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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밍 풀, 이제는 흐르게 하라 (Spoil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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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밍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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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le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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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25 오전 1:48:12 |
2785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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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가진자, 못가진자, 배운자, 못배운자, 착한이, 나쁜이...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단어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만큼 세상의 많은 조건이 조합되어 전형적인 인물이란 실생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작년 겨울 <8명의 여인들>이라는 재기발랄한 영화 한편을 들고 다시 찾아온 감독 프랑스와 오종. 연극무대 형식으로 특이하고도 색다른 극전개 못지않게 눈길을 끌었던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8명의 여인 캐릭터였다.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한 명의 남자주인공은 뒤통수만 보인 채 영화 첫머리에서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 속에 한 꺼풀씩 벗겨지는 여덟 여자들의 캐릭터가 참으로 특이하고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아마도 이 영화는 극장에 걸리기가 무섭게 내렸든지 아니면 개봉이 무지 늦춰졌던지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참 아까운 영화 중에 하나였다.
난 사실 시사회의 묘미를 여기서 찾는다. 남들보다 며칠 먼저 혹은 공짜로 본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극장에 걸린다고 해도 며칠 반짝 올려지고 말아서 그 기회를 놓치기 쉽거나 혹은 극장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영화를 시사회를 통해 극장 대형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돈주고 볼 가치가 없는 영화이기 때문인 경우도 대부분일테지만 그것보다는 예술성이나 작품성에서 대중과의 괴리가 있어 흥행성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도 종종 있다 한다.
이런 영화들은 비디오나 DVD가 출시되어서나 볼 수 있지만 그래도 극장의 대형 스크린에서 보는 것은 참 힘들다. (어떤 영화는 DVD조차도 늦게 출시되는 경우도 잦다. 올초 최대의 감동이었던 The Hours는 한참 지난 이제서야 DVD 출시 계획이 있다고 할 정도니...) 여하튼 행운의 보석을 발견할 수 있는 것, 이게 바로 시사회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설이 길어졌다. 어쨌든 그 8명의 여인들의 오종이 다시 되돌아 왔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 8명의 시끄러운 여자들이 다루기 힘들었던 탓일까 이번에는 전형적인 Stereo 타입의 두 여성으로 구분해서 살짜쿵 데리고 돌아왔다.
기품과 지적인 우월감을 과시하며 최대한 고상한 척,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자신의 이미지에 고착되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 그들은 자기와 다른 이들을 경멸하고 무시하지만 마음 한구석 그들에 대한 선망과 질시도 늘 동반하게 된다.
그와 반대로 별다른 지적 활동을 하지않고 늘 남자와 하룻밤을 지새고 술에 절어 사는게 일이며 자신의 몸이 한 재산이라는 듯 외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여성. 머리가 비어있는 듯 욕구를 분출하고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기는 하지만 지적인 여성미를 발휘하는 여자를 보면 한편 자신의 천박함이 부끄럽다.
"사라 모튼"- 범죄 스릴러를 전문으로 이미 자리를 굳힌 중년의 여류 소설가.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이 넘치며 최대한 기품과 고상함을 자랑하려 애쓴다. 이제는 고갈돼버린 글감을 찾기 위해 자신의 애인이자 출판사 사장인 "존"의 프랑스 별장을 찾는다.
사라가 그 별장에서 우연치 않게 만난 존의 딸 "줄리", 엄마는 어려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탓에 늘 외로움과 그리움이 가득하지만 그 마음을 덮느라 자기의 아름다움만을 즐기며 그저 쉽고 편하게 살아간다.
별장의 스위밍풀에서 늘 수영을 하며 밤이면 욕망을 한껏 발산하는 "줄리". 사라는 너무나도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과 달리 줄리의 탱탱한 아름다움과 젊음이 부럽지만 시기심은 애써 감추고 그녀의 난잡한 생활을 비웃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표현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갖고 발산하는 줄리가 한편 부러워지고 언제부터인가 대리만족을 하며 범죄스릴러물은 접고 이제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애소설을 쓰기에 이른다.
