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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배우의 취향 <열한시> 정재영
2013년 12월 2일 월요일 | 서정환 기자 이메일

<열한시>는 타임 스릴러라고 홍보가 됐지만 SF에 집중한 영화는 아니에요. 시간 이동에 초점을 맞춘 SF영화라 생각했는데 김현석 감독 특유의 코드가 많이 담긴 스릴러영화더라고요.
타임 스릴러, 스릴러라고 하잖아요. 시간 스릴러(웃음). 타임머신 스릴러가 아니라 타임 스릴러(웃음).

어떻게 출연 결정을 하게 된 건가요?
이런 성격의 영화들을 좋아해요. 시나리오가 새롭고 독특했고, 김현석 감독님이 한다고 해서 출연하게 됐죠. 물론 잘 구현이 될까 우려는 있었지만, 걱정보다는 새로운 걸 시도한다는 사실에 재미가 있었죠.

물리학자 우석 캐릭터는 어떤 부분에서 끌렸나요?
캐릭터 부분에서는 인간적으로 그렇게 끌리진 않았어요. 누가 봐도 저 역할 너무 좋은데, 끌리는 캐릭터는 아니에요. 약간의 연민이 있지만 우리가 싫어하는 이기적인 스타일의 캐릭터에요. 밉상이죠. 자기중심적이고. 대의를 위한다지만 결국 이기적인 명분이고, 그 명분을 내세워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캐릭터니까요. 캐릭터보다는 시나리오의 전체적인 소재나 흐름, 이런 게 훨씬 좋았죠.

밉상 캐릭터를 더욱 미워 보이게 그리고 싶었나요, 아니면 정재영 특유의 친근함으로 중화시키고 싶었나요?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느낌대로 연기했어요. 너무 밉상이면 보는 사람이 짜증날 수도 있어요. 그냥 평범하게, 너무 밉지도, 너무 착해도 안 되는. 어떤 배역을 하더라도 힘든 부분이죠. 욕심이 너무 앞서면 안 되거든요. 그림으로 치면 덧칠을 너무 많이 하는, 그래서 오히려 원 그림을 훼손시키는 것처럼, 이론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힘든 부분이죠. 욕심이라는 것이 작용하니까요.

팀원들 간의 갈등,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면에서는 물리학자의 모습이 강하게 어필되는 반면, 진지한데 툭툭 가볍게 대사를 던지는 모습들이 조화를 이뤘어요.
사실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이 영화는 호흡이 중요하고 한사람이 끌고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혼자 너무 도드라져도 밸런스가 무너지거든요. 다들 평범하게 연기하는 게 오히려 더 진짜 같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직업만 다를 뿐이지 물리학자도 별 다를 게 없거든요. 그게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싶어요. 박사면 안경도 쓰고 그래야할 것 같은데, 영화 속에서는 오히려 기술자들이 안경을 쓰고 박사들은 안경을 안 썼어요. 심지어 항상 안경을 쓰고 다니던 최다니엘마저 안경을 벗었어요(웃음). 재밌잖아요. 물리학자인 척 했다면 지금보다 더 재미없었을 거예요. 우석은 그냥 그런 성격의 물리학자였던 거죠.
캐릭터의 적정선을 잡는다는 것이 알지만 실천하기 힘든 연기잖아요.
그죠. 시도하는 거죠.

그 적정선을 어느 정도 계산하고 수위를 잡아가는 건가요, 아니면 캐릭터를 이해하고 현장에 맡기는 건가요?
그 부분은 정답을 안고 가는 건 아니고요, 너무 벗어나지 않는 어느 정도 수위가 있죠. 한 컷만 찍는 게 아니니까 그 안에 있는 몇 가지를 해보는 거죠. 그 중 적절한 걸 감독님이 최종 판단을 하고, 저는 여러 가지를 보여주는 거죠. 사실 연기하기 전에 수위를 좁혀서 가져가는 건 아니에요. 캐릭터를 미리 생각하고, 대사의 감정을 미리 생각하고 가는 건 위험해요. 고정관념이 박혀서 다른 걸 생각을 못해요. 열어놓고 현장에서 상대배우와 대사를 치고받다보면 혼자 해보는 것과 또 달라지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융통성을 가지고 연기하는 거죠.

