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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건 살인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혈의 누
jimmani 2005-05-08 오후 11:00:03 1802   [9]


 
<스포일러 조금 있음> 
 
요즘 이 영화 <혈의 누>를 가지고 얘기들이 많다. 그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사극 스릴러라는 점도 그렇지만, 역시나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수위로 잔혹하다는 점과 기자 시사회 외에 일반 시사회를 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범인이라는 식의 스포일러가 여기저기 떠돌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지 않나 싶다. 그러나 본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영화는 얼마만큼 잔혹하냐에 신경쓸 영화도 아니고, 누가 범인인지가 중요한 영화도 아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연쇄살인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이성도 있지만, 이것 역시 무언가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 전부는 아니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때는 1808년, 조선이 막 근대화의 물결을 타려고 하는 시기이다. 영화의 배경은 제지 산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는 외딴 섬 동화도다.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아가던 이 섬에서 어느날 조공으로 바치려던 지물들이 모두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뭍에서 군관 이원규(차승원)가 파견된다. 그런데 그가 파견된 날부터 섬에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첫번째 살인은 이미 죽임을 당한 사람이 죽창에 꽂힌 것. 원규는 나름대로 추리를 해나가면서 범인들을 지목해나가지만, 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일어난다. 마을 사람들은 일련의 살인사건이 7년전에 역모를 꾀한 천주쟁이라는 낙인을 찍혀 강객주와 그의 가족들이 참혹하게 처형당한 후 그 저주가 다시 돌아온 것이라며 겁을 먹기 시작한다. 강객주가 자신을 밀고한 5명의 밀고자들을 5개의 살인방법으로 살인할 것이라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혼란 속에서 원규 역시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얌전하고 곧은 태도를 보이지만 은근히 마을 사람들에게 강압적인 제지소 주인의 아들 인권(박용우), 강객주의 은혜를 입고 지금까지 강객주의 집에서 거주중인 두호(지성) 등 용의선상에 있는 이들은 많지만, 사건은 갈수록 미궁으로 빠지는데...
 
