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대본을 받고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 생각했어요.” 넷플릭스 <트렁크>에서 성장이 멈춘 듯한 남자 ‘한정원’ 역으로 돌아온 공유의 말이다. 그럼에도 선택한 이유는 20년 넘게 연기하다 보니 모든 사람에게 완벽한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스스로 궁금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에 참여할 용기가 생긴 까닭이다. <트렁크>가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여지가 있는 작품이라 흥미로웠다는 공유를 만났다. 어느덧 23년 차 연기자지만, 여전히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는 그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게 하는 힘은 ‘공유’라는 배우를 색안경 없이 바라보는 팬이다. 더불어 공유가 왜 이런 캐릭터를 선택했는지, 소수라도 이해해 주는 대중이야말로 그의 연기에 있어 유일한 숨통이라 하겠다. 인간 공지철(공유 본명)과 배우 공유의 간극을 최대한 줄이고 싶다는 그이다. 지금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그의 말을 들어본다.
완성본을 본 소감은.
극 중 인물들의 선택이 이해가 됐고, 작품의 의도에 맞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촬영과 영상 면에서는 편집 음악 등 후반 작업이 덧대어지니까, 굉장히 세련되어 잘 나왔다는 생각이다. 누군가에게는 정신없고 산만할 수 있지만, 내 기준에서는 세련된 편집과 음악이기 때문에 만족하고 있다.
버석하고 서늘하게 시작한 초반과 말랑말랑한 엔딩 사이의 톤앤 무드의 간극이 상당히 큰데, 결말에 대한 만족도는 어떤가.
감독님이 끝까지 고민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드라마가 지닌 전체적인 톤에 비하여 마지막에는 예쁘게 끝난다고 생각한다. 연출자의 판단과 선택의 영역이고, 드라마적인 약간의 미덕이 아닌가 한다. 진짜 개인적으로는 (웃음) 좀 더 드라이하게 끝나기를 바랐다.
초반 전 부인인 ‘서연’(정윤하)밖에 모르던 정원이 기간제 결혼을 통해 만난 아내 ‘노인지’(서현진)에게 마음이 넘어가는 과정이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는 시선도 있다. 물론 그 이유가 나중에는 다 밝혀지지만 말이다.
내 해석이 정답은 아닐 거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재미 포인트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든 드라마에서든 사랑 이야기는 대체로 밝거나 현실 판타지적으로 풀어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해서 현실에서는 보기 드문 캐릭터를 통해 대리만족을 주는 부분도 있고. 그런데 이 나이까지 살아보면서 보니, 사랑이 늘 행복하지만은 않더라. 연인 간의 관계에서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고, 서로 이해하는 데 있어 충돌하는 순간도 온다. 이런 실제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도 흥미롭겠다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다양한 카테고리의 한 면이 생겼다는 생각이다.
한정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감정선을 잡아나갔는지.
정확하게 대답하기 힘든데….어떤 캐릭터에 들어갈 때 ‘1 + 1 = 2’ 이렇게 수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추상적이라 이야기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 정원의 극단적이고 본질적인 아픔이 무엇일지 생각해 봤었다. 왜 사람마다 굳이 꺼내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감정이 있지 않나, 그런데 정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내 안의 이런 감정을 꺼냈어야 했다. 방황하고 말라비틀어진 것 같은 정원과 심연의 아픔에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마음 속 깊은 감정을 끄집어내는 데 있어 힘들지는 않았나.
스스로 불편하고 힘들 때도 있다. 캐릭터와 내가 한 인간으로서 덧대어지고 섞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정원에게 묻고 정원이 내게 묻기도 하고 또 당시는 느끼지 못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상처로 남았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건 배우의 숙명 같다는 생각이다.
당신이 생각한 정원은 어떤 인물인가.
정원은 어렸을 때 겪지 말아야 할 일을 겪으면서 보통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보았다. 정서적 데미지를 입고 그 이후로 정신적인 성장이 멈추어 버렸다고 하겠다. 그의 곁에 있는 뒤틀린 애정관을 지닌 ‘서연’으로부터 수동적이 되도록 긴 시간 가스라이팅 당해 왔기 때문에 그 안에 갇혀서 현상을 보지 못하는 인물이 되지 않았나 싶다.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다가 인지로부터 그 모멘트를 느끼게 되는 거지.
<괜찮아, 사랑이야> <우리들의 블루스> 등의 김규태 감독의 디렉팅은 어땠나.
감독님과 이번에 처음 작업했는데 디렉팅을 많이 주는 편이 아니시더라. 배우의 감정을 따라주고, 많은 부분을 열어두시는 분이었다. 애초에 대본에도 여백이 있는 편이었고, 촬영할 때도 윤곽만 잡아 놓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놀도록 해주셨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스타일이라서 편하게 작업했었다.
상대역인 서현진 배우와 호흡은 어땠는지. 서로 아이디어를 얻은 부분이 있다면.
꼭 한 번 같이 하고 싶던 배우였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지독할 정도로 치밀하고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깊더라. 어느 한 씬도 허투루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했다. 극 중 인지랑 정원은 닮은 구석이 있고, 약간의 거울치료 개념도 있다고 생각해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과연 인지가 바라보는 정원과 정원이 바라보는 인지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공감대가 극에 알게 모르게 녹아 들었다고 생각한다. 영감 아닌 영감 혹은 도움 아닌 도움을 받았다.