<열한시>는 김현석 감독에게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아쉽지만 김현석 특유의 색이 있어 마냥 싫지는 않은 작품일 거예요. 하지만 관심이 없거나 약간의 호감 정도만 있던 관객들에게는 거부감이 들기도 할 것 같아요. 자신의 색을 없애고 스릴러에 집중을 하던가, 그 색을 어떻게 스릴러 장르에 입힐 것인가를 많이 고민했겠죠.
배우도 똑같아요. 새로운 역할을 할 때 내 것을 완전히 버려서 연기할 것인가, 내 색을 입혀서 연기할 것인가. 하지만 배우는 저절로 돼요. 왜냐면 연기는 본인이 하는 거니까요. 완전히 내 것을 버릴 수도 없어요. 완전히 버린다면 오히려 거부반응이 일어나겠죠. 새로운 걸 넘어가버리니까요. 그 적정선, 감독님도 마지막 편집할 때까지 그걸 치열하게 고민하셨겠죠. 바로 그런 문제인 것 같아요. 연출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결과가 어떻든 김현석 감독에게는 좋은 계기란 생각이 들어요. 잘했던 장르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계기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장르에 자신의 색을 섞는 도전을 계속 하는 발판이 될지, 어떤 식으로든요.
그럼요. 이번에는 처음으로 다른 장르를 자기 색으로 엮어보는 작업이었다면 앞으로는 조금 쉽겠죠.

그래서 정재영이라는 배우의 캐스팅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위험부담을 막아줄 수 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가 뭘 막아줘요(웃음). 저도 마찬가지에요.

코믹한 대사 같은 코드가 김현석 감독의 색이 개입됐다기보다는 스릴러 안에서 인물의 드라마 흐름이 감정의 폭을 만드는 것이 김현석 감독의 색이 드러난 부분이었거든요. 그걸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소화한 배우가 정재영이었어요. 그래서 김현석 감독의 색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캐릭터 영화는 아니에요. 드라마죠. 하지만 장르가 스릴러이기에 갈등이 심화되고 그럴만한 틈이 없어요. 사건 중심이고, 보이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요. 그런 부분도 어떻게 보면 김현석 감독님 스타일이 아닌 거죠. 이 영화는 출발 자체가 인물에 공감을 받는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사건에 공감을 받아야하고 인물은 그걸 따라가는 영화잖아요. 연출이나 배우에게는 불리한 장르죠. 장르에서부터 손해를 보고 들어가는 거죠. 그렇다고 안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저는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중간은 괴로울 수 있는데 쌓이다보면 여러 가지를 합쳤을 때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거죠.
부족한 예산이지만, 예산의 한계 내에서 CG나 세트, 소품 등 디자인이나 아이디어 측면으로 이를 극복해보려는 노력이나 효과가 크게 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아요.
축구공 하나에 8천만 원이래요. 그 축구공 같이 생긴 타임머신(웃음). 정말 싸 보이고, 다 수동인데 8천만 원이에요. 좌석에 앉으면 안전 장비가 내려오잖아요. 연기하면서 제가 내렸어요(웃음). 손은 안보이고 타이트하게 얼굴만 잡으니까요. 현장에서 보는 사람은 웃겨 죽는 거죠(웃음). 시간 이동은 처음이라 얼굴은 긴장된 표정을 지어야하니까. ‘됐나요? 손 안보이나요? 갑니다!’ (웃음) 웜홀을 통과하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난생 처음 해보는 연기잖아요(웃음). 감독님한테 처음으로 물어봤어요. ‘어떻게 해야 돼요?’ 본인도 모른다고, 하고 싶은 대로 하래요. 바보 둘이 웜홀을 통과하는 연기를(일동 폭소). 대한민국에서 제가 처음 해봤어요. 저랑 옥빈이랑 뭔지도 모르고 어떤 느낌인지도 모르고요. 그때 생각만 하면 웃겨서(웃음). 영화를 보니 그냥 그럴싸하더라고요. 그런데 웜홀을 통과할 때는 정지 상태로 가고, 구동할 때 그 연기를 썼더라고요. 우리가 했던 연기랑은 달라요(웃음). 깜짝 놀랐어요. ‘저건 뭐지?’ (웃음)

대상이나 사물이 없는 상태에서 연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 같아요.
CG가 워낙 많으니까요. 죽는 장면들도 사실은 미리 찍어놓고 보는 게 아니라 CG로 마킹만 해놓고 팀원 여럿이서 시선을 맞추고 상상으로 각자 연기해야하는 거였죠. 러시아 회장하고 미팅하는 장면도 공간이 없어서 CJ 본사 회의실에서 찍었어요. 그나마 가장 현대식 건물이라고(웃음).

첫 장면인데 가장 최첨단의 느낌이 들더군요(웃음).
그런 부분이 이런 영화에서는 반 이상이거든요. 배우야 촬영하고 후시 끝나면 땡이지만 감독님은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어요. 이렇게까지 구현이 안 될 줄, 돈이 많이 들 줄은 몰랐겠죠.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지완(최다니엘)이 마취제를 놓으려고 할 때 우석이 약병을 발견하고 복잡다단한 심경을 표정으로 표현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만감이 교차하잖아요. 누구보다 친한 사이고 후계자로까지 생각한 동료이자 동생인데. 미래를 갔다 온 후 의심은 했는데, 기타 4번 줄이 없는 걸 보고 마취제를 보니까 확실히 의심이 굳어진 거죠. 이 사태를 어떻게 바꿔야할지 체념도 됐을 테고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을 것 같아요. 막상 연기할 때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요(웃음).

