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신선한 스토리와 접근으로 주목받은 <범죄의 여왕>(2015) 이후 이요섭 감독이 두 번째 작품 <설계자>로 관객을 찾았다. 홍콩 영화 <엑시던트>를 원작으로 한 <설계자>는 청부 살인을 완벽하게 사고로 조작하는 ‘영일’(강동원)을 주축으로 삼광보안팀이 설계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 “모든 인물은 이면을 지니고 있고, 극을 따라가며 감춰진 이면을 찾기 바랐다”는 이요섭 감독을 만났다. 곱씹으면서 찾아가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스포일러를 잔뜩 포함하고 있습니다!)
2016년에 개봉한 <범죄의 여왕> 이후 오랜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규모가 많이 커졌고 상업영화로는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글작업부터 개봉한 지금까지 소회가 남다르겠다.
우선, 친구들이 <범죄의 여왕> 때보다 상영하는 극장이 많아 예매하기 편하다고 하더라. (웃음) 자본의 사이즈와 배우 덕분에 케파가 커져 스크린을 많이 확보했고,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이 보게 되니 냉철한 평가를 받을 기회일 듯하다. 이전에는 ‘힘든 데 고생했다’며 우쭈쭈해준 면도 있다고 생각하거든. 규모가 커지며 제일 달라진 점은 씬 마다 쏟아부을 수 있는 비용 역시 커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강우기를 동원해서 비를 뿌릴 수 있더라! 이전에는 조명이 많이 필요한 밤 촬영조차 꺼렸을 정도인데 이번에는 넓은 공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다.
물음표가 많은 작품이더라. 하나씩 궁금증을 풀어가 보자. 주인공 ‘영일’(강동원)은 의뢰받은 살인을 사고로 위장해 처리하는 설계팀 ‘삼광보안’의 리더로 매우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그가 사업 파트너였던 ‘짝눈’(이종석)에게만은 비논리적으로 행동하고 심지어 집착하는 모습이다. 영일의 감정은 무엇일까.
영일에게 짝눈은 자기와 가장 닮은 사람이었을 거다. 익명의 두 사람이 한집에서 사는데 그중 한 명이 떠나겠다고 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붙잡고 싶지 않을까. 영일은 스스로를 무너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소통과 관계 맺음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삼광보안을 유지하며 자기 약점을 보완할 인물이 짝눈이었을 거다. 짝눈이 사라진 후에는 남은 팀원들에게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한다고 할지, 설계하는 더 큰 조직이 있다고 주입한다. 청소부의 존재를 끊임없이 어필하는 거지. 사실 영일은 청소부를 직접 보거나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 존재에 대한 믿음이 점점 강화되는 건 (짝눈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거다.
횡단보도에서 사고사한 ‘짝눈’ 죽음의 진실은. 영일의 행위인가 아니면 청소부에 의해서인가.
엔딩크레딧을 보면 알 수 있다. 캐릭터가 소개되면서 체스 말이 움직이는데, 여기에 설계에 의한 죽음인지 사고사인지 그 죽음의 정보가 담겨있다. 짝눈의 경우, 체스 말이 나오지 않는다! 관대한 관객이라면 곱씹으며 찾아가는 재미가 있을 거다. 인물들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말이다.
극 중에는 세 종류의 죽음, 즉 사고에 의한 죽음, 영일의 설계에 의한 죽음 그리고 청소부에 의한 죽음이 등장한다. ‘베트남전에서 마약에 중독됐다’는 전사가 있는 ‘재키’(이미숙)의 경우 어느 쪽인가. 정말 영일을 배신한 건가. 아니면 단순히 치매 같이 때때로 착란에 빠지는 건가.
삼광보안팀 구성원이 말하는 과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일종의 과시일 수도 연막일 수도 있을 거다. 재키는 과거에 머무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을 멤버를 넣고 싶다는 의도에서 출발한 캐릭터다. 여성이라 성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점도 좋았고, 또 그의 나이는 약간은 물음표라 하겠다. 재키가 하는 말 중 ‘젊을 때는 지옥에서도 행복하다’는 말이 있는데, 캐릭터를 잘 함축한 대사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사실 자세히 보면 재키는 죽지 않았다. (웃음)
영일과 재키 모두 청소부에 의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청소부가 볼 때 영일은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위험한 인물이라면, 재키는 그렇지 않아 굳이 제거하지 않은 거다. 다시 말해 재키는 물리적인 죽음은 아니지만,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일종의 사회적 죽음을 맞았다고 생각한다.
