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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여자 클로이
jimmani 2010-02-23 오후 3:51:41 2472   [1]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관심이 많은 예술은 그래서 그것을 가장 대표하는 성욕과 식욕을 즐겨 소재로 삼는다. (수면욕도 있지만 잠자는 걸로 어떤 극적인 예술작품을 만들긴 쉽지 않으니까) 표현의 방법이 무수히 많은 영화는 특히 이 부분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인간의 성적 욕망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에로틱한 장르의 영화들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나오면서 관객의 잠재의식을 자극한다. 때론 아무 생각없는 에로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반대로 소름끼치게 인간 심리의 심연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수준급의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장르에 전문화되어 만만치 않은 내공을 보여 온 감독들도 몇 있는데, 서양에는 애드리안 라인이나 아톰 에고이안 감독이 대표적인 경우다.

 

애드리안 라인이 대중적인 스타일이라면 아톰 에고이안은 보다 예술영화에 가까운데, 에고이안의 영화들은 언제나 살짝 몽롱하다. 성적 묘사에 있어서 주저 없이 꽤 자극적으로 다루면서도 그것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다기보다 모호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끊임없이 풍긴다. 이런 방식을 통해 감독은 아마도 관객이 갖고 있던 기존의 정서가 흔들리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믿었던 것, 도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 우리에게 좋은 것인가하는 물음과 함께 말이다. 얼핏 보면 할리우드 치정 스릴러의 구도를 순순히 따른 듯한 그의 신작 <클로이>도 실은 이러한 물음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영화다.

 

 

산부인과 의사 캐서린(줄리앤 무어)은 겉으로 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 여인이다. 핸섬하고 자상한 남편이자 대학교수인 데이빗(리암 니슨)이 있고, 아들 마이클(맥스 티에리어트)은 반항을 많이 하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단 낫다. 데이빗의 생일을 맞아 캐서린은 깜짝 파티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지만, 멀리 나가 있는 데이빗이 비행기를 놓쳐 오늘 안에는 못 들어갈 것 같다고 연락을 하자 캐서린은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니나다를까 얼마 뒤 그의 휴대전화에서 확인한 젊은 여학생으로부터의 메시지. 평소 매너가 너무 좋은 남편이 행여 바람피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캐서린은 평소 눈에 띄는 외모로 관심 있게 봐 오던 콜걸 클로이(아만다 사이프리드)와 몰래 만남을 가진다. 캐서린은 클로이에게 데이빗의 바람기를 시험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클로이는 매번 데이빗과 만날 때마다 캐서린에게 정황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점점 깊은 만남을 갖기 시작하는 클로이를 보면서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캐서린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클로이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고, 이내 미처 몰랐던 욕망이 깨어나는 것을 느낀다. 이 어긋난 관계의 끝은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

 

스토리라인만 봤을 때는 전형적인 에로틱 스릴러의 전개를 따라가지만 이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배우들의 면면이 일단 인상적이다. 든든한 연기파 배우인 줄리앤 무어, 리암 니슨과 신선한 혈기로 가득한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맛깔스런 조화를 이룬다. 제목은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맡은 캐릭터의 이름인 '클로이'지만 실질적인 영화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리앤 무어가 맡은 캐서린이다. 줄리앤 무어는 만만치 않은 감정선과 표현 수위를 담고 있는 이 영화에서 역시 과감함과 절제미를 자유롭게 오가는 깔끔한 연기를 선보인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남들은 부러워 할 만한 중산층이지만 그 속에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극심한 내적 갈등과 끓어오르는 욕망을 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해냈다. 더구나 중반부의 파격적인 베드신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는 등 영화가 살짝 끈적한 와중에도 활기를 띠게 하는 중심 역할을 한다.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남편 데이빗 역의 리암 니슨의 연기는 역시 젠틀하다. 영화 속에서 캐서린이 말하듯 나이를 먹을 수록 더해지는 아름다움과 더불어 지성미까지 갖춘 모습으로 부드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중량감 있는 이 두 배우의 연기는 쉽지 않은 내용을 지닌 영화에 보다 잘 몰입할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요즘 부쩍 잘 나가는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비슷한 시기에 선보이는 <디어 존>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캐릭터로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의 범위를 한 뼘 더 넓혔다. 그녀의 커다랗고 투명한 눈망울는 어딘가에 소녀 감성을 품은 듯 하면서도 글래머러스하고 고혹적인 자태는 속을 알 수 없는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그대로 체화시킨다. 치정극에 흔히 등장하기 마련인 팜므파탈의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1차원적인 독기보다 입체적이면서도 모호한 이중성을 가진 캐릭터로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재현했다.

