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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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미지’(박보영)가 하루를 시작하며 주문처럼 습관처럼 되뇌는 말이다. 타인의 인생이 내 인생보다 근사하고 순탄해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잔잔해 보여도, 가까이서 보면 작은 파도가 일렁이듯이, 들여다보면 누구나 나름의 고충과 실패가 있는 법. 스스로를 향해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보는 건 어떨까. tvN 드라마 <미지의 서울>이 2030 시청자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미지가 처한 현실이, 또 미래가 맞닥뜨린 부조리가 마치 내 일처럼 다가오며 미지와 미래를 위로해 주고 싶듯이, 처음으로 1인 2역에 도전한 박보영도 시청자에게 공감과 위안, 용기를 주고 싶었다고 한다. 종영을 앞둔 박보영을 만났다. 장르나 캐릭터는 달라도 자신이 느꼈던 마음을 시청자에게 잘 전달하는 게 자기 역할이라는 박보영이다. 이를 위해서 항상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털어놓는다.
<미지의 서울>이 인생드라마가 됐다는 사람들이 많더라. (웃음) 많은 사랑을 받았다.
TV 방영 드라마가 오랜만이라 본방을 같이 달리면서 보고 얘기하니까 재밌더라. (웃음) 감사하게도 좋은 말씀이 많아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반응을 찾아보고 있다. 기분 좋은 건 후반부 미지가 지문을 찍는 장면에서 미지와 미래를 구분하지 못하게끔 의도했는데 의외로 아시는 분이 많더라. 이렇게 빨리 알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기를 괜찮게 했다 싶었다. 미지와 미래가 다르게 보이는 게 포인트이고, 제일 고민한 지점인데 생각한 만큼 잘 나온 것 같아 다행이다.
쌍둥이 언니 유미래, 동생 유미지. 1인 2역을 연기했는데 주안점은.
박신우 감독님께서 1인 2역이라고 해서 너무 다르게 하는 것보다는 디테일에서 차이점을 두자고 하셨다. 톤의 차이도 마찬가지로 내가 평소 사용하지 않는 톤은 지양하되 달리 가져갔다. 가령 감정씬의 경우 미래는 꾹꾹 삼키면서 운다면, 미지는 아이처럼 엉엉 운다든지 하는 식이다. 미래는 가족들과 말할 때와 혼자 있을 때의 나를, 미지는 내가 연기할 때와 사회생활 할 때의 나를 기본 톤으로 가져갔다.
미래와 미지가 서로 바꿔서 역할 하지 않나. 미래인 척하는 미지, 미지인 척하는 미래, 어떻게 보면 1인 4역을 한 셈이다.
서로 바꾸었을 때, 미래는 시골(본가)에 내려가서 미지인 척을 열심히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제일 많이 접촉하는 사람이 ‘세진’(류경수)인데 그는 진짜 미지를 만난 적이 없어서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문제는 미지가 미래 대신 직장에 나갈 때였다. 헤어와 메이크업에서 우리만의 디테일한 차이를 만들고자 했다. 예를 들면 미래는 깔끔하게 머리를 묶는다면, 미지는 꼬리가 살짝 나오는 식이다. 또 미지는 화장을 잘 못하니, 아이 라인에 차이점을 두기도 했다. 감독님이 손짓, 동작, 움직임 등 아주 자세하게 디렉팅을 주시는 편이다. 특히 ‘호수’(박진영)와 미지의 첫 키스씬에 욕심이 있으셔서 (웃음) 정말 섬세하게 하나하나 만져 주셨다. 시청자들이 디테일이 살아있다고 꼽는 장면 중 대부분은 감독님이 만들어 준 거다.
1인 2역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나.
너무 컸는데 대본을 보고 욕심이 났다.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 있겠다 싶었고, 무엇보다 대사와 내레이션이 좋았다. 호기롭게 한다고 해놓고 다음 날에 얼마나 걱정되던지! 촬영 전에 도망가고 싶었다. (웃음) 촬영하면서도 고비를 느꼈고, 실패를 경험하면서 과연 내가 할 수 있을지 마지막까지 고민했었다. 정말 모르면 용감하다고 몰랐으니까 선뜻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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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좋았던 대사를 꼽는다면.
너무 많아서.. 할머니와 하는 대사는 다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내레이션도 좋은 것이 너무 많았다. 음, 정확히 기억은 안 나도 ‘내가 알았던 것이 진정으로 맞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는…’ 또 ‘인간은 가장 나를 지켜야 할 순간에 왜 스스로를 공격하는 걸까’, ‘켜켜이 쌓이는 시간에 약한 나를 들킬까 소리 없이 지난 나날들…’ 등등 공감하는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따로 써 놓았다.
