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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목]"왜...7년이어야 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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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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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e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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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21 오전 1:4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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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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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이 7년간 한 영화에 매달릴 수 있었던 사유가 "모정"이라는 사실은, 진정 호감가는 "진심"이다. 땅위에 존재하는 죄많은 자식들을 대신해 주경중감독이 불러준 이 사모곡이 긴시간의 노력을 헛되이 만들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이야기가 더욱 세련되지 않아서 다행이고, 스타가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며, 마지막으로 도념이가 세상을 향해 발을 딛게 돼서...정말.... 다행이다.
영화 동승을 세 번째로 본 그날. 유독...많이 울었다. 좌우에서 울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어머니의 옆모습 때문이었을까. 여전히 낮아질리 없는 도념의 단풍나무 눈금 때문이었을까 , 망망대해에 떨어져 나무토막을 만난 눈먼거북이의 행운(?)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너무 예전에 알아버려서였을까. 어쩌면... 어머니를 향해 퍼드릴 나의 사랑이... 도념이의 토끼가죽 목도리의 털한자락만큼도 못한 미미한 정때문이어서 였는지도 모른다. 끝없는 눈물 끝에 극장을 나온 하늘엔 잡고 기대어 울 구름 한 자락... 보이질 않았다. 영화 동승은 두가지 공간 안에서 어린 동승 도념이가 겪는 (보통의 불교영화가 그러하듯. 속세와 속세가 아닌곳)"고초"의 행간에 "필연"이라는, 질긴 끈나풀을 촘촘히 휘두른다. 도념이가 어떻게든 여자보살을 따라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는 몸부림의 과정, 절 아래 동네아이들과의 어울림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몸부림의 과정은 이미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수 없는 [운명]에 대한 절대믿음을 전제로 하고있어 슬프고 고되다.(인간이 자의의 힘으로 이 모든 과정을 이겨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이미 우리는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도념이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관객에게 "슬픔"을 던져주는 첫 번째 단초다.
무언가 예견된다는 것은 그것이 옳든 그르든 슬프다. 젊은스님의 손가락이 향유불에 그을려지는 순간 우리가 맡게 되는 것은 인간의 살내음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흘려내야 하는 젊은스님의 고통섰인 피울음의 내음이다.) 맹구우목(盲龜遇木)의 진리를 어리디 어린 도념에게 설명해야만 하는 큰스님과 드넓디 넓은 망망대해의 넓이를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어린 도념은 모두 고된 수행자의 모습을 묘사한다. 찻잔을 사이에 둔 노스님과 애기스님의 행간의 폭은 상상할수 없이 넓고 긴 동시에 같다. 수년을 살다가 저세상으로 간 인생과 수십년을 살다가 저세상으로 간 인생의 차이점이 "길이"말고는 외에 논할것이 없는것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삶은 망망대해처럼 드넓고 고되기 때문이다. 영화 동승은 이렇듯 7여년간의 고된 제작기간동안 감독이 단한번도 잃지 않았던 인생을 바라보는 깊은 (종교의 여부와 무관한, 공통된 시선)통찰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동승이 여타의 Well-made Movie와 다른 이유중의 하나이다.
우스꽝스러운 설정이나 쉬운 표현으로 영화의 잔재미를 더하고 빠른 이야기 전개방식으로 속도감을 붙이려는 근래의 영화들과는 매우 다르게, 영화에서 재미를 주는 부분들마저 꾸밈없는 "바로가기"의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에서(젊은 스님이 물에 빠지는 장면등)동승은 동시대성을 타고 내려왔지만 , 불교를 바탕으로 하고있지만, 그러한 "바로가기 정공법"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여타의 Well-made Movie, 즉, 근래의 상업영화와 매우 다르다.
노스님에게서 나오는 심오한 대사들은 7년간 갈고 닦아온 감독의 여한이며 암투병으로 이세상을 뜨고만 자신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주경중감독의 피맺힌 사모곡이 빚어낸 "작품"이라 는 사실을 증명한다. 아이의 죽음을 기리러 절에 온 보살과 어머니를 그리는 동승과의 구도는 자칫보면 노출이 심한 작위적인 구조이지만, 그 "겹"안에는 감독의 "통찰력"이 건네주려는 "진심"이 숨겨져 있어 심정을 울리고 만다.
