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캘리포니아 석유개발사업의 이면을 파헤친 업톤 싱클레어의 소설 ‘오일!(Oil!)’을 바탕으로 제작된 <블러드>는 한남자의 야망을 읽어내려가는 일대기다. 깊은 갱도 속에서 홀로 곡괭이질을 하는 남자 곁을 지키는 카메라 앵글의 건조한 시선은 의문스러운 갈증을 느끼게 할 정도로 묵묵하다. 그 뒤, 갱으로 추락해 다리가 부러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하던 남자가 무언가-은으로 추정되는-를 찾아낸 뒤 힘겹게 땅 위로 올라 산을 기어내려가는 집념을 묵묵히 주시하는 앵글 너머로 갈증은 다시 한번 도모된다.-그 직후, 남자로부터 찬찬히 들어올려지는 앵글의 시선은 시작에서 보여졌던 산을 같은 구도로 다시 올려다보고 사이렌 같은 BGM이 다시 경보처럼 울린다.- 정확히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얼마 후, 무리를 이끌고 조직적인 작업을 펼치던 그 남자가 홍조를 띠는 순간, 의문은 해갈된다. 그의 미소를 부르는 건 땅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새까만 석유. 하지만 새어 들어온 희열 너머로 예기치 못한 비극이 밀려온다. 석유가 가져다 준 포만감이 찾아온 지 얼마지나지 않아 그들은 죽음을 맞이하고 목격한다. 그러나 피를 머금은 인간의 욕망은 더욱 어두운 탐욕으로 짙게 드리운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남자,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음성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다.
검은 석유의 빛깔은 인간의 어두운 탐욕과 지독하게 어울린다. 땅으로부터 솟구친 원유비를 뒤집어쓴 인간의 미소가 짙을수록 역설적인 사악함도 짙게 드리운다. 그리고 욕망의 중심지대에 바로 다니엘 플레인뷰가 서있다. 그는 <블러드>의 욕망이 시작되는 근원지점이다. 하지만 그는 욕망을 갈취하기 보단 성취하는 타입이다. ‘정당한 우리 몫을 벌거야!’라는 그의 의지는 현실적인 고난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이자 추진력이 된다. 그는 자신만을 신뢰하고 타인을 경멸하는 염세적 자아를 지닌 자기중심적 인간이기에 때로 오만해 보이지만 결코 어리석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을 통해 인생의 좌표를 개척하는, 철저하게 강인한 인간이다. 관계가 분명치 않은 아들 H.W.(딜런 프리지어)를 끔찍이 아끼던 그가 다친 아들을 뒤로 하고 불타는 유정탑으로 달려갔던 것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끔찍하게 아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석유업자이며 가족사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입에 발린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가 타인을 혐오하는 건 그의 신념이 결코 타인을 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인간관계는 자신이 배려하지 않는 타인 이상의 관계, 즉 혈육(이라는 믿음)이다. 자신의 신념을 십자가처럼 짊어진 남자는 골고타의 언덕과도 같은 고독의 여정을 함께 넘어갈 자신의 분신을 갈망한다.
엘라이 선데이(폴 디노)는 플레인뷰의 대척점이자 그와 가장 밀접하게 닮은 상대다. 그는 외부의 힘을 빌어 자기 신념을 표방하는 인간이며 플레인뷰와 같은 탐욕을 갈망하지만 대비적인 신념으로 스스로를 위장한 자다. 플레인뷰가 엘라이를 혐오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그의 맹신적 태도가 불경스러워서, 혹은 플레인뷰 자신이 반신앙적이라서가 아니라 엘라이가 경도된 신앙을 이용해 은밀하게 플레인뷰의 성취를 탐하고 있는 까닭이다. 엘라이는 플레인뷰의 사업의욕을 통해 활성화된 지역경제를 기반으로 수혜를 누린다. 