미래와 미지 중 좀 더 마음이 가는 캐릭터가 있을까.
둘 다 자식 같은 캐릭터인데, 그래도 좀 더 미지가 이해됐다.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고, 엄마와의 관계성도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고 (웃음) 또 인생의 실패를 경험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나도 해봤던 터라 더 가깝게 느껴졌다.
실제 엄마와의 관계성은 어떤지 궁금하다.
음… 엄마는 나를 미래처럼 대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약간은 조심스럽고 어려운 딸로 말이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 오히려 미지처럼 대하는 편이다. 어쩌다가 의견이 다르더라도 엄마가 울면 그 순간 모든 감정과 화가 싹 사라진다. 그러면서 ‘내가 잘못했지, 내가 불효녀야’ 이런 생각에 휩싸인다. 아마도 작가님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으셨을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모든 모녀는 이런 경험을 한 번쯤은 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말한 인생에 실패감을 느끼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어떻게 극복하는지.
미지처럼 한강을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 시골에서 올라온 부분도 비슷하다. (웃음) 울고 싶을 때 차 몰고 한강에 가서 운 적이 있다. 일을 하다 부닥치고 뭔가를 쏟아내고 싶으면 나만의 스팟을 찾아가게 되더라. 요즘에는 스스로 다짐하게 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극복은… 울고 싶으면 아예 울면서 견디기도 하고, 팬들의 메시지나 편지를 다시 찾아보는 편이다. 특별히 위로와 응원을 주는 편지는 따로 보관해 놓고 힘들 때마다 한 번씩 꺼내 보곤 한다.
미지와 미래가 마주하는 장면이 많은데, 어떻게 촬영했는지 그 방식이 궁금하더라. 각각 따로따로 해서 편집으로 합친 건가.
원래는 상대방을 연기해 주는 분이 따로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미지를 연기할 경우, 먼저 미래의 연기를 미래 대역분에게 내가 시범을 보인다. 그러면 그 배우분이 거기에 맞춰 미지의 상대역을 해주시는 거다. 물론 카메라에는 나만 잡히지만. 반대로 미래를 연기한다면, 미지 대역분이 앞에서 연기해주는 식이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특히 촬영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이 부족해서 앞에 대역 없이 혼자 연기하기도 했었다. 시선을 어느 높이에 두어야 할지 칠판에 표시한 지점을 보며 미래를 연기한 후, 바로 환복하고 머리 붙여서 미지를 연기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혼자 해보니까 알겠는 게, 내가 평소 계산을 해서 연기하는 편은 아니라는 거였다. 상대방의 연기를 보면서 리액션하며 수정해 나갔던 거지. 덕분에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고도 연기할 수 있게, 연기적으로 성장한 것 같다. 미지, 미래, 호수, 세진 이 네 명이 만났을 때는 연기보다 기술적으로 힘들었다. 동선과 거리감 같은 맞춰야 할 디테일이 많아져서 스탭들이 정말 고생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익숙해지면서 척척 해내시더라. (웃음)
트럭도 몰고 뜨개질도 하던데, 연기 외적인 준비도 많이 했겠더라.
사실은 뜨개질은 시간이 없어서 마스터를 못해갔다. 동그란 모양까지 학습하고 갔는데, 거기서부터 뜨기 시작하는 거다! 이때 ‘호수’ 진영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내가 엉망으로 떠서 주면 진영이가 마치 호수처럼 침착하게 다 풀어서 다시 만들어 주곤 했다. 그리고 트럭은 1종 면허가 없어서 기어 조정은 하는 척하는 걸로 무마했다.
미래와 미지로, 류경수, 박진영과 호흡을 맞췄는데 각기 다른 느낌을 잘 살린 것 같다.
사실 첫인상은 진영이가 좀 더 장난스럽고 세진이가 차분할 줄 알았는데 만나보니까 반대였다. 경수는 장난기가 많은데 그냥 까부는 장난이 아니라 한마디를 하는 게 진짜 웃기다. 집에 가서 누워서 생각하면 피식하게 된다고 할지. 진영은 아이돌 출신인데도 의외로 너무 차분해서 마치 호수가 사고 치곤 하는 미지를 눌러 주는 느낌이 들었다. 미래는 심연에 가라 앉은 상태로 세진과 마주하니, 호수와는 20대의 연애라면 세진과는 30대의 교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래와 미지 둘 다 좋게 연결되어서 너무 좋았다.