'너도 나도 풀도 꽃도 모두 부처다'라는 영화속 대사는 바로 그 슬픔을 건네주는 첫 번째 단초와 일맥상통한다. 모든 중생을 존중하라는 불교의 진리에 근거하고 있는 이 대사는, 종교의 구분을 뛰어넘는 뛰어난 "포용력"을 내포하는 시점이다. 끝내 노스님이 도념을 사회로 내보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가 "포용력"없는 속세의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승]의 두 번째 슬픔의 단초는 도념이가 어린 동승이라는 설정 때문이다.(당연한 전제이지만) 도념은 영화속에서 성장하지 못한다. 단풍나무의 눈금아래에서 연신 자신의 키를 재보는 도념의 유일한 바램은 어머니를 만나는것이지만, 동시에, 다시는 단풍나무밑에 가지 말라는 노스님의 경고아닌 경고는 도념의 성장을 억제시키는 또다른 장막이다.
도념이 닭고기를 먹은후 노스님에게 매를 맞고 힘겨운 경문을 외고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수많은 장벽은 도념의 성장을 의도적으로 억제시키는 장치이다. 아이는 자라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데 영화는 아이의 성장을 방훼한다. 성장은 곧 침묵과 완전히 다른 형태의 고행임을 영화는 총각스님을 통해 단계적으로 묘사한다. 즉 영화는, 어린 도념의 고행과 총각스님의 고행 두가지 과정을 견주고 또 , 동시에 병렬함으로써 원형안에서 정도의 차이만다르게 진행되고 있는 삶의 고행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도념을 성장시키지 않고 스님은 도념을 단풍나무밑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며 도념을 아이들과 떼어놓는 것이다. (결국 예상대로, 도념의 유일한 친구는 서울로 이사를 간다. 도념의 소통 가능성을 완전히 절단시키는 순간.) 도념이 성장하려는 순간. 사회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노스님은 참았던 도념의 출생에 대한 사실(나는 아직도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을 토로해가면서(노출된, 첫번째 크라이막스) 까지 도념의 진행을 방훼한다. 결국 도념은 영원한 아이이기 때문에 슬프다. 마치, 도념은 영원히 단풍나무아래서 자라지 않는 자신의 키를 보며 엄마를 슬피부르짖으며 눈물을 쏟아내야 하고, 영원히 절안에서 수행하며 다시 총각스님의 나이가 되면 총각스님이 겪었던 "마음속 타는 불"을 끄지 못해 괴로워할것만 같아서 슬프다. (비록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동승]의 마지막 슬픔의 단초는 도념이 비탈길을 향해 바랑을 짊어졌기 때문이다. 긴긴밤 잠이 오지 않을 때 까드시라고 노스님께 두고간 알밤을 보며 참으로 많이 울었다. 눈을 뜨면 떠난 도념을 걱정할 노스님의 심정이 어디 그 알밤의 무게만큼 하겠는가. 참고 참았던 도념의 출생의 사연을 토해내고서라도 도념을 잡아야만 했던 노스님의 고통의 무게는 영화속 묘사이상으로 전해진다.
도념은 예상대로 비탈길로 바랑을 짊어지고 떠난다. 초부(전무송)는 세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에서 도념을 배웅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너는 찾을게 있어서 좋겠다."
라고 말하는 초부의 대사는 영화의 가능성과, 도념의 미래와, 감독의 진심이 절정에 달하는 두 번째 크라이막스이다. 결정적인 감정의 폭발보다 더욱 큰 빛을 발하는 이 대사와 초부의 경건한 표정은 이영화가 얼마나 많은 고심과 준비 끝에 만들어진 작품인가를 증명하는 훌륭한 엔딩이다.
바랑을 짊어진 도념의 뒷모습을 조명하는 유려한 카메라는 맹구우목(盲龜遇木)에서 언급한 망망대해대신 , 끝없는 눈밭을 보여준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눈밭을 헤쳐가는 도념의 뒷모습은 지나치게(?) 가슴아프다.