깨끗하고 맑은 자연과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줄리와 달리 늘 방안의 전기코드, 컴퓨터, 프린터와 씨름해야 하는 사라는 자신의 처지가 날로 처량해만 간다. 낙엽이 떠다니는 스위밍풀에 그저 손만 담글 뿐이다. 막연한 대리만족고 엿보기로 질시와 선망을 표현하던 사라도 어느날 깨끗이 청소된 스위밍풀에 몸을 담근다. 결벽에 다름아닌 지식인들의 뒤틀어진 이중성을 엿보는 듯한 대목이다.
그러던 어느날 집안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 줄리와 사라는 공범이 되면서 여인들의 심리를 다룬 듯한 심리극에서 점점 미스테리한 스릴러물처럼 이야기가 전개된다.
게다가 막판에는 반전이다. 요새 영화들의 유행인 것 같다.
하지만 눈치채기 쉬운 반전이나. 혹은 반전이 일어난 뒤에 아! 하고 금새 알아채는 영화는 마치 콜럼부스의 달걀처럼 너무 쉬운 답안을 뱅뱅 돌린것 같아 오히려 언짢을 때도 있다.
그러나 스위밍풀의 반전은 여타 그런 영화와는 조금 관객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알테면 알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라는 듯... 하지만 그 답안을 해결했을 때에는 마치 어려운 수학문제를 푼듯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함께 답안을 해결하는 기분으로 함께 하고. 혹 볼 예정인 분들이라면 여기에서 back버튼을 눌러 되돌아가길 바라고.
이제부터 Spoiler !!
영화도중 몇번 카메라는 비키니를 입은 아름다운 줄리의 자태를 훑어간다. 그러면서 배꼽주위의 상처를 상기시킨다. 줄리에 대한 줄거리는 여기까지다. 관객은 계속 줄리가 존의 딸이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함께 하다가...
마지막 장면에 존의 사무실을 찾아간 사라가 줄리와 일면식도 없는듯 스쳐지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줄리가 입에 교정기를 단 뚱뚱한 여학생이라는 사실에 도대체 어떻게 된건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사라가 별장에서 만난 줄리는 교통사고로 죽었던 줄리의 엄마였던 것이다. 사라가 소설의 실마리를 풀지 못해 찾아간 별장에서 발견한 줄리 엄마의 로맨틱 스릴러 초고본. 그녀의 글을 찾아낸 사라는 그 글을 읽고 자신의 소설에 넣으며 마치 자신이 자신이 갖지 못했던 많은 내면을 그녀와 함께 겪으면서 자신의 소설이야기를 풀어나간 것이었다.
아.. 줄리가 바로 그녀였구나. 영화를 보고 나서 화장실에서 떠올렸을 때 소름이 쫙 끼쳤다. 반전의 묘미라는 관점에서 보면 만점이었다. (물론 무슨 뜻인지 답을 풀지 못했다면 풀리지않는 사슬처럼 가슴이 답답한 영화가 됐겠지만)
그러나 거기까지일 뿐이다. 사실 영화를 되짚어보고 나와서 생각하는 것은 좋았지만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나 아귀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영화의 감상이나 느낌이라는 거을 1+1=2라는 수학공식과 같이 딱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므로 2시간 남짓 영화속에 빨려들어가 생각까지 할수 있었다면 그래서 스위밍풀이 너무 좋았다.
게다가 내가 가졌을지도 모르는 그 허황과 가식이라는 면까지 공감하는 영화이기도 했으니...
사라가 정원사 할아버지에게 몸을 허락하는 장면이나 자신의 굴레를 모두 벗어버리고 수영장에 몸을 풍덩 담그는 부분, 마지막 줄리 내지는 줄리의 엄마와 나누는 인사장면에서는 오쇼라즈니쉬가 말했던 "흐르게 하라"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흐르게 하는 것은 라즈니쉬의 말처럼 단지 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담겨있는 모든 것을 열고 소통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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