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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민중에 의해 이룩되어야 한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vinappa 2005-11-05 오전 1:56:10 688   [5]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여러분께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빌어 하고자 하는 말은 나는 결코 이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전환점인 이 시점에 나는 여러분들의 충심에 목숨으로 화답코자 합니다. 모든 칠레인들의 지워지지 않을 기억 속에 씨앗은 이미 뿌려졌다는 확신을 여러분께 전하고 싶습니다. 저들은 막강한 힘으로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하지만 무법과 폭력으로도 사회주의를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의 편이며, 민중에 의해 이룩되는 것입니다. 조국의 노동자들이여, 그대들의 굽힘없는 충심과 인간으로서의 양심에 감사드립니다. ... 중략 ...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디 잊지 마십시요. 또 다른 누군가가 승리를 거둘 것이고, 대로가 개방되어 모두가 자유로이 길을 걸을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는 나의 희생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닐 것임을 확신합니다."
- 살바도르 아옌데 최후의 연설에서 발췌 -

    엘비오 소토 연출의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에는 주인공이 없다. 몇몇의 주목받는 인물과 그 인물들을 중심으로 상호 대립하는 주의와 집단과 계층이 등장하지만 그들 중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지목하는 것은 명백한 실책이다. 1973년 9월 11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벌어진 군부 쿠데타를 사회주의자의 관점으로 재조명한 이 영화는 역사와 진실에 관한 참담한 기록이지 특정 인물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성의 위인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굳이 이 영화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찾고자 애쓸 필요는 없다. 그래도 기어코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지목하라고 윽박지른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칠레의 기층민중과 그들이 열망한 인간중심의 세상이라고. 그 거대한 영향권 안에 살바도르 아옌데가 있고, 빅토르 하라가 있고, 파블로 네루다가 있고, 아옌데의 지지세력인 '인민 연합' 동지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부패한 군부와 매판자본과 미국의 패권주의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옥죄는 침묵과 긴장감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실증의 기록물답게 단 한번도 플래시백이라는 나약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실제의 과거(1970년)에서 거슬러 올라와 영화적 현재(1973년)에 도달하는 동안 그리고, 영화적 현재가 실제의 현재(1976년)를 향해 다시 도도한 행보를 옮기는 동안 영화는 간결하고 명쾌한 증언만을 피력한다. 분노와 오열, 환멸의 감정을 개입시킬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시종일관 거친 숨소리 한번 토하지 않고 오직 진실만을 증언한다. 시각적인 짜임새나 기술적인 완성도에서는 저예산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이 영화가 여느 대작들 못지않은 두터운 입체감을 과시하고, 거침없는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사건 자체가 가진 무게감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이 감정없고 직설적인 증언의 진실성때문일 것이다.

    1973년 9월 11일, 하늘과 땅과 바다 전체를 반란군이 장악한 일촉즉발의 긴박한 상황으로 시작해서 훌쩍 1970년의 대통령 선거일로 시간을 되감기하는 이 영화는 세계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한 그날의 환희에 취해 음풍농월하지 않고 그 시점에서 새로이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영화적 현재인 1973년 9월 11일로 돌아오는 동안 단 한번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이 영화가 주목하는 바는 아옌데 정부의 정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이 아니라 그것을 파훼하려 드는 기득권의 비열함과 기득권을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미국 정부의 야비한 작태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기층민중들의 절절한 열망이다. 영화 상에서 살바도르 아옌데는 채 십분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하더라도 화면의 외곽에 위치하거나 어긋난 각도 또는 뒷모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가 적극적으로 주목받는 경우라고 해봐야 모네다 궁에서의 최후의 저항 시퀀스 뿐인데, 여기서도 포커스는 그의 얼굴에 맞춰지지 않는다. 이 마지막 저항이 아옌데의 죽음으로 일단락된 이후 관객의 뇌리에 각인되는 것은 살바도르 아옌데의 명함판 사진이 아니라 그가 착용했던 철모와 붉은 두건의 강렬한 인상이다.