<미지의 서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얼까.
이 드라마를 꼭 하고 싶던 이유 중 하나가 기획 의도였다. 왜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의 삶이 좋아 보일 때가 있지 않나. 하지만 들여다보면 그 나름대로의 걱정과 시련이 있다. 다른 사람을 들여다보기보다 자신을 들여다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살아가는 모습이 누군가에겐 부족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면 된 것이 아닐까. 극 중 할머니가 ‘살고자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라는 말이 <미지의 서울>이 전하고 싶은 말이 아닌가 한다. 또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이 말도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힘내세요’ 라는 말보다 좀 크게 다가왔고 나 역시 실생활에서도 많이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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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콘트리트 유토피아>(2023)부터 넷플릭스 <정신병원에도 아침이 와요>, 디즈니+ <조명가게> 그리고 이번 <미지의 서울>까지 이전에는 명랑하고 귀여운 역할이었다면 좀 더 성숙하고 내면 연기가 깊어졌는데, 의도한 작품 선택인 건가.
어느 정도 의도한 바는 있다. 그전에 밝고 통통 튀는 캐릭터나 판타지를 많이 해서 나름 배우로서 10년이 넘었는데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지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내 안에도 미래나 미지 같은 모습이 있으니 이런 걸 보여드려야 하지 않나 싶기도 했고. 또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할 당시 무언가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실패가 있지만, 그럼에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나(캐릭터)를 보면서 위로를 얻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위의 작품들을 보고 용기를 많이 얻었다는 분들이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딥하지만, 감정적인 위로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면, 이번 <미지의 서울>은 이런 의도보다는 대본이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금 촬영 중인 <골드랜드>는 캐릭터도 장르적으로도 매우 어둡다. 어두움의 끝장이라 (웃음) 다음에는 밝은 작품을 하려 한다. 어두운 작품을 하면 아무래도 평상시에도 어두울 수밖에 없더라. 2년 동안 너무 차분해진 것 같아서, 내 기본값(텐션)이 낮아진 것 같다. 이제 좀 올리려 한다.
대본 선택 시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부분이 있다면.
음.. 일단 글의 재미인데, 이 재미라는 게 너무 주관적이라 어떻게 말씀드리기 어려운 것 같다. ‘이런 게 기준이에요’ 하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재미의 기준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막상 읽을 때는 잘 넘어가도 다 읽고 나면 재미가 없는가 하면, 한 장 한 장 잘 넘어가지 않아도 다 읽었을 때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것이 있거든. 중요한 건 글에 공감하고 마음의 동요가 있는지, 그게 우선인 것 같다. 이번 <미지의 서울>도 무엇보다 마음이 움직였었다.
유료 소통 어플(버블)을 통해 팬들과 소통을 잘하기로 유명한데 유료라 더 최선을 다한다고.
나 역시 덕질을 한 적이 있는 일인으로서(웃음)! 가수는 무대가 있지만, 배우는 소통할 창구가 드물어 할 수 있는 한 소통하려고 한다. 버블에서는 평소에 안 쓰는 ‘오또케’ 같은 귀엽고 친근한 말투를 쓰기도 한다. 사실 현실에서는 (대중적인) 이미지보다는 애교가 많은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배우라는 건 봐주시는 관객이나 시청자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직업이라, 19년째 일하고 있지만 한 분 한 분 점점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할 수 있는 한 잘해 드리고 싶다.
내년이 어느덧 데뷔 20주년이다.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면.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20년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EBS 청소년 드라마할 때 감독님한테 매일 혼나고 ‘이 일은 내 길이 아니다, 온 우주가 하지 말라고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하고 있다. 요즘에는 ‘이것이 나의 운명이었나 보다’ 하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스스로에 후한 편은 아니지만,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하면서 나에게 칭찬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긴 시간 해 올 수 있었으니 ‘그래도 못하지는 않나 보다’ 이런 생각이다. (웃음) 언제까지 작품이 계속 올지 또 언제까지 사랑받을지 알 수 없으니, 사랑 주실 때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크다. 지난 20년간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나쁘지 않았다. 어려운 시기도 있었지만, 힘든 만큼 성장하더라.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커졌다. 휩쓸리지 않고 단단하게 가고 싶다. 장르나 캐릭터는 변하더라도, 또 드리는 게 재미일 수도 감동일 수도 메시지일 수도 있지만, 배우로서 느꼈던 마음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다. 내가 느낀 마음과 감정을 시청자에게 잘 전달하는 게 내 역할이라 생각한다.
사진제공. BH엔터테인먼트
2025년 7월 7일 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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