삶은 끝없는 고행의 연속이다. 나와 당신이 불자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삶은 끝없는 고행이다. 어머니를 찾을때까지 세상끝까지 다 돌아다니겠다고 말하는 도념의 대사가 어느부분보다 진실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미 우리전부는 모정앞에서 끝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세상끝까지 돌아다녀서라도 찾고 싶을 만큼의 간절한 이 모정이 누군가에게 혹은 당신에게는 귀찮고 버거운 존재가 아닌지 다시 한번 자문해보아야 할 것만 같다. [동승]은 신선하고 세련된 매끈한 상업영화는 아니다. 그간 보아왔던 불교영화와 다른 색다른 점을 찾기 위해 상영시간 내내 분주한 당신에게 그리 흡족할만한 영화도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의 끝없는 진정성에 끝없는 지지를 보내고 싶다. 모정이라는 두단어에서 출발한 이 어린 동승의 이야기에 수없이 흩뿌려진 삶의 포용력 , 감독의 깊은 통찰력, 고심하고 또 고심한 세심한 대사들과 유려한 비쥬얼. 아이의 순수함이 세상으로 나가게 되는 시점에서 끝난 적절하고 훌륭한 엔딩. 미쳐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장점들 때문에 나는 동승을 지지하고 싶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뒤 동승을 다시 보고싶다. 여전히 영화속 도념은 자라지 않았겠지만. 여전히 도념이 비탈길로 가는 부분에서 영화의 엔딩크레딧은 올라가겠지만 속세의 먼지와 잡념에 희석된 나의 모정을 다시금 회복시키는 분명한 전환점이 되어줄 것 이라는 확신 때문에 나는 다시 [동승]을 보고싶다. 한국영화계는 현재 이상한 형태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관객은 쉬운영화만을 원하며(살인의 추억의 훌륭한 선전을 제외한.) 충무로의 현명한 제작자들은 그들이 만든 완성도있는 영화들 때문에 채무빚에 시달려가며 차기작들에 대한 말끔한 지원을 원활히 못해내고 있다. 한국영화는 분명, 양적으로는 팽창(나는 성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겠다.)하였으나 질적으로는 향상되지 못했다. 여전히 멀티플렉스들은 목요일에 개봉한 영화들의 추이를 지독히 지켜본 후 일요일날 여러그것들의 막을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으며 충무로의 스카라에서는 조용히 병구가 열댓명의 관객들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가족과 지구를 지키려고 홀로 몸부림치고 있다. 이상한 형태로 변질된 한국영화계의 맹점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동승]의 7년간의 고행의 결과는 그래서 반갑다. 고심해서 반갑고, 쉽지 않아서 반갑고, 매끈하지 않아서 반갑다. [동승]의 결과가 상업적으로 성공적이든 그렇지 않든 한 개인의 7년간의 고행은 결과론적으로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보여진다.(물론 주경중감독의 차기작 또한 심중깊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지난날의 이와같은 힘겨운 사투는 그만되길 관객의 입장에서 진정으로 바란다.) 영화 [동승]은 비단 어머니와 삶과 이성앞에서만이 아닌, 모든 만물앞에서 왜 우리가 할수 있다면 가능한한 최대한의 폭으로 겸손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반복하여 되뇌이는 진심있는 수작이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이런영화를 잊고 있었고 임권택의 [만다라]와 주경동의 [동승]사이에 교집합처럼 존재하는 전무송씨의 존재가 범상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도념이의 바랑이 가벼워지지 않더라도 마음에 지고 떠난 바위의 크기는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늘 그렇듯. 망망대해에서 나무토막을 만나기까지 우리는 그 때를 기다리며 마음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 왜냐하면 삶의 무게는 지나치게... 무겁기 때문이다.
한마디 더 : 곱씹어 생각해도, 기자시사때 보았던 위대한 롱테이크를 자른후 극장상영을 감행한것은 이해할수 없는 실수로 밖에 보여지지 않았다. 진정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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