참동안이나 가슴과 눈시울이 뜨거워 다른 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재밌었다. 정말 재미있게 봤다. 하지만 '재미있다'는 말을 하기엔 그 숱한 희생자들에게 죄스런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 슬프도록 무서운 역사의 진실 앞에 감히 재미있다고 하다니... 그래서 '재미있다'는 표현 말고, '좋다'는 말로 어설프게나마 갈음하고자 한다.
나에게 '실미도'는 정말 너무나 훌륭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한꺼번에 나왔기 때문이다. 영원한 나의 hero 설경구, 나의 영원한 이상형 안성기, 최근 feel 꽂힌 김강우. 이 세 배우가 한꺼번에 출연을 했고, 또 빛나는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승우까지 나왔으면, 이 영화 반드시 DVD로 바로 소장할 것일터인데..)
이번엔 한 걸음 물러나, 좀 객관적으로 영화를 보자면, 썩 훌륭한 영화라고 하기엔 영 찜찜한 구석이 있다. 워낙 실미도 '684 북파 공작원 특수부대'란 역사적인 사건, 사실이 그 자체로 영화같고, 가만 놔둬도 영화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 감독이 좀 더 역량을 발휘해 뭔가 깊은 울림을 만들어냈다면 이 영화는 정말 근 몇년 간의 최고의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는 실미도 사건을 보여주는 것에, 특히 끔찍한 훈련과 버림받는 그 과정을 영화로 재현하는 것에 충실할 뿐, 그 속의, 그 이면의 깊은 아픔과 갈등, 권력에 의해 세워지고 무너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새로운 메시지나, 감동, 울림을 자아내지는 못 한다. 분명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뜨겁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눈물을 글썽거리게 되지만 그것은 영화 '실미도' 때문이 아니라, 그저 역사적인, 가려졌던 진실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인 것이다. 참으로 위험하면서도 어려운 소재를 다뤘지만, 그만큼 소재 자체의 임팩트가 강하기 때문에 조금 더 684의 '인간들'의 감정선이나 보이지 않는 권력의 비열함, 인물들간의 갈등을 더 깊은 울림으로 그려낼 수 있었을텐데...
여기에서 나는 강우석이라는 감독의 특성을 읽어낼 수 있었다. 투캅스, 결혼 이야기, 공공의 적... 절대적으로 대중 취향의 영화를 만들어내던 강우석 감독은 실미도에서도 역시 더이상의 선을 넘는 용기를 감행하지는 않는다. 더 넘으면 지루할 수도, 무거울 수도,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 같다. 이 점이, 자타가 인정하는 충무로 파워 1인자이자 흥행 보증 감독인 강우석 감독을 '훌륭한 감독'이라고 부르는데에는 주저하게 만드는 점인 것 같다.
영화 실미도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감독의 연출력도 아닌, 바로 배우들의 연기이다. 설경구.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나는 설경구의 '외부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 속에서 갈등하며 눈물을 머금고 목에 핏줄이 터지도록 절규하는' 그 연기를 정말 좋아한다. 그 연기에 있어선 감히 최고라 말하고 싶다. 실미도에서도 그의 그런 연기가 빛을 발하는데, 특히 허준호가 자신의 어머니 사진을 찢어버리자 막 절규하다가 안성기가 지금 당장 어머니를 만나러 가라고 하자 시뻘건 얼굴로 "어머니는 평양에 다녀와서 만나겠습니다." 라고 하던 장면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설경구의 연기는, (각자 개성이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비교한다는 것이 좀 뭐하지만, 내년 연말 영화 시상식에서 주연상 후보로 최민식과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므로 한 마디 하자면) 최민식처럼 강한 카리스마나 진한 개성이 좀 부족한 것 같다. 그점이, 분명 훌륭한 연기자임에 틀림없는 설경구의 좀 아쉬운 부분이다. 실미도에서 설경구의 그 점을 두드러지게 하는 배우는 바로 정재영이었다.
예전에 '피도 눈물도 없이'등의 영화를 통해 정재영이라는 배우가 굉장히 개성이 강한 연기파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그의 강한 개성이 빛을 발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실미도에서 정재영은 단연 돋보인다. 군중 속에 있어도 바로 찾을 수 있다. 워낙 생긴게 좀 '그런데다가' 머리까지 빡빡 민 모습이 영락없이 '박상필' 그 자체였다. 정재영의 연기에 박수를 치고 싶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허준호의 연기였다. 그동안 허준호를 배우로 인식하고 드라마나 영화를 봐온 적이 단 한번도 없었는데 이번 실미도를 통해 허준호가 배우였다는 것을, 그리고 굉장히 멋진 모습을 가진 배우였다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부분에서 사탕 봉지를 떨어뜨리며 차에서 뛰쳐내리던 모습, 아! 결국 들끓던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고야 말았다!)
어떤 평론가가 말하기를 '연기라는 명목으로 영혼의 표정을 보이고 있는 배우'라고 한 안성기. 그는 최재현 준위를 연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 자체였다. 더 할 말 없다. 훌륭하다. 그가 있었기에 영화는 더욱 빛이 났다.
그밖에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만 따라다니던 그 신동엽 닮은 모여라 눈코입 검사 새끼가 이 영화에서 막판에 뒤통수를 치며 역시 비열한(하지만,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는) 중사로 나온 모습, 임원희의 능청스러운 연기, 역시 공공의 적에서 반장으로 나온 아저씨의 여전히 바위같은 든든한 모습. 모두 인상적이었다.
실.미.도. 역사가 버린 이들에 대한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과 깊은 울림이 못내 아쉬었지만 썩어가고 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들추어 세상의 빛을 보게 한 것만으로, 그리고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 때문에, 31명 모두를 주인공으로 생각했다는 영화 제작의 변 때문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리고 쓰레기같은 권력이 흔들어댄 역사 속에서 버림받고 죽어간 숱한 희생자들을 위해 잠시 묵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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