체념 속에서 새로운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고요.
자존심이죠. 그래도 마무리는 지어야하는. 아주 나약해질 때로 나약해진 상태인 거죠.

방에서 집기를 부술 때부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요.
사람이 아무리 똑똑한 과학자더라도 그 순간에는 바보가 되는 거죠. 아주 나약한 존재인 거죠. 그렇지만 알면서도 계속 가잖아요.

빤하고 많이 반복됐지만 그런 원형적 서사가 사람들에게는 가장 관심이 가는 이야기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이미 알면서도 바꾸려고 하는. 못 바꾼다는 것도 알아요. 찍으면서 나도 아는데(웃음). 카이스트 출신의 천재 물리학자면 뭐해요. 알면서도 가는 거죠. 이미 바꿀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바로 하루 앞을 못 내다보고 그 말을 하는 거죠. 그런 인간의 욕심, 집착, 미련, 그런 것들이 감독님이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닐까 싶어요.
정재영이 출연하는 영화에는 기본적으로 ‘믿고 보는 배우’라는 댓글이 달려요.
안 그래요. 냉정하게 얘기해서 좋아하는 분들은 소수 있는데, 다른 분들은 별 관심이 없어요.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하면 하나보다, 하는 정도.

최소한 정재영이라는 배우에 대한 거부감은 없죠.
안티라는 것도 반대급부에요. 광적인 팬이 있거나 라이벌이 있거나. 사실 그게 딜레마에요.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도 좋은데, 뭔가 광적인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히려 장진 사단 시절에 마니아가 확고했고, 이후 대중적 폭이 넓어졌잖아요.
맞아요. 한동안 인터뷰하면 전에는 좋아했는데 큰 상업영화 하면서 망가졌다고 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방법은 하나인 것 같아요. 열심히 하는 것. 열심히 하다보면 누군가 색깔을 만들어주고 나도 모르는 내 이미지가 생기는 것 같아요. 연기도 그렇고 억지로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한다고 그렇게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것도 다 욕심인 것 같아요. 딱 거기까지예요. 오래가면 모든 건 다 좋게 평가를 받는 것 같아요. 오래간다는 것 자체가 1인자든 2인자든 3인자든 대단한 거니까요. 오래 하다보면 그때서야 내가 이런 스타일이었구나,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상업영화 하면서 망가졌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200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작품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정재영이라는 배우가 견지하고 있는 선이 있다는 건 충분히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돈이 좋고, 인기가 좋아서 방향을 틀고, 본성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아요.
본성이 바뀌진 않죠. 단지 새로운 것, 안 해봤던 것을 해보고 싶었던 거죠. 보는 분들은 본인 취향에 맞는 걸 제가 계속하기를 원하지만, 저도 취향이 있거든요(웃음). 저도 새로운 걸해야 재미가 있죠(웃음). 환기가 필요하거든요. 배우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좋아하는 게 일단 첫 번째고, 그걸 남이 좋아해주면 다행인 거고요. 그래야 질리지 않고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사람 비위맞추면 다른 사람이 싫어하고 그래요. 가장인데 네 명도 안 되는 가족들 비위도 다 못 맞춰주는데(웃음). 저는 에버랜드 가는 거 좋아하는데 애들은 싫어하고, 이런 말도 안 되는(웃음). 제 생일에 에버랜드 갔어요. 싫다는 애들 설득해서(웃음).

이번 작품을 통해 얻은 것들이 있다면요.
이 영화와 사람. 김현석 감독님도 그렇고 배우들도 다 좋아했던 분들인데 처음이었거든요. 대연이형, 철민이형, 다니엘, 옥빈, 건주, 다은이까지. 촬영할 때 추억이 중요해요. 즐겁게 촬영했고, 그 추억이 좋아야 결과가 안 좋아도 그 추억으로 또 다른 작품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그 추억이 안 좋으면 결과에 관심도 없어요. 이미 자체가 안 좋은데 영화가 잘되면 이상한 거예요. 잘되면 오히려 기분 나빠요. 새로운 소재의 장르를 대한민국에서 했고, 우스갯소리지만 이런 역할은 다시 맡기 힘든(웃음), 그런 것들도 남고 여러 가지가 추억으로 남겠죠.
2013년 12월 2일 월요일 | 글_서정환 기자(무비스트)
사진_김재윤 실장(studio 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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