 

 

<클로이>가 보여주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과 이를 무너뜨리려는 것으로 보이는 위험한 여인의 구도는 얼핏 <위험한 정사> 류의 치정 스릴러에서 꾸준히 보아 온 전형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 <클로이>는 이와 같은 영화들과는 상당히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의외로 영화가 시작하면서 바로 드러난다. 중요한 갈등의 원인인 클로이의 매혹적인 자태가 시작부터 등장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캐서린의 시선으로 연결되면서 이 영화가 캐서린의 심리에 주안점을 둔 영화임을 암시한다. 번쩍번쩍한 병원 건물에서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녀가 클로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심하다는 생각보다 동경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영화는 바로 안정되어 보이는 환경 속에서 불안정한 캐서린의 심리에 집중한다. 클로이가 나서서 그녀의 생활을 흔들기 전에, 그녀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 영화가 그렇고 그런 치정 스릴러였다면 캐서린과 클로이의 관계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증오와 분노로 가득한 관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대립보다 유대에 가까워 보인다. 갈등이 극에 치닿는 부분이 있지만 그것이 살벌한 악몽처럼 구현되기 보다 처연한 비극처럼 보여지고, 끝까지 클로이의 잔상은 캐서린을 떠나지 않는다. 아마도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평화로운 가정은 있을 때 잘 지켜라'는 치정극의 전형적인 교훈보다는 '당신이 속한 평화로운 가정이 진정 당신의 마음까지 평화롭게 하는가' 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자칫 주인공으로 하여금 안정된 가정을 버리고 일탈을 부추기게끔 하는 위험한 질문이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안정성'이라는 명목 아래 짓눌러버린 순수한 욕망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질문일 수도 있다. 자신과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클로이에게 캐서린은 급속도로 이끌리게 되고, 그것이 잠시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큰 혼란을 겪긴 하지만 결국 캐서린은 그녀를 향한 관심을 완전히 끊지는 못한다.

 

 

영화에서 캐서린이 의심한대로 데이빗이 정말 바람을 폈는지 클로이는 무슨 이유로 이 가정에 그렇게 집착하는지와 같은 복잡한 사연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건의 진실에 대해 후반부에 반전처럼 제시되긴 하지만 충분히 예측 가능하기에 충격 효과가 그리 크진 않다.) 이 영화가 처음부터 집중하는 것은 위태로운 캐서린의 심리상태이며, 그녀가 클로이가 만나면서 겪게 되는 일종의 정서적 화학 작용이다. 이제 중년 여성이 된 캐서린은 예전과 같은 사랑을 남편과 이어가고 싶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본인의 직업이 산부인과 의사라 더 그런지 몰라도, 점점 노쇠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에 회의감만 들 뿐이고, 어린 제자들을 살갑게 대하는 남편의 모습에 일말의 질투심마저 느낀다. 어릴 땐 엄마 품을 떠날 줄 몰랐던 하나뿐인 아들도 계속 겉돌면서, 캐서린은 '풍요 속의 빈곤'을 겪는다. 이런 상황이 되다보니 남편의 바람에 대한 의심이 솔솔 생겨난다는 것이 그리 생뚱맞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캐서린은 못내 동경의 대상이었을 클로이와의 접촉을 시도한다. 안정된 현재의 모습을 당연시하게 여기던 캐서린은 클로이가 세세하게 풀어놓는 남편과의 만남을 전해들으며 처음에는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지만 정말 한끝 차이로 어느 순간 그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남편을 그렇게 잘 끌어들이는 클로이의 매력을 더 알아가고 싶고, 위험한 줄 알면서도 가까이 하고 싶음을 느낀다. 클로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번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며 '고객'을 상대하던 그녀는 자신 앞에서 온갖 감정을 다 드러내는 듯한 캐서린에게 마음이 가까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안정 속에서 오랜만에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시 발견한 여인과, 정착하지 못하다 비로소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발견한 여인이 유대를 쌓아가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도 있을 수 있지만 <클로이>는 결국 '고여 있는 감정'과 '떠도는 감정'의 충돌에 관한 이야기다. 점점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 앞에 솟아오르는 욕망도 꾹꾹 누르던 캐서린은 거침없이 감정의 돌파구를 찾아나가는 클로이를 동경하고, 정처없이 떠도는 감정으로 화려하지만 허무한 삶에 사로잡혀 있던 클로이는 캐서린의 안정된 배경과 자못 솔직한 태도에 마음이 이끌린다. 나이와 환경의 그늘에 가려 여자로서의 정체성이 점점 희미해지던 캐서린은 클로이 덕분에 위험수위를 넘나들긴 하지만 잠들어 있던 정체성을 다시 깨우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나이와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가 요구하는 욕망을 안으로 삭이지 않고 바깥으로 뿜어낼 수 있는 용기도 갖게 된다. 그렇게 캐서린과 클로이의 관계는 위험하지만 매혹적이다.

 

<클로이>가 전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인간적으로 완전히 옳은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다소 자극적인 접근으로 인해 찬반이 많이 갈릴 수 있는 주장일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치정 스릴러 형식을 살짝 뒤집은 채 '안정적인 생활의 중년 여성'이 놓인 위치를 당연시하지 않고 의문점을 제기하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있다. '욕망을 짓밟은 안정성이 지배하는 삶이 정말 행복한 삶인가?'하는 인생의 중요한 질문을 아톰 에고이안은 특유의 몽환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를 통해 도발적이면서도 조심스럽게 묻는다.


(총 0명 참여)
yapopoya
모성 결핍, 저도 은근히 느꼈어요 가족 사진 보면서 그리운 눈빛일때   
2010-04-30 19:55
verite1004
클로이는 모성 결핍의 희생자라는 느낌!   
2010-03-01 12:37
man4497
감사   
2010-02-27 14:12
mokok
여주인공 예뻐요~   
2010-02-27 14:11
snc1228y
감사   
2010-02-23 20:49
boksh2
감사요   
2010-02-2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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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2009, Chloe)
제작사 : Studio Canal, The Montecito Picture Company / 배급사 : 시너지
수입사 : 제이 엔터테인먼트 / 공식홈페이지 : http://www.chloethemovie.co.kr/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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