이는 가족사업을 표방하는 플레인뷰가 지역민의 신뢰를 점해야 할 위치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에 가깝다. 유정탑의 부근에서 ‘제3계시교’의 전도를 행하기도 하는 엘라이는 플레인뷰가 유정탑의 개수를 늘려가고 인부를 끌어들일 때 교회를 확장하고 신도를 모은다. 석유사업의 활성화와 함께 변모하는 마을의 풍경 속에서 엘라이의 교회는 플레인뷰에게 쇼에 불과해보이는 성령의 퍼포먼스를 펼친다. 플레인뷰는 자신이 일군 토양 위를 가식적인 숭고함으로 점하려는 엘라이의 행위가 둘도 없는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블러드>가 향하는 세계로 통하기 위한 스펙트럼과도 같다. 그의 사적인 탐욕은 그 세계의 탐욕으로 번져나가고 그는 구체적인 탐욕의 상을 지목하는 영화의 내재된 눈과 같다. 하지만 <블러드>는 시대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를 펼쳐내거나 정치적 태도를 견지하기 보단 그냥 묵묵히 그 현실을 바라보고 인물의 행위를 지켜본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영화의 전체를 관장하는 주동인물임에 분명하지만 영화는 그에게 악의와 선의 중 어떤 감정이입도 도모하지 않는다. 그의 일대기는 영화의 전부이면서도 전체는 아니다. 영화는 국지적인 인물의 상을 충실히 묘사한다기 보단 인물이 드러내는 일화를 통해 영화의 윤곽을 확장하거나 형성시킨다. 캐릭터를 통해 영화의 일가를 이루지만 영화에는 족보가 없다. 영화로부터 발견되는 시대성은 인물로부터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로부터 새어 나오는 기운으로부터 막연히 감지되는 부가적인 영역일 뿐이다. 캐릭터의 일대기로 이뤄진 영화의 골조가 완성하는 건 그들의 일대기를 유도하는 시대의 기운이다. 인간은 시대의 징후를 따라 광기로 들어선다.
<블러드>가 재현하는 현실은 분명 20세기 초, 미국의 자화상이다. 그 시대가 발견한 석유라는 자원을 통해 자본의 가치가 활성화되고 신앙의 소비가 급증한다. 하지만 자본과 결탁하는 신앙은 실상 자본의 수하로 전락한다. 의미심장한 제목처럼 영화가 예감하는 피의 전조는 그 불균형적인 공생 구조 자체만으로 예언된다. 플레인뷰와 엘라이는 시대가 잉태한 두 개의 다른 신념을 지닌 맹주다. 자본과 신앙에 결탁한 신념은 각자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근본을 둔 믿음의 힘을 빌리고 있으며 이 대립적 형태의 신념을 통해 그들은 시대에 배팅을 건다. 모든 것을 독식해야 성이 차는 플레인뷰에게 엘라이는 공생할 수 없는 착취자에 불과하다. 결국 다른 형질을 지닌 욕망의 맹주는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결국 맞붙어 뒹굴고 다른 한쪽의 피를 부른다. 이는 자본을 숭상하는 다른 형태의 믿음, 즉 자아를 믿는 자와 신의 뜻을 비는 자의 충돌과도 같다. 형질이 다른 두 신념은 하나의 가치를 향해 결국 충돌하고 이는 결국 더욱 극악한 신념을 지닌 자를 살아남게 한다. 하지만 그 승리는 살아남은 자를 위한 것도 죽은 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플레인뷰와 엘라이는 각각 서로를 상대로 한번씩의 공수교대를 한다. 송유관으로 가는 땅을 얻기 위해 자신의 폐부를 찔려가면서도 거짓간증을 완수하는 플레인뷰와 달리 자신의 가식적인 신념을 무너뜨리고 비굴하게 진실을 토로하는 엘라이는 패배자로 몰락하며 자본의 노예로 전수된다. 이는 결국 위선의 탈을 쓴 나약한 신념이 단단한 본성으로 채워진 강건한 신념에 부딪혀 부서지는 형태로 드러난다. 십자가를 거쳐 자본과 간접적인 유통구조를 형성하려 했던 엘라이에 비해 송유관을 통해 자본과 직접적으로 결탁한 플레인뷰-I have a pipeline-의 간결한 유통구조는 자본을 향해 배팅한 두 신념의 승패를 단명하게 갈랐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파멸시키는 시대의 기운은 쇠와 같은 플레인뷰가 엘라이를 돌처럼 부수는 파국을 맞이한다. 결국 플레인뷰는 파멸을 내림으로써 스스로 파국의 무대로 올라선다. 결국 그 처절한 승부는 파멸을 맞이한 자와 파멸을 부른 자 모두 파국의 결말로 뛰어내리게 만든다.
