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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꽃에 대한 로드무비 브로큰 플라워
sieg2412 2005-12-20 오후 6:04:47 1273   [7]

올해 칸 영화제 경쟁부문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가 바로 <브로큰 플라워>였다. 도미닉 몰의 개막작이나 라스 폰 트리에의 신작이 함량미달 내지는 동어반복으로 판정난 뒤, 뒤를 잇는 <브로큰 플라워>와 <더 차일드> 등의 작가주의 정신이 돋보이는 영화들은 결국 칸 영화제에서 일을 한 건 치러내고야 말았다.
<브로큰 플라워>는 짐 자무시의 일련의 작품 중에서도 변화를 꾀한 작품이다. <천국보다 낯선>, <다운 바이 로> 등을 통해 미국 인디펜던트 영화의 선두주자로 평가받던 짐 자무시의 작품이라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으레 작가주의 감독이 대중을 잡기 위해 나섰다면 가장 걱정되는 것이 본연의 자세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겠지만, 자무시의 신작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고 2005년의 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 해 칸에서 벌어졌던, 정치적이자 심사위원장 개인의 취향에 지나치게 가까운 시상으로 인한 파동을 무마하기 위해 철저하게 칸의 적자들만을 불러왔던 2005년 칸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것은 그 작품성을 확실히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 후보작 중에 자무시의 영화적 스승에 가까운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이 있었음을 감안할 때, <파리, 텍사스>의 빔 벤더스가 현재, 혹은 미래에 늙어버릴 경우 우리에겐 짐 자무시가 있어서 안도할 수 있다.

영화는 로드무비와 미스터리의 틀을 갖고 있다. 어느 날, 과거의 플레이보이 돈 존스톤에게 날아온 편지에는 그의 아들이 스무 살이란 내용이 적혀 있고, 극성스런 친구 윈스턴의 설레발에 돈은 자신의 옛 여자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돈이 여자친구를 찾아 헤맬수록 미스터리의 색채는 점점 옅어져 사라지기에 이른다. 그것은 그가 찾아낸 옛 여자친구들의 태도와도 관계가 있다. 처음으로 찾아낸 로라는 특이한 직업을 갖고 특이한 딸과 함께 재밌게 살아가고 있지만 두 번째의 도라는 남편과 돈의 대면을 불편해 하고, 그 다음의 카르멘은 돈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을 아까워한다. 네 번째의 페니에 이르면 그는 급기야 두들겨 맞게 되고 마지막의 미셸은 이미 세상을 뜬 지 오래다. 그에 비례하여 돈이 과거의 여자친구들과 보내는 시간도 줄어든다. 로라는 그를 반겨주고 돈은 로라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출발은 이처럼 산뜻하지만, 도라 부부와의 저녁식사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카르멘은 돈과의 대면을 단 몇 분으로 끝내려고 한다. 페니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미셸의 무덤을 들러 돈의 여정은 끝을 맺는다.

이처럼 영화가 로드무비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미스터리의 색채를 점점 엷게 칠하는 동안, 주인공인 돈 역시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브로큰 플라워>의 흐지부지한 결말의 이유이다. 돈의 여자들이 점차적으로 다른 태도를 보이고, 돈과 그녀들의 시간이 점점 짧아지며, 돈이 그녀들에게 가져다 주는 꽃다발이 차차 초라해지는 너무도 명백한 점강법을 통해 짐 자무시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그 어떤 작품보다 대중지향적인 이 영화에서 그 대중성의 원천인 미스터리 코드를 과감히 거세해 버린다. 그리고 다시 짐 자무시의 원래 모습인 인생에 대한 탐구와 허무주의적 결말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브로큰 플라워>는, 기호적인 단서로 점철된 허무극이다.

이런 허무극을 표현해 내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사람이 빌 머레이라는 데에 이견을 달 수는 없다.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의 장점을 오묘히 취한 듯한 머레이의 정적인 표정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모든 장면에서 공허함을 표현하고 있다. 비단 아들일 것 같았던 남자를 쫓다 놓쳐버린 뒤의 명확한 허무함만이 아니라, 윈스턴과 주거니받거니 콩트와 같은 상황을 연출하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은 이미 어디엔가 초연한 표정을 띄고 있다. 빌 머레이는 돈 존스톤이고, 그는 바로 '망가진 꽃들' 그 자체다.

<브로큰 플라워>는 말한대로 로드무비다. 그러나 그 로드무비의 끝은 상실감으로 가득 차 있다. 돈은 그 옛날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여인들을 찾아 나섰지만, 꽃은 이미 망가지 버린지 오래다. 돈의 여정은, 그 망가진 꽃들에 대한 확인, 반추, 그리고 자문이다. 돈 존스톤, 그 자신은 과연 어떠한가에 대한 자문. 그리고 그 대답은 자신의 집에서 꽃병에 담긴 시든 꽃을 발견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 너 역시도 망가진 꽃일 뿐이라고. 과거에 대한 후련한 토로나 미래에 대한 확신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짐 자무시는 이처럼 씁쓸한 이야기로 도달하는 길을 여느 때보다 쉽게 터 준다. 달달한 껍데기를 당의정 같은 이야기 앞에서, 당신은 세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씁쓸한 이야기를 곱씹어 약효를 내거나, 달콤함에 속아 씁쓸함을 뱉어내거나.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 자무시의 진실을 받아들이는가는 관객 나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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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큰 플라워(2005, Broken Flowers)
제작사 : Bac Films, Focus Features / 배급사 : 스폰지
수입사 : 스폰지 / 공식홈페이지 : http://www.brokenflower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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