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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돌이킬 수 없는 | 2003년 4월 4일 금요일 | 서대원 이메일

‘250여 명 초반에 퇴장’, ‘실신과 구토 증세 일으킨 사람 다수’ 이건 극비리에 개발된 초절정 청룡열차나 바이킹의 시범운행 문구가 아니다. 물론, 예비군 훈련장 방독면 훈련 결과도 아니다. 바로, <돌이킬 수 없는>의 첫 시사가 열린 칸 영화제 때 일어난 소동을 전한 헤드 카피다.

하지만 이러한 자극적 사실?을 미리 접해 충격완화가 됐는지, 한국 기자 시사 때는 이렇다할 에피소드가 없었다. 그렇다고, 저 문제 문구의 효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온갖 잔인무도하고 하드 코어한 잔혹무비로 단련이 된 필자와 같은 이도 좌불안석하며 움찔움찔 했을 정도니까.

<돌이킬 수 없는>는 근친상간를 다룬 영화 <아이 스탠드 얼론>으로 역시나 98년 칸 영화제를 들쑤셔놨던 논쟁거리 메이커 가스파르 노에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영화의 내용은 숱한 화제를 불러 모았던 것에 비하면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사랑하는 여자가 강간을 당하자 그에 대해 폭력으로 응징, 처절한 복수를 한다는 영화의 고전적 모티프에 다름 아니다.

결국, 많은 이들이 혀를 내두르며 설전을 벌이는 화두의 진원지는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그러기에, 폭력의 한계를 무력화시킨 측면에서는 유사하지만, 상당부분을 내용으로써 폭력의 극단을 드러낸 미카엘 하네케의 <퍼니 게임>을 이 영화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외려, 시간을 역순으로 배치해 팽팽하고 지속적인 긴장감을 이끌어 낸 <메멘토>나 <박하사탕>이 비교 측면에서는 더 용이하다. 허나, 이것도 단편적인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 외에는 큰 효용가치가 없다. <돌이킬 수 없는>의 주인공에게는 <메멘토>와 달리 객관의 기억과 주관의 기억사이에서 혼돈을 관장할 만한 재량이 부여돼 있지 않다. 오직, 카메라에 전능한 능력의 생명력을 불어넣었을 뿐. 또한, 영화는 <박하사탕>처럼 얼룩진 한 시대의 내면을 발가벗길 만큼 폭넓은 시공간도 거대한 서사도 다루지 않는다. 단 하루의 물리적 시간을 담을 뿐이다. 하지만 그 하루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흔과 부채감으로 점철된 소돔과 고모라 같은 카오스 그 자체다.

영화는 불손하게도 엔딩 크레딧이 기괴스럽게 스크린에 서서히 투사되며 오프닝을 연다. 이내 금치산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아 있는 지옥으로 버겁게, 하지만 주술적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선전포고를 때리듯이. 이어, 카메라는 고깃덩어리와 같은 노쇠한 육신으로 발가벗은 채 쪽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남자를 심드렁하게 바라본다. 한 남자는 뇌까린다. 딸과 관계를 갖았다고, 또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마르쿠스(뱅상 카셀)라는 한 남자가 앰블런스 실린다. 또 다른 남자 피에르는 경찰들로부터 포박을 당한 채 걸어 나온다->공간이라는 말이 사치스러울 만큼 온통 얼룩덜룩한 뻘건 조명과 이물스런 비역질과 교성소리로 자욱한 동성애 클럽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공격하는 마르쿠스의 팔을 정확히 180도로 꺽어 버린다. 친구인 피에르는 이 광경을 보고 소화기로 그의 얼굴을, 아니 그의 해골을 내리치며 화장하듯 완전 분쇄해버린다->마르쿠스가 피에르와 함께 미친 듯이 누군가를 미친 듯이 찾는다->마르쿠스의 애인 알렉스(모니카 벨루치)가 파티장을 나와 지하도를 건너가는 중 한 남자에 의해 무참하게 어찌할 도리 없이 강간을 당한다->파티장에서 마약과 술에 찌든 마르쿠스 때문에 알렉스는 그와 다투고 홀로 파티장을 나선다->한적하고 평온한 집에서 알렉스와 마르쿠스는 태초에 존재했던 아담과 이브처럼 거짓 없는 사랑을 나눈다->알렉스는 녹색이 만개한 지상에서 뛰다니는 아이들을 벗 삼아 한가로이 누워 있다.

이처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돌이킬 수 없는>에서 가장 당황되고 불편한 장면은 살점이 종이자락 찢어지듯 나가떨어지는, 둔중한 소화기로 얼굴을 내리치는, 장면과 9분여에 걸쳐 벌어지는 강간 시퀀스다. 기실, 영화는 기존의 카메라 움직임과 편집을 완전 짓밟아버린다. 카메라는 마르쿠스의 카오스적인 심리를 우리에게 온전히 전이시키고자 중반까지 심하게 발광을 부린다. 이로써, 극단적으로 과잉된 이미지들은 철저히 짓뭉겨지며 파편화된다. 여기에 더해 영화는 칠판을 손톱으로 긁을 때 튕겨져 나오는 소름끼치는 굉음처럼 뇌 속을 후벼 파는 노이즈를 지속적으로 흘린다. 시(청)각적인 효과가 한계를 넘긴 이맘때쯤 되면 관객도 반쯤 돌아버리게 된다. 이후, 카메라는 탈진을 했는지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시퀀스가 전환하는 그 순간마다, 아직 성질이 남아 있는지, 강렬한 서사를 끝까지 전하고자, 발작을 일으킨다.

영화는 전언했듯, 편집이라는 개념을 깡그리 무시한다. 거의 한 시퀀스가 한 컷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강간 신은 이러한 의도가 가장 집약적으로 노출되는 신이다. 카메라는 알렉스가 금수 못한 인간에게 습격을 당할 때 미동의 움직임도 없이 그 아비규환의 광경을 응시한다. 시선은 정확히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얼굴이 묻힌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결국, 카메라의 눈과 동일시된 우리는 공범자거나 무기력한 방관자가 돼 버린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가스파르 노에 감독은 처음에 등장했던 이 문장을 마지막 순간에도 스크린에 던져버림으로써 카메라, 이미지, 주인공, 관객 모두를 파괴의 극단으로 밀어 넣은 채 사악함으로 충만했던 카니발을 마친다. 그럼, 영화는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라는 그리 낯설지 않은 문구를 가장 낯선 방식으로 전달해준 것밖에는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일상 안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이나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야만스러움을 까발리고 싶은 것이었을까? 여기에 대한 가치 판단은 보는 이에 따라 분명 다를 것이다.

하지만 감히 이 두 가지만은 확실하다고 말하겠다. <돌이킬 수 없는>는 포르노그라피도 고약한 선정적 이미지로 도배질된 영화도 아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데 있어 시간은 객체일 뿐이다. 주체는 시간의 법칙까지 와해시키려는 인간이다. 다시 말해, 지금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악한 전쟁의 명분을 호도하고 왜곡하는 언론의 방식이 선정적인 것이고, 부시 같은 인간들이야말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의 축이라는 것이다.

자, 이 정도라면 당신은 이 영화의 전지전능한 폭력 앞에서 어떠한 말을 스스로 뱉어낼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최소한의 용기가 준비됐다면 한 번쯤 접해보시길 바란다. ‘돌이킬 수 없는’ 경험일지라도 말이다.

1 )
ejin4rang
모든것을 파괴하는 인간   
2008-10-1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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