    1970년의 합법적 승리가, 천명의 동의어인 민의의 인장을 획득한 새로운 시작이 불붙은 갈대밭같은 험로를 지나 야만적인 폭력에 최후를 맞이하고도 영화는 끝맺음을 하지 않는다. 끝맺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바삐 서둘러 대통령궁 외곽으로 걸음을 옮기고, 또 다른 죽음들을 응시한다. 아옌데의 적극적 동지들인 '인민연합'과 군부 내의 반동분자들 그리고, 아옌데가 너무나 사랑했던 행동하지 않는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라는 거창한 명함을 들고 쿠데타를 지휘한 피노체트는 모네다 궁이 함락된 후 채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3만여에 달하는 민중들을 학살했으며 그들 대부분이 사회주의자였다. 영화는 그 무자비한 카니발리즘을 세세히 전시하지는 않는다. 대신 살벌한 총구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누에바 깐시온 걸작 중 하나인 <벤세레모스>를 외쳐불렀던 한 젊은이의 죽음으로 증언을 대신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확신하건데 영화의 내용은 사실을 상징적으로 축약한 것이지 허위로 조작한 것이 아닐 것이다) 전쟁포로처럼 체육관으로 끌려온 아옌데 지지자들 중 홀로 <벤세레모스>를 부르다 양 손목이 부러진 채 사살당한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빅토르 하라, 직업은 가수였으며, 그해 스물 여덟의 창창한 나이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주도 지나기 전에 위대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순교했다. 영화는 파블로 네루다의 장례식(영화 내용에서 특별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정황으로 보아 그럴 것이다) 행렬과 그들이 외치는 추모와 다짐으로 장엄하게 끝맺음한다.

    영화적 관습에 연연하지 않고 사실의 기록과 재현에 집중한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역사와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과 자세다. 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고, 그것을 기록하고 재조명하는데는 개인의 감정이 개입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영화에 특정한 주인공이 없는 이유는 역사라는 것이 특출난 1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민중으로부터 시작되고 민중에 의해 완성된다. 지도자의 정치성향도 민중의 열망을 수렴한 것이지 개인의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승리보다 값진 패배를 그린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이 금과옥조같은 진리를 흠결없이 만족시킨다.

    패배주의자의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살바도르 아옌데의 개혁 정책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의 무모한 소모전이었고, 이 영화는 그것을 미화한 선전영화다. 무력과 금력 앞에 이상과 동지애만으로 맞선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모했고, 그 결과는 비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관론과 패배주의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비관론과 패배주의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기 위한 넋두리에 불과하다. 지식인 중심의 사회가 의지 결핍과 추진력 빈곤에 시달리는 이유도 그들의 나약함이 비관론과 패배주의의 타성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옌데 정부는 지식인 사회가 아닌 노동자 계층을 개혁의 중추로 추대했고, 노동자 계층은 정부의 개혁정책을 충심으로 지지했다. 300%에 이르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여당이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고, 군부 쿠데타 발생시점이 민심에 의한 최종 승인 직전이었음을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속담은 불가능한 일에 무모하게 도전하는 경우를 빗대어 하는 말이지만, 반드시 깨뜨려야 할 바위덩어리가 있다면 자신이 계란이 아니라 메추리알이라 해도 몸을 던져 부닥쳐야 한다. 그리고, 모두의 힘이 하나의 목표 아래 결집된다면 아무리 견고한 바위덩어리라도 마침내 부서지는 법이다. 견고한 축대에 구멍을 뚫는 낙숫물의 위대함은 오래도록 여럿이 한점을 향해 수직낙하한 희생의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족;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무력으로 칠레의 정권을 강탈한 그해, 이 희대의 정치모략의 배후조종자인 헨리 키신저는 그 이름도 찬란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물론, 노벨 재단이 그해 평화상 수상자로 헨리 키신저를 지명한 것은 칠레의 빨갱이 정부를 몰락시킨데 대한 정치적 대가가 아니다. 칠레의 정반대 지점쯤에 위치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이념분쟁 - 월남전 - 을 종식시킨 공로가 헨리 키신저의 노벨 평화상 수상의 대외적 명분이다. 그러나, 월남과 칠레의 정치에 개입한 미국의 속셈이 신제국주의 내지는 패권주의의 발로라는 점과 그 과정의 반도덕성을 생각할 때 헨리 키신저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이제라도 철회됨이 마땅하다.

 

2005. 11. 03. 山ZIGI VIN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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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dk209
국민의 선거로 뽑힌 정부라도 좌파 정부는 용인되지 못하는가??   
2006-12-04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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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1976, It Is Raining On Santiago / Il Pleut Sur Santi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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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급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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