그 파멸의 종국에서 살아남은 건 무엇일까. 믿음의 본체는 사라졌지만 소산은 전도된다. 자본에서 비롯된 집념은 신념의 형체를 막론하고 하나의 광기를 잉태했다. 그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도 성령의 이름도 모두다 몰락하는 형상에 불과하다. 결국 자본이라는 물질주의적 신앙의 태동은 인간의 피를 제물로 한 파멸의 의식을 거쳐 굳건한 제단으로 자리를 잡는다. 마치 원유로부터 솟구치는 불기둥처럼 그렇게 욕망은 한껏 더 활활 타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는 도래했다. 자본을 먹고 자란 미국의 거친 서사는 피로 물든 역사를 봉인한 채 현재를 맞이했다. <블러드>는 그 시대의 광기를 먹고 성장한 미국의 유년기에 대한 쓸쓸한 자화상이다. 하지만 <블러드>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플레인뷰의 마지막 구절-I’m finished-이 아니다. 플레인뷰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란 H.W.는 청력을 손실한 덕분에 그의 변해가는 표정을 남보다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건 인간의 변화, 즉 자본의 광기로 지탱하는 인간의 피폐해져 가는 초상이다. <블러드>는 자신의 아버지가 잉태한 세계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자신이 그려 넣을 새로운 자화상의 청사진을 살며시 드러낸다. 플레인뷰와 엘라이의 시대를 지나 성장한 H.W.(러셀 하버드)는 시대의 광기를 물려받길 거부한다. 그는 스스로 지금이 변화해야 할 때임을 선포하고 –It’s time to make change-플레인뷰의 곁에서 떠난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뒤로 아버지 세대의 광기는 파국을 드리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마찬가지로 <블러드>는 광기를 선포하는 시대의 자화상을 그린다. 이는 현재 미국이란 나라가 짊어진 미래에 대한 불안한 징후이자 과거로부터 이어진 업보의 초상이다. 자본과 결탁한 삭막한 팍스 아메리카나의 출발지를 들여다보는 두 영화는 다른 풍경을 지니고 있지만 같은 것을 보고 있다. 탐욕은 인간을 전진하게 만들지만 결국 이에 이끌려가는 인간은 파멸을 면치 못하거나 파국의 예감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포스트 9.11시대에서 분노를 기회로 국책사업을 펼치던 부시의 악랄함과 달리 혜안을 지닌 어떤 미국인은 자신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던 흐름의 실체를 추적할 수 있음을 정중하게 증명한다. 특히 <블러드>는 과잉 같은 기교를 사족처럼 끼워 넣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이례적으로 클래식한 고전적 분위기를 관성적으로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 이는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동시대에 이 작품이 탄생했다는 우연적 사실과도 연관된다. 인간의 존재의 가치가 날로 나약해지는 시대의 불길한 징후, 두 영화는 같은 것을 주목하고 있다. 가치가 전복되는 시대에서 중후한 두 작품은 시대의 질서를 다시 한번 새롭게 정립해야 함을 중후한 고전적 화법으로 드러낸다. 또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배경음을 거세함으로써 시대의 앙상한 기운을 건조하게 묘사했던 것과 반대로 <블러드>는 마음을 밑바닥부터 요동치게 만들거나 신경의 깊숙한 곳까지 찌르고 들어와 곤두서게 만드는 배경음으로 감상을 자극한다. 이는 심리적 평형을 유지하던 전자와 반대로 심리적인 격양을 유도하며 이는 각자의 배경에 걸맞은 적절한 테크닉으로 구사된다. 동시에 마치 하나의 옥타브를 차례로 연주하듯 높낮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품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광폭한 연기는 소름 끼칠 정도로 대단하다. 또한 1인2역을 맡은 폴 디노는 마치 식물적인 표정을 통해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의 양면성의 너비를 드러내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태평양 건너 먼 이국에서 날아온 이 작품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의 현실과도 멀지 않다. 기업화되고 권력화되는 종교 집단의 온상과 자본의 논리로 재편되는 사회적 질서의 맥락 속에서 <블러드>의 파국은 우리가 불러들일 파멸의 묵시록을 예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그분의 사업이 이 땅을 배불리 먹일 것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환원시키겠다는 정책적 포부가 구체화될 이 땅의 미래 속에서 쓸모를 인정받지 못한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판명될 것인가. 엘라이는 자기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표독스럽게 말한다. ‘게으르고 멍청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우리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돌이 아니라 쇠가 되는 길을 택해야 할지 모른다. 부서지는 쪽이 아니라 부수는 쪽이 되어야 하는 운명. 그곳에 흐르는 피가 자신의 것이 아니기 위해서는 더욱 단단해져야 할 것이다. 모두에게 행운을 빈다. 물론 그 끝에서 어떤 파국을 만나게 될지 누구도 모르지만.
2008년 3월 4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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