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영화 <조용한 가족>(1998)과 <반칙왕>(2000)으로 신선한 당혹감을 안기며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물꼬를 텄던 김지운 감독과 송강호가 다시 한번 의기투합해 낯섦과 생경한 세계로 관객을 인도한다. 이들의 다섯 번째 협업 <거미집>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다 찍은 영화의 결말을 재촬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 감독’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본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를 장르와 색깔을 달리해 투트랙으로 그려내며 곱씹는 재미를 선사하는 독특한 블랙 코미디다. 모든 예술가의 웃픈 자회상 같은 ‘김 감독’으로 분해 캐릭터에 빙의한 듯, 숨겨 놓은 새 얼굴을 꺼내 들며 인생 캐릭터를 갱신한 송강호를 만났다. 성취의 문제가 아닌,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향한 발자취를 남기려 노력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극 중 ‘김열’ 김 감독은 결말만 바꾸면 걸작이 된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재촬영을 강행한다. 그간 연기하면서 배우로서, ‘이 부분만 바꾸면 내 역작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한 작품이 있는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면. (웃음)
그런 작품은 없었다. 내 능력의 한계를 아니까 (웃음) 주어진 여건하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의자에 앉아 ‘레디 액션!’을 외치는 김 감독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고 잘 어울리더라. 기분이 어땠나.
처음엔 좋을 줄 알았고, 좋기도 했는데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지켜보면서 나도 그 속에 들어가 연기하고 싶더라. (알다시피)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이 흑백영화지 않나. 지금의 정서와는 괴리가 크지만, 고전적인 품격과 매력이 있어서 실제로 해보고 싶었다.
요사이 감독 출사표를 낸 배우가 여럿이다. 직접 연출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능력과 재능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생각이다. 감독 데뷔하는 동료들을 보면 되게 부럽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연기하는 것만도 벅차다. 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밀정>(2015) 이후 김지운 감독과 오랜만에 다시 작업했다.
25년간 다섯 편을 했는데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김지운 감독님은 뭐랄까 항상 설레게 만드는 게 있다. ‘영화 여행’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이번은 기차를 탈까 혹은 걸어가나 등등, 어떻게 변주해서 또 어떤 새로운 장르를 만들지 약간은 두렵기도 하고 기대하게 된다.
<거미집>은 김지운 감독과 당신이 함께 찍은 초기작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이 연상되는 독특한 코미디다.
그렇지 않아도 감독님과 전작들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었다. 배우들끼리도 그 당시 촬영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얘기했었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을 비롯해 <공동경비구역 JSA>(2000)와 <살인의 추억>(2003)까지, 약 25년 전부터 20년 시기의 영화들과 비슷한 느낌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리듬감과 인물들이 누구 하나 자기 개성과 컬러를 잃지 않으면서 유기적으로 잘 엮여 있는 점이 흡사하다. 특히 <거미집>은 <조용한 가족>은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코믹과 서스펜스, 긴장이 뒤엉켜 있는 점이 닮았다.
낯설다는 평이 꽤 있다. 대중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늘 봐온 영화의 컬러나 리듬과 달리 낯설 수도 있지만, 바로 이 점이 <거미집> 특유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고유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매력을 극대화해 관객과 소통할지 고민이었다. 이건 감독님 이하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대중성은… 사실 김지운 감독과 처음 작업한 <조용한 가족> 때는 더 했었다. ‘이런 건 찍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 분이 있었을 정도였다. 사실 집에 들어오는 사람을 한 명씩 모두 죽여버린다는 상황이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럼에도 관객이 반응해 줬다. 당시는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봉오리가 맺혔던 시기로 관객이 30만 명만 넘으면 대박이라고 할 때였다. 그런데 서울에서만 38만 명이 들었다. 이는 관객이 늘 새로운 걸 원한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거미집>에 대한 선입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부정적인 선입견과 낯섦을 거둬낸다면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될 거다. 생경하고 생소할 수 있는 부분이 영화의 힘이자 에너지로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관객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누군가 <거미집>을 ‘늘 봐 왔던 영화의 소재나 방식이 아닌, 신선하고 영화적인 느낌이 강하다’고 소개했더라. 반가웠고 나 역시 이런 점에 끌렸었다. 영화를 찍다 보면 무언가 예상이 되고 그 형식도 익숙한 것들이 많다. 흔히 식상하다는 건데, 팬데믹을 거치면서 (대중의) 영화에 대한 관점과 태도가 변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콘텐츠가 다양한 채널을 통해 너무나 쉽게 대중에 다가가고 있는 현실에서 <거미집>은 영화만의 이야기라 반가웠다. ‘큰 스크린을 통해 관객과 서로 호흡하는 것’, 다시 말해 ‘영화’ 이야기를 색다르게 풀어내서 좋았다. 관객이 ‘이게 영화지!’라고 생각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극찬이 될 것 같다.
우문을 던져 본다. 좋은 평가를 얻는 작품과 흥행에 성공한 영화, 즉 작품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선택의 우선 기준이 있다면.
