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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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이라는 현상 안에 저도 있는 것 같아 신기한 느낌이에요” 매번 캐릭터에 녹아 든 연기로 호평받는 배우 이병헌의 <오징어 게임>에 대한 소감이다. 시즌1의 마지막에서 마침내 그 얼굴을 드러냈던 프론트맨 이병헌은 시즌2에서는 ‘오영일’ 이라는 이름으로 게임에 직접 참여, ‘성기훈’(이정재)과 파트너십을 선보였다. 일찍이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활약한 그인데, 그때는 의외로 연기 칭찬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면서, 이번 해외에서 들려오는 연기 칭찬에 기분이 아주 좋다는 이병헌을 만났다. 한국 배우들과 한국어로 연기한 한국 작품으로, 이같이 칭찬받을 수 있어서 감개무량하면서도 K- 콘텐츠의 위상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는 그의 말을 들어본다.
가면을 벗고 본격적으로 게임에 합류했다. <오징어 게임> 시리즈와 ‘프론트맨’ 캐릭터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로 남을 것 같다.
<오징어 게임> 시리즈의 작품적 의미도 있겠지만, 어떤 현상 같다는 생각이다. 그 현상 안에 내가 있고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는 거지. (웃음) 할리우드를 겪어 봤지만 이런 환호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이토록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작품 자체가 주는 화제성과 재미, 주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K-콘텐츠의 위상이 올라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개인적으로는 내 필모에 있어 중요한 시점으로 지나가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한다.
드디어 게임장 안에 입성했는데, 밖에서 쳐다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겠다.
처음 숙소를 보고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일단 놀랐다. 그 안에서 촬영하면서 점차 적응해 갔고. 시즌1 때는 프로트맨이 홀로 모니터만 보고 있어서 외로웠다면, 이번에는 다들 모여서 촬영해서 잡담도 나누고 하니 대기 시간도 빨리 지나가고 즐거웠다.
이번 시즌2보다 시즌1때 캐릭터에 대한 질문이 더 많았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 그간 영화 <밀정>을 비롯해 몇몇의 카메오 출연이 있었는데 그때 오히려 질문이 많아진다. 왜냐하면 카메오는 인물의 서사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보니 감독님께 많은 질문을 던지고 이를 통해서 인물의 형태를 그려간다. 그래야 그 인물에 젖어들 수 있거든. 감독님은 등장하는 그 수많은 인물을 관장하기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다시 서사를 쌓아 올리는 거지. 이런 질문과 답변을 통해서 프론트맨의 서사가 완성된 것 같다.
주로 어떤 질문을 했는지.
근거가 필요했다. 내가 이렇게 연기해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할 근거가 뭐냐인 거지. 감독님이 나를 설득한다면 그다음 관객을 설득하는 건 배우인 나의 몫이 아닌가. 샅샅이 이해되지 않은 상태로 연기하는 건 불안한 일이다. 애초에 글을 쓴 의도를 고스란히 가져와 온전히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배우의 기본적인 자세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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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훈과 ‘영일’(이병헌)의 파트너십이 흥미롭다. 영일이 기훈에게 느끼는 감정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파악했는지.
어떤 동질감을 느꼈을 거다. 성격은 다르지만, 희망 하나 없는 시기에 세상을 등지고 게임에 참여했던 과정 또 그 게임에서 우승한 사람으로서의 동질감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신념을 갖게 된 사람인 거지. 시즌1의 마지막에서 프로트맨이 기훈에게 비행기를 타고 네 길을 가라고 충고하지 않나. 하지만 기훈은 거절하고 다시 게임에 참여하는데 이때만 해도 영일은 ‘오케이, 네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게 해줄 게’ 정도로 시작했을 거다. 하지만 단순히 게임에 참가한 것만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를 붕괴시키려는 기훈의 의도를 지켜보면서 갑작스럽게 참가자로 나섰다고 생각했다.
기훈-영일의 BL 밈이 나올 정도로 두 캐릭터의 관계성이 화제다.
BL이 뭔지 몰랐는데 이번에 처음 알았다. (웃음) 모든 배우가 각자의 노력을 하고 각자의 매력을 보여주니… 그 정도로 인상 깊었다는 뜻이 아닐까, 별생각 없다.(웃음)
영일의 교묘한 방해 작업과 이런 영일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성기훈의 아둔함이 흥미로운 포인트더라.
프론트맨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감정으로 기훈을 지켜보고 있었다. 분위기에 맞춰 ‘놀아줄게’ 이런 느낌인 거지. 영일의 방해 작업이 제일 눈에 띄는 게임은 5인 6각에서 팽이를 돌리는 씬이다. 제한 시간을 봐 가면서 아슬아슬하게 마지막에 성공하지 않나. 원래는 왼손잡이인 그가 오른손으로 돌리다가 시간에 임박해서야 왼손으로 제대로 돌리는 모습을 보인다. 팽이 돌리기 연습을 집에서 꽤 했었다. 우리 어릴 때 했던 팽이와 그 생김새와 끈이 달라서 손에 맞지 않는 어색함이 있더라. 또 내가 오른손잡이인데 왼손으로 능숙하게 해야 하는 상황이라 열심히 연습했었다.
오영일은 대놓고 반전 캐릭터다. 연기하면서 텐션을 유지하기 위해 신경 쓴 부분은.
