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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상이라는 젊은 남자가 있다. 원상은 얼마전에 유부남을 사랑해서 자신을 떠난 애인의 대한 원망과 그 유부남에게 묘한 질투를 느끼고 있다. 현식이라는 중년의 남자가 있다. 원상의 애인을 뺏은 그는, 학식과 사회적 위치도 확고하면서, 언제나 여자를 원하고 사랑을 꿈꾸는 로맨티스트이다. 성연이라는 독신녀가 있다. 그녀는 수의사이지만 그 안정된 직업을 미련없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고 또한 자유분방하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은 이들의 묘한 삼각관계를 거칠면서도 건조하게 훔쳐보는 식의 카메라 앵글로 잡아내고 있는 오랫만에 만나는 한국영화의 수작이다. 짐승으로 빗대어 이 영화를 표현하자면 아마 소 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소처럼 계속 되새김질을 하는 자신을 알아차릴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씹을 수록 재미있고 추리소설처럼 흥미로운 연출로 많은 영화적 이해에 대한 결론을 끄집어 낼 수 있기때문에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안주거리로 먹을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질투는 나의 힘>이다. 소같은 영화이기도 하고 소주의 안주같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박찬옥으로 홍상수감독의 수제자(?)라고 한다. 그래서 그럴까? 영화의 도입부부터 그는 거친 호흡으로 인물들 상호간의 관계를 잡아내고 있으면서 관객에게 훔쳐보고 난 뒤에 소문내고 싶은 안달감을 선사하고 있다.
원상(박해일)은 현식이 일하는 잡지사에 다니는 친구를 찾아가서, 우연히(?) 현식을 만나고 그의 거침없는 행동과 무례한 어투에 묘한 질투감을 느끼고 그 잡지사에 취직을 하는데 성연(배종옥)이 사진작가로 이들의 회사에 들어오면서, 이들의 관계는 다르게 발전하기 시작한다. 원상은 단순히 현식(문성근)이라는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질투와 호기심으로 그에게 접근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현식은 원상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면서 아끼는 직장후배로써 그를 대한다. 또한 현식은 성연에게 그 특유의 자신감과 자유주의로 다가서면서 성연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룩(?)하고 성연 또한 그런 현식에게 관심을 가지게 준다. 동시에 원상도 성연에게 관심을 느끼면서, 그들의 관계에 심한 질투감을 느낀다.
어찌보면 그저 그런 삼각관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원상의 과거 애인를 보면서 원상이 느끼는 현식에 대한 질투라는 감정의 색깔은 불투명해진다. 또한 갑자기 튀어나오는 성연이라는 존재는 사람들간의 관계가 그렇게 불쑥 이루어지고 그 의미가 형성되기전에 관계를 가지고 감정의 골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을 페미니스트적 성격을 띤 영화라고 보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성연이라는 인물은 영화속에서 어찌보면 원상과 현식의 관계를 확정짓는 필요 조건으로 나오는것 같지만, 카메라가 그들을 항상 개별적인 존재로 잡는 것처럼 성연이라는 인물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관계를 스스로 만드는 인물로 보인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하면 원상과 현식의 관계 즉 질투를 유발하시키는 인물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성연 그 자체만으로 또 다른 의미와 얘기가 형성되버린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처럼 보이겠지만 성연은 육체와 감정이 따로 분리된 현대의 여성를 상징하고 있는 인물이고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남자를 대하는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연은 영화 마지막에 자신이 스스로 형성했던 그들과의 관계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원상과 현식에 의해서 단절되어 버린다. 그래서 영화는 남성우월주의 사회를 꼬집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영화속에서 그려지는 성연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영화를 들여다 보면서, 되새김질을 해보았는데 감독이 그리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난 원상의 입장에서 다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 영화 초반에는 순수한 남자로 현식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피해자로 나온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거와 같이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피해자는 성연이다, 그렇다면 원상이 왜 영화속에서 질투라는 감정에 의하여 무너지고 상처받는 인물이 아니라 감정(순수한 마음)과 사회라는 경계선에서 조금은 타락되어지면서 성숙되어가는 인물로 그려지는것이, 성연을 그렇게 묘사한 감독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이유로 생각되어졌다. 여기서 나는 영화를 이차적으로 되새김질을 하기 시작했다 원상은 현식에 의한 자신의 상처를, 그와의 교감을 통해서, 결국에는 성연과 하숙집 딸 혜옥에게 고스란히 주는 사람으로 변해버린다. 현식이 원상에게 느끼는 감정은 자신과 다르게 편안한 느낌을 소유해서 좋아했는데 결국에는 현식은 원상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깨끗한 물은 쉽게 더러워질수 있듯이 원상은 현식에 대한 질투를 동경과 이해로 감정의 전환을 하면서 여성에게 책임지지 못할 감정의 상처를 주는 우리네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남자로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왜 감독은 원상과 현식의 교감을 눈에 띄게 잡아내고 훔쳐보고 있었을까?