일단 이 영화에서 첫번째로 돋보이는 점이 사극 스릴러라는 독특한 장르의 혼합이다. 연쇄살인이라는 범죄가 보통 현대사회에서만 일어나는 범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보다 더 예전에도 연쇄살인은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보다 신비롭고, 생소하면서도 잔혹한 방법으로 살인사건을 전개해나간다. 특히 우리가 책이나 이야기로만 들어왔던 조선시대의 끔찍한 처형방법들이 영화 속에서 다섯 가지 살인 방법으로 제시되면서 보여지는 살인 장면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거침없이 사람을 끓는 물에 삶아 죽이고, 머리를 깨고, 사지를 찢는 이런 참혹한 장면들이 영화 속 살인사건을 단순히 낯간지러운 명목상의 사건이 아닌, 정말 끔찍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로 몰고 가는 사건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비위가 약하신 분들이 보시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오늘날만큼 고밀도의 과학적인 수사가 불가능했던 조선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은비녀를 통해 독살 여부를 검증하는 등의 나름대로 과학적이었던 수사 방법은 지금의 우리에게 생소하면서도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꽤 훌륭하다. 차승원은 이번 영화를 통해 오랫동안 보여졌던 코믹스런 이미지에서 일대 변신을 시도했는데, 사실 코미디 영화를 하기 이전에 <세기말>, <리베라 메> 등에서 적잖이 진지하고, 심지어는 광기 어린 모습을 훌륭히 보여줬기에 새삼스럽게 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차승원은 마치 햄릿처럼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도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원규의 모습을 훌륭히 보여줌으로써, 한동안 잊혀졌던 그의 진지한 연기 실력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처음과 중반부에서는 원규의 캐릭터가 이성적이고 냉철한 편이라 대사도 단조롭지만, 후반부에 가면서 과거에 얽힌 진실이 밝혀지면서 보다 복잡한 갈등을 겪고 원규의 캐릭터도 한층 갈등과 좌절을 많이 겪게 된다. 이렇게 일직선에서 점차 굴곡이 심해져 가는 입체적인 원규의 캐릭터를 차승원은 무리없이 잘 소화해냈다. 앞으로는 무조건 원맨쇼같은 코미디보다는 이렇게 은근히 카리스마로 압도하는 진지한 연기를 함께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박용우와 지성의 연기도 상상 이상이다. 드라마에서 귀공자스러운 역할을 많이 맡았던 지성은 이 영화에서 천민이라 할 수 있는 두호 역을 맡으며 보다 거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대사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왠지 내면에 반항기와 슬픔을 품고 있을 듯한 두호의 모습은 꽤 잘 어울렸다고 본다.
정작 이 영화에서의 제대로 된 발견은 인권 역의 박용우다. 내가 이 배우를 기대주로 본 것이 97년의 <올가미> 때부터다. 그 때 최지우의 다정다감한 남편으로 나와 주목을 받았으나 그 이후 유달리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며 지금까지 근 8년동안 '기대주'로 머물러왔던 게 사실이다. 작년에 드라마 <애정의 조건>에서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은 역으로 이 배우가 출연했을 때에도 새삼 아쉬웠다. 그러나 이 영화 <혈의 누>에서 그는 비로소 빛을 발하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 다소 모범적이고 올곧은 역할만 맡아왔던 박용우는 이 영화에서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얌전한 양반이지만 마음 속에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광기와 분노로 가득찬 다층적인 캐릭터를 뛰어나게 소화했다. 그가 일말의 표정의 흔들림도 없이 조용조용히 대사를 내뱉는 순간에도 거기서 풍겨나오는 왠지 모를 강력한 아우라가 느껴졌으니 말이다. 후반부로 가면서 비밀이 밝혀지면서 바깥으로 표출하는 분노에는 압도될 만한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그의 사연을 되새겨보면 슬픔이 느껴진다. 이처럼 겉으로는 양반으로서의 예의를 꾸준히 지키지만, 사실은 내면에 세상에 대한 혐오로 가득한 슬픈 분노를 품고 있는 인권의 모습은 박용우의 오버하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 터뜨려주는 절제된 연기 덕에 더 실감나게 살아나지 않았나 싶다. 진정 이 영화에서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말했지만, 이 영화는 누가 범인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실 나중에 밝혀지는 범인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엉뚱한 데서 튀어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의심스러운 사람들의 명단에서 나오는 터라 그다지 충격적인 반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보고 나서 좀처럼 그 아우라가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영화가 비수처럼 품고 있는 차가운 외침 때문이다.
영화 속 살인사건의 키워드 중 하나인 강객주의 원한은 단순히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죽음을 당했다는 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보듬어주었던 마을 사람들에 대한 원한이다. 마을 사람들은 강객주의 자비로운 다스림에 의해서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강객주가 위험에 처했을 때 누구 하나 은혜라도 갚는 심정으로 나서는 사람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자신들이 지고 있는 빚을 탕감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강객주가 억울하게 밀고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그가 결백함을 증명한 자는 없었다. 자신들의 이익에만 급급해 한 개인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밀고자는 단지 그 다섯 사람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치졸함은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그대로 일어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강객주의 원혼을 봉인하기 위해 이곳저곳 부적을 붙히기에 바쁘고, 밀고자 중 아직 살아 있는 자가 있자 그가 죽어야 강객주의 저주가 풀린다면서 그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다. 낫과 칼 등 각종 무기를 들고, 저주를 푼답시고 무리지어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끔찍한 살인을 저지러는 살인범의 모습보다 더 끔찍하다. 그들은 단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도덕적 도리도 잊어버린 채 집단의 힘만 믿고 개개인을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몰아넣으려 한다.
 
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살인사건 자체도 끔찍하지만, 이 사건의 배경이 되고, 사건에 대응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끔찍하다. 근대화의 흐름을 겪고 있지만 아직 신분 차별의 기미가 어느 정도 보이는 조선 시대임에도 그들은 신분으로서의 기본적 도리도 잊어버린 채 비겁한 집단적 힘을 남용했는데, 현대라면 그 정도가 오죽 심하랴. 영화는 이렇게 비교적 신분적 강압이 있었던 조선시대임에도 끔찍한 짓을 자행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모르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가 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지독한 집단의 광기를 냉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들의 잔혹한 광기 앞에, 개인의 원한이니 살인이니 하는 건 진심이 아닌 한낯 저주나 망발로 치부될 뿐인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혈의 누', 즉 피눈물은 어쩌면 집단의 끈질기고 잔혹한 광기에 희생당한 한 개인의 지독한 한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영화 마지막에 온 마을을 적시는 혈우(피비)는 그 지독한 한을 풀지 못한 개인의 마지막 토로일 것이고. 영화 <혈의 누>는 이렇게 인간이 무리로 모여 보여주는 힘이 편리하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일 수 있는지를, 영화 속 살인사건들만큼 참혹하면서도 강렬하게 보여주었다. 살인이 끔찍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 그 자체가 끔찍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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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의 누(2005, Blood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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