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호불호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고, 부디 소울이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원작자이자 각본가인 조광진 작가 앞에 ‘감독’이라는 또 다른 타이틀이 생겼다. 번아웃된 K-직장인 ‘지아’를 주인공으로, 나를 찾는 이야기를 그린 <카브리올레>는 감독이 손수 각본을 쓰고 제작까지 참여한 작품. 비슷한 톤과 결의 영화를 따라가기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여정을 채색해 나간 반전 영화다. 예상을 깨는 스토리와 전개로 허를 찌른 조광진 감독을 만났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열심히, 낭만적으로 만든 작품이니 부디 관객이 즐겁게 보았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한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원작자로서 각본을 직접 집필한데 이어, <카브리올레>는 각본과 연출까지 도맡았다. 웹툰 작가로서 범상치 않은 행보인데 (웃음) 원래 영화에 관심이 컸나.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일반인 기준으로 치면 엄청 많이 본 편이다. <이태원 클라쓰> 촬영 당시 현장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단 두 줄의 지문을 몇 시간 동안 촬영하더라. 이렇게 찍은 영상을 엮어 드라마 한 편이 나오다니, 너무 멋진 작업 아닌가! 영화를 시작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을 몰랐다. 대학에 다닐지 아니면 현장 스탭으로 일해 볼지 여러 방법을 고려하던 중 주변 몇몇 분의 도움으로 직접 만들게 됐다. 스토리보드도, 메인 포스터도 직접 그렸다. (웃음)
emp] 연출해 보니 어떻든가.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을 것 같다.
웹툰 작가는 어시스턴트가 있다고 해도 작가가 주도하는 개인 작업이다. 그런데 <이태원 클라쓰> 의 각본을 쓰면서 영상 작업은 작가, 감독, 배우, 스탭이 어우러진 팀플레이라는 걸 알았고 이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이번엔 영화 찍는 게 마치 사업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여러 분야의 사람이 모이다 보니 누군가에게 어쩔 수 없이 부탁하고 매달리고 심지어 빌어야 하는 상황도 있고(웃음), 혼자 작업한다면 나오지 않을 실수도 생기고 하더라.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다 같이 나아가야 하는데 이 부분도 좀 어려웠던 것 같다. 운이 좋게도 스탭들이 초보 감독의 부족한 부분을 이해하고 잘 알려주셨다. 이번 경험으로 제작의 처음과 끝을 알게 됐고, 앞으로 그 과정에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제작자로도 참여했다. 도전에 대한 두려움과 흥행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원래 실패 이후를 잘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20대 때 신용불량자까지 돼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편이다. 솔직히 흥행은 아예 고민하지 않다가 최근에야 하게 됐다. 제작에 참여한 다른 분들이 모두 나 같은 마음은 아닐 테니까, 흥행을 도외시하는 게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생각이었더라. 또 여러분의 도움으로 만든 영화라 그분들께 빚졌다는 생각에 갚고 싶은 마음이 크다.
번아웃된 직장인 ‘지아’(금새록)의 일상 탈출로 시작되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꺼내든 계기 혹은 의도는.
글을 쓸 때 브레인스토밍하듯이 내가 하고 싶은 걸 키워드로 나열하고 시작한다. 그다음 대중성이 있는지, 아무도 다루지 않은 블루오션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인지 세 가지를 고려하는데 이번에는 이런 요소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카브리올레>는 한마디로 ‘자신을 찾는 이야기’로 번아웃, 시골, 오픈카라는 키워드로 시작했다.
회사를 다녀본 경험이 없는 입장에서 번아웃을 논하는 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친구들을 보면 모두가 사명감이 있지는 않고 어느 정도 루틴한 업무에 의욕이 떨어져 있다고 느꼈다. 한편으론 사명감이 큰 친구들은 그 사명감 때문에 오히려 힘들어하는 부분도 있더라. 나 역시 당시는 못 느꼈지만, ‘번아웃’이 찾아왔을 때가 있었다. 스무 살 때부터 서른 초반까지 쉴 새 없이 일했고, 항상 파이팅이 넘치는 편인데 어느 순간부터 의욕이 올라오지 않던 때가 있었다. 평소라면 쉽게 하던 일이 진척이 안 돼서 이게 뭐지 싶었던 시기가 있었다.
소진된 직장인 ‘지아’의 일탈 힐링 로드 무비를 예상했는데, 중·후반 노선을 확 틀어서 진짜 뜻밖이었다. 보편적인 힐링물이 아니라서 색다른 한편, 어떤 프레임에 맞추기보다 하고 싶은 걸 맘껏 했다는 인상이다.
지아는 번아웃을 맞기까지 정말 열심히 산 인물이다. 회사, 가족, 관계에 있어서 자기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지만, 이런 행위가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 친한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모든 걸 던지고 여행길에 나서지만, 이는 스스로에게 벗어나는 것이 아닌 오히려 가두는 행위라 하겠다. 그런 그녀가 시골에서 만난 ‘병재’(류경수)를 통해 비로소 살고 싶다는 감정을 자각하게 된다. 원래는 병재와 썸 아닌 썸 같은 관계로, (지아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구상했었다.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하고 싶은 걸 하고자 영화를 시작했는데 비슷한 이야기를 또 할 필요가 있을까 싶더라.
지아와 병재의 만남이 점점 폭력적으로 흐르는데, 전체적인 톤은 어둡고 무겁지 않은 게 특징적이다.
이야기, 정서, 톤의 아슬아슬한 밸런스를 맞췄다고 생각한다. 너무 무거웠다면 그 균형이 깨졌을 거다.