후반부로 갈수록 달달해지는데, 달달 버전과 버석 버전의 선호가 취향에 따라 확 갈리더라. (웃음)
나도 그렇지만 현진 씨도 오글거리는 걸 엄청 싫어한다. 드라마의 톤앤 매너가 어두운 편이라, 둘의 행복한 시간이 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하긴 했지만, 둘 다 연기하면서 힘들어하긴 했다. 20대 30대도 아니고 나이 먹으니까, 이런 달달 연기가 힘들더라. 나보다 현진 씨가 더 힘들어했다. (웃음)
인지와 정원 두 사람이 집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연극 같은 느낌도 든다. 연기적 재미가 컸을 것 같더라.
어떤 분이 둘이 나누는 대사가 불편하다 혹은 유치하다고 하는데 내가 느끼기엔 나름의 묘미가 있다. <트렁크> 대사가 마냥 동화적이기보다 약간 삐딱한 뉘앙스가 곳곳에 포진해 있는데 이를 표현하는 재미가 있다. 은유와 역설이라고 할지, 말랑한 작품에서는 나오기 힘든 대사, 무언가 포장하지 않은 날 것의 대사가 흥미로웠다.
궁금한 게 있다. 제작발표회때 전신 노출이 아니라고 고백했던 샤워씬이 나오긴 한 건가.
그게 편집돼서 너무 짧게 나왔더라! 제작발표회에서 한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또 2주 동안 다이어트한 결과물이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다. 찍을 때는 나름 여러 각도로 찍었는데 말이지. (웃음)
영화 <남과 여>(2015)나 이번 <트렁크>나 보기 드문 어른 멜로라는 생각이다.
멜로라는 장르 자체를 추구한 결괏값은 아니다. 내겐 작품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그 방향성이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생긴 개인적인 욕심이랄지, 아니면 개인적인 성취감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어릴 때 생각한 배우라는 직업에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이야기가 나를 터치해야 하고, 그 이유가 명확해야 한다. <남과 여>는 흥행적으로는 처참했지만, (웃음) 개인적으로 필모에 있어서 중요한 작품이다. 앞으로도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하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시대가 바뀌어도 작품은 남으니까, 지금은 흥행하지 못해도 훗날 기억되는 작품이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으로 필모를 채워 나가려 한다.
최근에 관심사가 있다면.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좋아한다. 실제 내 세계관이 그러하기도 하고. (웃음) 마냥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거든. <트렁크>에 결혼과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보면서 결혼은 꼭 해야 할까, 아이는 가져야 할까 등등 어렸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릴 때는 아주 젊은 아빠가 되고 싶기도 했는데 이제는 판타지였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선택권 없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 아이에게 이 세상이 보여줄 만한 세상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지만 동시에 보여주기 싫은 것 또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 많아서 그렇다. 이런 개똥철학을 하곤 한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특별 출연 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시즌2의 활약을 다들 기대하는데 살짝 힌트를 준다면.
시즌2에서 너무나 재미있게 놀다 왔다. 다른 역과 연관성이 적어서 내가 그리는 대로 연기할 수 있어 좋았고, 폐가 되지 말자는 마음으로 임했다. 캐릭터적으로 흥미로웠고 또 정재 선배랑 다시 만나서 무언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우연히 헬스장에서 만난 정재 형이 쓱 지나가면서 ‘잘 나왔어’ 이 말씀만 하시더라. 사실 시즌1 특별 출연은 말 그대로 특별 출연이었는데 이렇게 시즌2까지 이어질지 몰랐다. 황동혁 감독님과 사적으로 워낙 친한 편이라 그날도 술자리에서 ‘꽁, 해줄거지?’ 하시길래 ‘싫은데요, 바쁜데요’ 하면서 장난처럼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처음에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서 바로 죽는 역할을 달라고 하기도. (웃음) 감독님이 ‘꽁 잘 봐봐, 아무리 그래도 나는 정재 씨와 꽁의 투샷을 보고 싶어’ 하면서 A4 용지 한 장으로 시작된 인연이었다. 한국의 동네 게임을 외국 시청자가 어떻게 볼지 우려했고, 실제로 감독님께 ‘쉽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여튼 이렇게 잘 될 줄은 정말 몰랐었다!
어느덧 데뷔 23년 차다. 쉬지 않고 작품을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얼까.
배우를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 나이가 성숙도에 비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깎이고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면 단단해질 법한데 여전히 상처받고 힘듦이 있다. 그게 삶인 것 같다.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마음을 잡아 주는 힘은 나를 색안경없이 바라보는 팬들이다. 더불어 내가 어떤 작품을 했을 때, 왜 해당 캐릭터를 했는지 알 것 같다는 사람이 소수라도 있다면 연기를 계속할 힘이 된다. 유일한 숨통이라고 할지… (웃음) 사실 나는 되게 하찮은 인물이다. 인간 공지철(공유 본명)과 배우 공유의 간극을 최대한 줄이고 싶고 그렇게 일해 왔다. 직업이 배우이다 보니까, 또 캐릭터 때문에 약간의 판타지가 있을 수 있으나 토크쇼 같은 프로그램 등에서는 가감없이 드러내는 편이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2024년 12월 20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