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제주도의 한적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 <샤인>은 유일한 가족을 잃은 열여섯 소녀 ‘예선’(장해금)과 엄마에게 버려진 여섯 살 소녀 ‘새별’(송지온)을 통해 이별과 외로움, 돌봄과 치유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데뷔작 <들꽃>(2014)부터 다섯 번째 작품인 이번 <샤인>까지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과 누구나 가진 부재의 아픔을 투박하듯 섬세하게 그리며, 외로움과 이별의 주제를 매번 변주해온 감독이다. <샤인>의 시작부터 뜻하지 않았던 기적 같은 순간의 만남, 그리고 감독 내면의 외로움까지 그 이야기를 들어본다.
제목 ‘샤인’에 담긴 의미는.
원래 제목은 ‘어둠 속의 빛’이었는데 너무 설명적인 것 같더라. ‘새별’이가 등장하면서 영화가 반짝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우리가 ‘새별’을 오디션을 통해 발탁했다면, 지금같이 이 영화 자체를 축복이나 운명이라고 느끼지 못했을 거다. 같은 제목의 원체 유명한 영화가 있어 잠시 망설였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운명적이라고 느낀 건가. (웃음)
2022년 촬영할 당시 지온이가 여섯 살이었다. 촬영지가 제주도라 그 지역에 사는 지인에게 혹시 출연하기 적합한 아이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고 지나가는 말로 부탁했었다. 세팅이 다 끝나고, 촬영을 시작해야 할 즈음 지온이를 만나러 갔는데, 그때 우리가 한가지 간과한 점이 있더라. 지온이나 그 부모님이나 아역 배우를 하겠다 혹은 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분들이라는 점이었다. 혹시라도 우리가 그렸던 이미지와 맞지 않아 거절한다면, 거부당했다는 사실이 크게 상처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피디와 함께 약속 장소에 들어가기 전, 무조건 오케이하자고 마음먹은 상태로 지온이와 첫 대면했다. 막연하게 그렸던 새별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샤인>을 통해 아주 각별한 인연을 얻었다.
어떤 인연인가. 또 영화의 시작이나 만들게 된 계기는.
그 인연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와 맞닿아 있다. 어릴 때 집에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이 있었다. 수록된 시 중 ‘연필을 깎으며’라는 시가 있다 어린 나이에 수녀가 되어 마치 연필을 깎듯이 자존심을 깎고 욕심을 깎다 보니 자기는 하나도 남지 않은 것 같은 느낌에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지만, 중년이 된 지금은 행복하다는 내용의 시다. 이 시를 우연히 다시 보면서, 오래전부터 내 안에 성직자 혹은 구도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샤인>을 계기로 이해인 수녀님을 직접 뵙는데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이해인 수녀님과 인연이 닿다니, 좀 더 자세히 풀어놔 달라.
이 영화를 알리고자 엽서를 만들었고, 마침 부산에서 상영하게 되어 무작정 수녀회를 찾아갔었다. 입구에서 누구를 만나러 왔냐고 하길래 이해인 수녀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저쪽으로 돌아가라는 거다. 수녀회 내에 ‘해인글방’이라고 수녀님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더라. 마침 그 앞에서 수녀님과 마주쳤고, 처음에는 약속하지 않고 왔다고 뭐라 하셨지만, 곧 글방에서 차를 내주고 옛날 시집과 새로 출간된 시집 등 여러 권을 챙겨 주셨다. 처음에 못되게 굴어서 선물을 더 주신다며 개인 번호를 알려 주셨다. <샤인>에 다큐멘터리 <바람의 세월> 공동연출자인 문종택 감독(‘지성’ 아빠)이 잠깐 출연하는 걸 아시고는 당시에 기도를 많이 하셨다고, 친필 싸인과 함께 여러 책을 챙겨서 동백꽃이 그려진 보자기에 싸 주며 ‘조금의 위로라도 되겠지’ 하셨다.
‘예선’의 집도 그렇고, 제주의 가공되지 풍경을 고스란히 담았다. 편안한 기분이 든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제작진 중 누군가 예선의 집을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 집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서 제주에서 찍기로 마음먹었다. (웃음) 그곳이 북촌리인데, 알고 보니 제주 4·3 사건의 중심지였던 곳이더라.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 유족이기도 하다. 제주의 날씨, 공간, 기타 인연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북촌리 다시 말해 4·3의 공간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영화에 녹아든 외로움의 정서가 지금과는 다른 결이었을 것 같다. 북촌리라는 마을이 모든 인물들 <샤인> 속으로 온전하게 들어오게 해준 것 같은 느낌이다.