‘지아’ 역의 금새록, ‘병재’ 역의 류경수 배우가 몸 사리지 않는 연기를 보였는데,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
류경수 배우는 <이태원 클라쓰> 때부터 알고 있는 사이였다. 그렇지만 매우 떨리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건넸고, 금새록 배우는 전해 들은 이야기와 첫인상이 되게 ‘지아’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과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관계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배려 있는 분이더라. 보통 글 작업할 때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쓰는데 이번에는 두 분 다 캐릭터와 닮았다고 느꼈다.
등장하는 소품에 관한 질문 몇 가지 해보자. 오픈 스포츠카인 이유, 지아가 입은 순백의 원피스에 담긴 의도, 병재 집에 있는 드럼통에 크게 새겨진 대문자 J의 상징은.
오픈카로 개방감과 자유의 이미지를 표현하려 했다. 흰색 원피스는 지아가 하는 고생을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게끔 선택한 의상이다. 옷이 더러워지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지아에게 있어 해방의 여정일 수 있겠다. 드럼통에 쓰인 J의 의미는 ‘지아’의 앞 글자 영어 이니셜로, 지아의 몫이라는 의미다.
병재가 지아의 시점으로 내레이션 하는데, 왜 지아가 아닌 병재인 건가.
처음에 좀 불친절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내레이션을 준비했고, 지아 스스로 읽으면 다소 자아도취처럼 보일 수 있겠더라. 또 나중에 병재가 지아의 일기를 읽게 되기도 해서 병재를 내레이터로 삼았다.
중간 부분 지아가 이명을 겪는 장면을 흑백영상으로, 또 이때 대사를 음성이 아닌 자막으로 처리한 점이 인상 깊었다.
나 스스로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때때로 이명을 겪는다. 어릴 때는 큰일 난 줄 알았다. (웃음) 이명은 지아가 받는 스트레스를 잘 표현할 병식이라 생각했다. 무성 영화 같은 형식으로 간 건 이때 지아와 전 남친(강영석) 사이에 오가는 대사를 구구절절 말로 하려니 늘어지고 보기 힘들어 연출적인 변주가 필요했다. 흑백, 무성, 자막으로 처리하니 한결 낫더라.
첫 작품으로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2022)에 초청되어 관객과 만났다. 관객 반응은 어땠나.
처음 하는 극장 상영에 또 관객에게도 첫선을 보이는 거라, 정말 좋았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개봉까지 쉽지 않았다. 몇몇 곳에서 연락받기는 했는데 크게 와닿는 제안이 없었다. 개봉에 대해 마음 내려놓고 같이한 스탭들에게 연락하는 것도 미안해질 무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의 연락을 받았다. 국내 메이저 배급사가 먼저 연락하다니! 어벙벙하면서 계약서에 도장찍기까지 쫄리는 마음이었다. (웃음) 영화제에서 관객 반응은, 당시에 질문에 답하는 데만 집중해서 세세하기 살피지 못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호불호가 세게 갈리더라.
웹툰(만화) 작가는 언제부터 희망한 건가. 또 소재나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는지.
어릴 때부터 만화가가 꿈이었다. 멋있는 것, 재미있는 걸 보면 소름끼치지 않나. 나는 이런 소름을 TV에서 ‘슬램덩크’를 보고 처음 느꼈다. IMF 시기에 집이 망하면서 시골로 이사하게 됐는데, 당시 나라가 위기에 처한 것보다 당장 ‘슬램덩크’를 못 보는 게 더욱더 슬펐던 것 같다.(웃음) 만화를 통해 받은 이런 소름 끼치는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어, 웹툰 작가가 됐다. 만화와 드라마, 영화는 다른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이태원 클라쓰> 각본을 쓰면서 결국 같은 이야기구나 싶더라. 공사 현장, 호프집 알바, 물류센터 등 나이에 비해 꽤 많은 일을 했고 그러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했다. 20대 초반엔 정의롭고 좋은 사람의 정의가 명확했다면, 나이가 들수록 또 여러 계층을 만날수록 인간이라는 존재가 입체적으로 다가오더라. 그만큼 제가 때가 묻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과 경험을 작품에 녹여내고 있다.
웹툰도 그렇고 이번 <카브리올레>도 그렇고 말맛이 있다. 병재가 치는 ‘라이코스’ 아재개그는 음…
말로 내뱉을 때 어색한 문구가 있고, 아닌 것이 있기 때문에 꼭 직접 해보고 사용한다. 글을 따로 배운 게 아니라 여러 일을 하면서 성인 만화로 데뷔했었다. 성인만화가 주로 직설적이고 쌍스러운 표현이 많은데 한 관계자가 ‘작가님 글에는 길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 굉장한 칭찬으로 느껴졌었다. 아재개그는 자기만 즐거우면 된다, 하하! 아재가 돼 보니 알겠더라.
그간 <이태원 클라쓰> 등 거침없이 질주하는 청춘을 조명했는데, 나이 먹으면서 점차 기성세대와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혹시 들까.
크게 든다. 내 또래 세대에서 배우는 것도 많겠지만, 젊은 층과 교류하면서 얻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에 너무 갇혀만 있어서, 지금 하는 일을 마무리하면 젊은 친구들과 좀 더 친해 보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웃음 포인트를 모를 정도라 위기감을 느끼는 중이다. (웃음)
준비 중인 작품 소개를 부탁한다.
지금 웹툰은 연재 중이고, 드라마(영화)는 글 작업을 하고 있다. 야수 같은 여자와 엘리트 남자가 만나 떠나는 약간의 로드무비 같은 하드보일드 장르가 될 것 같다. 역마살이 있어서 주기적으로 떠나야 하는데, 회사를 차린 후 꼼짝 못 하고 있어서 그런지 길 위의 여정에 끌리는 것 같다.
사진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2024년 6월 21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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