오영일의 반전은 시즌1의 ‘오일남’(오영수)과는 반대의 반전이다. 시청자와 오영일이 반전을 공유한다는 데서 오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신 시청자가 영일의 정체를 아는 데서 오는 또 다른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힘들었고 가장 큰 숙제이기도 했다. 시청자가 아는 인물은 프론트맨이고, 모르는 인물은 프론트맨 이전의 황인호다. 눈앞에 있는 건 참가자들 속에서 연기하고 있는 오영일이고 말이지. 한 인물에 이 세 사람의 모습이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기하면서 장면 장면마다 이 세 캐릭터의 비중을 변주하고 조정해 나갔다. 마치 20%, 20%, 60% 이런 식으로 말이다.
세 인물의 변주에 있어서 힘들었던 장면을 꼽는다면.
제일 어려웠던 장면은 ‘둥글게 둥글게’ 게임에서 사람을 죽일 때였다. 그 장면은 황인호, 프론트맨, 오영일이 0.1초 단위로 왔다 갔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교차하는 느낌을 줘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황인호가 처음 ‘오징어게임’에 참가했을 때의 모습과 가깝지 않을까 한다. 살아남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을 바로 이행하는 결단력 있는 모습, 좋게 말하면 결단력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무시무시한 모습이라 하겠다.
때늦은 질문이지만, (웃음) <오징어 게임>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 시즌2나 지금 같은 메인 롤은 예상하지 못하고 들어간 것 아닌가.
시즌2가 나온다고 해서 ‘나이스!’ 했다. (웃음) 처음 들어갈 때만 해도 후속 시즌이 나올 거로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황동혁 감독과는 영화 <남한산성> 때부터 인연이 되어 가끔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시는 관계였다. 내 영화 시사회때마다 와 주고 또 작품 외적인 이야기도 나누곤 했었다. 어느 날 시즌2를 해야겠다고 이야기해서 ‘그럼 저도 나오겠네요?’ 했지, 살아남은 사람이 몇 명 없으니까. 내가 제주도에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촬영할 때 한번 놀러 오기도 했었고, 그때만 해도 시즌2에 황인호의 서사가 나오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초고가 나왔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6개월 동안 13부작의 이야기를 어쩌면 이렇게 짜임새 있고 재미있게 썼을까 싶더라. 연출도 잘하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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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연기 극찬을 받지만, 이번에는 국내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호평이다.
할리우드 작품을 몇 번 경험했지만, 당시에 딱히 연기 칭찬을 받은 기억은 없다. 액션 위주의 캐릭터였기 때문에 연기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필요 없었는지도 모르겠고 한편으로는 영어 연기라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편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 해외 연기 호평에 기분이 참 좋았다. 예전에 할리우드 작품 하면서 ‘혹시 전 세계 사람들이 날 알아보는 것 아니야’ 했던 상상이, <오징어 게임> LA 현지 프로모션에서 실감이 났었다. 한국 배우와 한국어로 만든 한국 작품으로 이런 환호를 받는데 정말이지 감개무량하더라. K-콘텐츠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나가 봐야 확실히 느끼게 된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를 촬영 중인데, 이번 기회를 통해 해외 활동에 박차를 가할 계획은 없는지.
그렇게 되면 좋지만, 배우는 시작부터 죽을 때까지 배우의 삶을 산다는 생각이다. 이 텀에 무엇을 하겠다고 작정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30년간 배우 생활하면서 느낀 건 의지의 문제가 아닌 인연의 문제라는 점이다. 내가 놓친 훌륭한 작품도 있고, 아쉬웠지만 선택한 작품도 있고 이 모든 작품이 인연이 아닌가 한다. 해외활동을 하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에 집착하려 하지 않는다.
‘기시감’ 없는 연기로 유명하다. 우문이지만, 무언가 비결이라도 있는 건가. (웃음)
영화 개봉할 때마다 한 번쯤 이런 칭찬을 받곤 하는데, 그때마다 너무 기분이 좋다. 비결이라면 딱히 뭐라고 할 만한 건 없다. 작품을 읽을 때 내가 느낀 인물의 형태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굳이 변화를 주려고 의도적으로 신경 쓴다면 인물의 진짜 감정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관객은 예전 혹은 전작과 같은 모습이든 아니든 극 중 인물을 얼마나 온전히 표현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에 집중하더라. 해서 인물을 자세히 보고 다가가는 발버둥의 연속인 것 같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도 또 들어가서도 그 인물을 부여잡고 가는 거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연기를 하고 있다면 스스로 너무 재미가 없을 듯하다. 반복되는 감정을 느낀다면 연기에 대한 재미가 확 떨어지지 않을까 한다.
어느덧 아들과 딸을 둔 아빠가 됐다. 늦었지만, 득녀를 축하한다. 아들은 아빠가 <오징어 게임>의 프론트맨이라는 사실을 알까. (웃음)
민정 씨는 딸에게 정말 이야기꾼인가 싶을 정도로 계속 무언가를 이야기하는데 나는 딱 두 말만 한다. 아이 이름을 부르거나 ‘아빠 해봐’ 이 말뿐이라 민정 씨가 되게 지겹다고 하기도. (웃음) 19금이라 아들은 보지는 못하지만, <오징어 게임> 굿즈를 가져가면 아주 좋아한다. 학교에서 형들한테 이야기 듣거나 유튜브에서 클립 등을 보고 자꾸 질문하는데 다 설명하기가 힘들다. 심지어 ‘아빠! 프론트맨 뺏긴다며?’ 이런 질문도 한다. 아들한테 이야기하는 순간 전국에 있는 초딩에게 다 퍼지게 되니까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지 못했다. 또 <오징어 게임> 전후로 아들의 태도가 달라지긴 했다. 공개 후 나한테 매달려서 뽀뽀도 해주고 이야기도 잘하더라, 평소에는 모른 척하더니!
사진제공. 넷플릭스
2025년 2월 12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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