장해금 배우는 <재꽃> (2017)에서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아빠를 찾기 위해 시골 마을로 찾아온 ‘해별’을 연기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났다.
키가 170cm가 넘도록 훌쩍 컸더라. (웃음) <재꽃> 찍을 때 그의 청소년기를 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함께하는 배우는 나이에 상관없이 동료라고 생각하고, 그래서인지 영화 안에 그 성장의 시기를 남겨두고 싶다.
‘새별’과 함께한 장면들은 따로 각본을 주지 않고 촬영했다고.
새별만이 아니라 예선과 그 친구들 또 라파엘로 수녀(장선)에게도 구체적인 대사를 주지 않았다. 거의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배우의 자유도를 높였고 덕분에 내가 그린 것 이상의 좋은 장면들을 많이 찍을 수 있었다. 평소 내 시나리오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아서(웃음), 배우들과 함께 채워 나가는 걸 선호한다.
친구들과 수녀들의 관심과 보살핌이 예선을 둘러싼 외로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막에 틈을 벌렸다면, 새별의 등장은 그 막을 완전히 깨뜨린 느낌이다. 돌봄의 선순환이라고 할지, 인간은 돌봄을 받고 돌봄을 주면서 충만해지는 존재가 아닌가 한다.
돌봄의 순환! 듣고 보니 그렇다. 새별은 모두를 위로하거나 혹은 자기 안에 내재한 따뜻한 감정을 발견하고 발현하도록 하는 존재라 하겠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감정을 마주하게 하는 거지. 실제 현장에서도 그랬다. 새별이 등장하면 갑자기 따뜻한 햇살이 지나가는 듯한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 예선이가 라파엘라 수녀한테 전화 걸어 새별이가 뭘 좋아하는지 얘기하며 돌봐 달라고 하는데, 이건 스스로의 얘기일지도 모른다. 예선이 그동안 삼켜 온 ‘저 좀 돌봐주세요’ 라는 마음이 담겨있을 거다.
<샤인>을 관통하는 정서는 ‘외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은 나의 스승’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어느 부분이 그런가.
<샤인>을 찍으면서 내게 외로움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서 ‘나의 스승’이라고 답한 건데…(웃음) 외로움은 우리 마음을 갉아먹기도 하고 또 작은 아픔을 크게 과장하기도 해서 다소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외로움이 내 안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도 향할 수 있다는 걸 이번 작업을 통해서 알게 됐다. 마냥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외롭기 때문에 주변을 더 섬세하게 보게 되는 거지. 영화를 통해 거창하게 치유를 말하거나, 사람으로 인해 외롭지 않을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누군가 곁에 있어도 또 없어도 외로울 수 있고 그 외로움이 좀 더 자기를 또 타인을 보듬을 수 있지 않을지, 보여주고자 했다.
당신이 느끼는 외로움의 근원은 무얼까,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해 봤나.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인데… 거의 제로 학점으로 제적당한 후(서강대 국문과) 미국 유학을 갔었다. IMF 전이라 지금처럼 유학에 큰 비용이 들던 시절이 아니라서… 그런데 가서도 영어를 잘 못하고 하니 특별히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혼자 있는 시간엔 대부분 킴스비디오에서 예술 영화 비디오를 빌려다 보곤 했었다. 또 우리로 치면 시네마테크 같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며 보냈었다. 당시 <언더그라운드>(에밀 쿠스트리차, 1995)를 보고 나서,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레오 까락스 1991)을 처음 본 때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몇 시간을 걸어 다닌 기억이 생생하다. 구 유고 현대사를 보며 마침 IMF 위기를 겪던 우리 현실이 떠올랐던 것 같다. 대학도 몇 군데를 옮겨 다니면서, 마지막에는 콜롬비아대까지 갔지만 역시나 마치지 못했고. (웃음) 스물여섯 미국에 가서 마흔이 거의 다 되어 한국에 왔다. 이방인처럼 계속 떠돌다 보니, 외로움은 기본이 된 것 같다.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이미 촬영은 마쳤고 편집만 남겨둔 영화가 있다. 미국 유학 당시 같이 공부한 일본인 친구한테 얼마 전 모처럼 놀러 갔는데, 친구의 중3짜리 딸이 농구를 하더라. 그래서 그를 주인공으로 해서 소품 같은 영화를 한 편 찍었다. 겨울방학이 됐지만, 엄마는 아픈 할머니를 돌보러 가고 오빠와 아빠는 일을 나가는 바람에 집에 홀로 남은 소녀 이야기다. 그가 농구공 하나 들고 나가서, 한국에서 온 또래와 친해지는 과정을 담았다.
사진제공. 인디스토리
2024년 8월 8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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