의뢰인 ‘주영선’(정은채)의 죽음도 미스터리하다. 영일이든 청소부든 누군가 살인을 사주한 집단(인물)이 있을 것 아닌가. 자살할 캐릭터는 아닌 것 같은데…
주영선은 엔딩 크레딧에 나오지 않는다. (웃음) 이 캐릭터는 자기 엄마와 병치된 캐릭터라 하겠다. 정치인 아빠의 비자금 문제가 불거지며 엄마가 얼마나 미디어에 의해 노출되고 괴로웠는지 옆에서 지켜봤고, 엄마가 죽은 지금 자신이 다음 타깃이 될 거로 생각한 거지. 이기적인 아버지는 사퇴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설계를 의뢰했으나 의외로 사퇴했고 또 딸을 위해 보험금을 마련해 놓기까지 했다. 이런 예기치 않은 상황에 맞닥뜨리며 살인청부한 걸 후회하지만, 대가는 지불해야 하니 ‘월천’(이현욱)에게 돈을 준 거다. 미디어는 여전히 그를 쫓아다니고, 결국 그의 죽음은 자살과 살인의 경계랄지, 일종의 사회적 타살이라고 생각한다.
‘월천’ 캐릭터는 원작인 홍콩 영화 <엑시던트>(2009)에서는 여성인데, 이를 여성이 되고 싶은 남자로 변주했다.
월천 캐릭터를 고민할 당시 마침 태국을 방문했는데 화장을 짙게 한 남성분이 접객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고, 자기로서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한편으론 좋았었다. 이런 분들이 한국에도 존재할 텐데 국내에서는 어떻게 사는지, 문득 생각이 들더라. 누군가는 당당하게 자기를 드러내는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모습을 숨기고 살아갈 거다. 이런 생각에 월천의 성별을 바꾸었고, 그에게 삼광보안은 여성 분장이 자유로운 가장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가 될 거로 생각했다. 육상 선수였던 그는 풀메이크업을 하고 경기에 나가서 퇴출당한 경험이 있는데, 사실 풀메이크업을 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나.
이현욱 배우가 여장이 잘 어울려서 의외였다.
눈빛이든 목소리든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배우를 찾았다.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가 방영될 즈음, 이 배우가 나온 유튜브 영상을 봤는데 굉장히 해사한 청년인 거다. 보면서 ‘월천이다!’ 했다. 만나보니 과연 굉장히 세심하고 연기 역시 매우 디테일하게 하는 배우더라.
형사 ‘양경진’(김신론)은 극 중 가장 이질적인 톤을 보인다. 다른 인물들은 모호한데, 그만이 선명하게 청소부라는 걸 가리킨다고 할지.
원작에 없는 캐릭터로 이 세계관에 청소부가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캐릭터다. 시스템에 속한 혹은 거대 조직의 톱니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형사라는 직업 특성상 가장 외부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며 영일과는 다른 시선으로 일을 처리하는 인물이다. 한편으로는 ‘주영선’과 ‘이치현’(이무생)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후반부에 영일의 자백을 듣고도 ‘증거’가 필요하다며 그냥 돌려보내지 않나. 공무원 같은 느낌이 나길 바랐다.
두번째 작품까지 공백이 길었다. 시나리오 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막상 글을 쓸 때는 오래 걸린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석 달에 한 번 마감하는 방식으로 썼다. 원작을 받고 조금 더 선명하고 장르적인 쾌감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원했지만, 그 매력이 잘 나오지 않더라. 1년 반 동안 쓴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봤다. 원작의 틀로 그 매력을 현대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모든 인물은 이면을 지니고 있고, 극을 따라가며 감춰진 이면을 찾기를 바랐다.
아내 전고운 감독은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 LTNS >를 영화 <윤희에게>의 임대형 감독과 공동 연출했는데, 앞으로 두 분이 함께 작품을 만들 계획은 없는지.
이번 <설계자>의 각본을 쓰면서, ‘나 혼자 쓰는 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지금 준비 중인 작품이 시리즈라 분량이 많아서 각색자로 공동작업 하려 한다. 전 감독은 내가 제일 믿는 작가이자 또 나를 제일 잘 아는 작가다. 우리나라에서 인상적인 캐릭터와 화두를 가장 잘 꺼내는 작가인데, 마침 우리 집에 있는 거다! 친구들도 부러워한다. (웃음)
준비 중인 시리즈는 무슨 내용인가.
네이버 웹툰 원작(‘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으로 좀비 치료제가 나온 이후의 세상 이야기다.
유튜브, 숏츠 등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 선호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이러한 도파민 중독의 시대를 창작자로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접근하는지.
일단 나 역시 도파민 중독자 같다. (웃음) < LTNS > 공개 당시 해당 러닝타임보다 빨리 후기가 올라오는데, 그게 요즘 세대의 콘텐츠 소비 방식 같더라. 82년생(이요섭 감독은 82년생)은 좀 이상한 세대 같은 게, 앞뒤로 끼인 세대라 할지 그런 지점이 있다. 가령 전주와 간주가 없어진 요즘 노래, 대체로 2분 3초 안팎인 노래를 들으면 화가 난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전주와 간주가 있는 노래도 또 이 부분이 없는 노래도 모두 좋아하거든. 이렇게 구세대와 요즘 세대가 모두 소비자인 현실에서 덕후, 다시 말해 좋아하는 것에 진심일수록 콘텐츠 소비자에게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취향에 관해 많이 고민한다. 어릴 때는 내 취향을 감추고 싶었다면 지금은 솔직하게 글과 작업을 통해 제안하려 한다.
사진제공. NEW
2024년 6월 11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