결국 저 의문에 의하여 영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나는 소화되어가고 있었던 <질투는 나의 힘>에 대한 영화적 이해를 다시 뱉어내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먼저 원상의 과거애인 내경에 대한 카메라의 눈을 따라가보자 . 그녀는 분명 상당히 영화속에서 중요한 사건의 발단이 되고 이야기의 도입을 이끌어내는 인물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내경의 모습을 잡아내지 않고 그저 실루엣을 잡는 선으로 마무리해서 관객에게 호기심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것은 감독의 의도된 트릭이다. 관객이 내경의 모습에 신경쓸때 영화속 현식과 원상의 관계는 그녀와는 상관없이 각자의 사건으로 뛰어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원상이 현식에게 가졌던 질투라는 감정은 성연의 등장으로 곧 다른 질투의 감정으로 대체되어 버린다. 또한 현식이 과거에 내경에게 어떠한 감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나올 뿐 그저 카메라는 현식과 원상이 남자로써, 동지로써의 관계에 더 포커스를 맞추어 그저 훔쳐보기 바쁘니 말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내경이 존재는 그저 남자들에게 서로를 이해하는 하나의 공통분모로써의 역할일 뿐이다. 이것은 그녀의 존재가 또 다른 반전을 끌어내는 인물이 아니라 단순히 현식과 원상의 관계를 이해시키는 인물로 이용되어졌다.
그럼 혜옥의 존재는? 나는 혜옥과 원상의 정사씬에서 상당한 충격을 느꼈다. 어떠한 카메라 기법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왠지 너무 야하고 선정적인 장면을 보는듯한 충격은 그들을 보는 카메라가 왠지 나 자신으로 해석되어지고, 내가 왠지 그들을 훔쳐보는 것 같은 느낌이 감독의 의도된 트릭에 의해서였다는 것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관객은 어쩌면 의아해 했을지도 모른다. 또 다시 불쑥 형성된 혜옥과 원상의 관계에(예상했던 분도 있었을 것이다).... 원상과 혜옥이 감정의 이음선을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맺어진 이들의 육체적 결합은 원상이 확실하게 현식을 이해하고 동경하는 감정의 전환점을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영화는 이 정사씬 이후에 현식의 장인 장례식을 통해 좀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진, 원상과 현식, 그 둘을 잡아내고 있었다. 여기서 또 우리는 감독의 트릭에 속아넘어가는 반전을 보게된다. 그저 훔쳐보는 식으로 잡아내서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원상과 혜옥의 정사씬에서 혜옥이 이상한 점을 스치고 지나가는 실수를 관객은 저지르고, 원상이 현식에게 혜옥일을 털어 놓을때 현식은 스치듯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애 알지.." 이 반전은 또 다시 원상과 현식의 필연적인 관계에 대한 또다른 이해로 해석되어진다. 따로 분리되어 보였던 원상과 혜옥의 관계마저도 현식과 원상의 관계를 매듭지어주고, 확인 받도록 쓰여지는 중요한 필기도구가 되어버린다. 결국 감독은 그 필기도구로 원상과 현식의 관계를 남자들만이 이해하는 유대감의 형성으로 써내리고 검사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시 이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기전 풀지 못한 의문점을 적어보고 싶어졌다. 원상과 현식의 관계가 나중에는 동성애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뭘까? 이 둘이 거실바닥에 누워 있는 장면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현식이 노래방에서 또다른 직장후배에게 원상이 참 편하게 느껴진다고 말하면서 성연을 바라볼때의 눈빛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을 때부터, 난 그 둘의 관계과 자꾸 동성애적으로 해석되어지고 상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섭불리 글로 적을 수가 없다. 민감한 부분이고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이 영화는 보면 볼 수록 맛이 나는 영화이고, 다시 한번 보고 다른 느낌으로 글이 나올 수 있는 영화이기에 즐거운 영화적 상상력은 잠시 마음속에 감추어 둔다.. 그러고 보니 감독 박찬옥은 정말 제대로 씹고 싶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잠시 삼천포로 빠진 얘기를 뒤로 하고 질투라는 단어의 사전적의미를 적어보면 질투란 시샘하고 미워함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영화 제목이 <질투는 나의 힘>이다 .. 이것은 분명 현식에게 느끼는 질투라는 감정으로 인해서 점점 변화되어 가고 성숙되어지는 원상을 지칭하는 말 일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제목에서 우리의 시선을 원상(남성)의 질투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암묵적인 강요로도 보여진다. 이것이 왠지 감독의 의도된 또 다른 트릭이라고 나는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영화는 현대의 여성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을 놓치지 않는 성격을 지녔고, 나는 그래서 이 영화를 여성영화로 보고 싶다는 결론을 일차적으로 내렸다. 성연과 혜옥은 자신들의 인생을 살면서도 남성에 의해 이용되고 상처받는 역할로,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그려짐으로써 마지막 장면에서 한 가족처럼 보이는 현식과 원상의 거실풍경은 분명 여성이 경계해야하는 남성중심사회의 이중적인 면을 끄집어내는 문제의식이 제기된 부분이다.
<질투는 나의 힘>은 분명 보는 사람 따라서 여러가지 결론이 나올 수 있는 영화이다. 나도 너무 많은 생각에 어떻게 이 영화에 대한 리뷰를 써야할지 며칠을 고심했고 고작 쓴 글이 이 정도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는 관객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영화적 상상력을 끄집어내는 독특한 형식의 영화이고 한번 보기보다는 두번 보면 더 재미있는 영화라는 것이다. 나는 또 한번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현식의 관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적 관점에서 다시 한번 글을 쓸 수 있기를 희망한다..(동시에 내 자신의 내면의 성숙을 바라면서) 오늘 글은 일차적인 결론이므로..... 아직 질투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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