어떤 작품이 흥행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웃음) <거미집> 같은 새로운 호흡과 리듬을 가진 영화에 출연한 건, 대중은 한국영화가 정체가 아닌 앞으로 나아가길 원한다고 생각해서다. 흥행은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다. 진취적이고 모험적인 태도로 영화를 대하는 것, 그게 배우의 나아갈 방향이 아닌가 한다.
지금과 비교하면 열악한 작업 환경과 촬영 기기, 무리한 스케줄 등 60~70년대 충무로 영화 현장을 엿본 기분이다. ‘아 당시에는 저랬겠구나’ 하고 끄덕끄덕하게 되기도. 이 모든 사달의 중점에 있는 김 감독을 연기하며 신경 쓴 부분은.
외양과 연기 스타일을 고민하기보다 <거미집>이라는 영화 자체를 어떻게 유기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고민했었다. 영화에서 설명이 안 되거나 생략되는 상황을 잘 엮어서 리듬감 있게 전하는 데 사활을 걸었던 것 같다.
故 김기영 감독의 유족이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걸었지만, 다행히 잘 해결됐다. <거미집> 속 김 감독은 당시의 영화인, 나아가 모든 예술인의 웃픈 초상이라는 생각이다.
잘 해결돼서 다행이다. <거미집>은 특정한 감독과 그 현장을 모티브로 삼은 게 아니고, 70년대 초를 살았던 많은 한국영화 선배와 거장을 오마주하는 데서 출발했다. 당시 한국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의 열정과 검열 등과 같은 엄혹한 사회상, 열악한 작업 환경 등 한국영화 시스템을 향한 웃픈 헌사라 하겠다. 당시에 영화를 찍은 선배님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영화를 찍었는지, 오직 영화를 향한 열망으로 그렇게 했다는 게 정말 숭고하고 순수하지 않나! 예술혼을 불태운 열정의 집합체가 아닌가 한다. 얼마 전에 유현목 감독님의 <오발탄>(1960)을 우연히 다시 봤는데, 당시에 이런 영화를 찍었다는 데 새삼 감탄했었다.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시초 같은 작품이고, 기술적으로는 떨어져도 수많은 한국 영화의 자양분이 됐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김 감독 같은 감독을 만난다면? 그러니까 감독이 다 찍어 놓은 영화의 결말을 다시 찍자고 부른다면, 배우로서 어떨까.
기꺼이 참여한다! (당신이) 김 감독은 영화인 나아가 예술인의 자화상 같다고 한 것처럼 그는 특정 인물이라기보다 자기 연민, 열등감, 자신감과 자괴감 등을 지닌 모든 예술가를 대변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상하기보다 공감이 가는 사람이다. 결말에서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이 상영되고 엔딩 크레딧을 지켜보는 김 감독의 얼굴을 보면 만족감인지 아쉬움인지 그 감정을 읽기가 힘들다. 내가 연기했지만,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만족감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보니 아쉬움 같기도 하더라.
연기하면서 자괴감에 빠진 적이 당연히 있을 것 같다. (웃음) 어떻게 극복하나.
그럼!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 해도 나만이 느끼는 열등감과 자괴감이 없을 수 없다. 때론 반대로 ‘나 왜 이렇게 잘하지’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웃음) 김 감독과 마찬가지다. 극복의 방법은, 결국 내부에서 시작되더라. 자의식이라는 게 외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본질적으로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내면 의식이 변해야 해결되는 것 같다.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결말이 충격적이다. 김 감독으로서 해석한다면.
<거미집>의 외피는 김 감독이 검열을 피해 몰래 새로운 결말을 찍으면서 벌어지는 과정을 그린 소동극과 같다. 이 모든 사건과 사고의 시작은 김 감독의 크고 작은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사실 잘 보면 등장인물 모두가 욕망을 지니고 있고, 이게 영화 속 영화의 캐릭터와 맞물린다. 결국 욕망의 카르텔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고 할까. 김 감독의 적폐이든, 영화 속 영화에 등장한 집안의 적폐이든 혹은 인간 본연이 가진 허황된 욕망의 적폐이든 김 감독식 결말이 아닐까 한다. 해석은 관객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듯하다.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석이 된 집행위원장을 대신해 호스트로 나서서 국내외 귀빈을 맞이한다고.
<거미집> 상영과 무대 인사가 있어서 어차피 내려가는 김에 이틀 먼저 가서 영화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했다. 국내외 선후배, 해외 게스트들이 반가워한다면 (웃음) 작은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에서다. 내년부터는 정상적으로 운영될 거로 생각한다.
부산영화제도 그렇고 선배로서 영화계 발전을 위한 어떤 책무감도 있을 것 같다.
책무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영화를 선택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번 영화는 ‘한 번 천만을 넘겨봐야지’ 이런 게 아니라 ‘이번 작품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후배들이 송강호 선배가 이런 걸 하네?’ 하는 작품을 하려고 한다.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가는 모습, 그게 실패든 성공이든 그 결과를 떠나서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비추는 게 선배의 태도인 것 같다. 양적이든 질적이든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길에 발자취를 남기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연기 인생 처음으로 드라마 <삼식이 삼촌>을 작업한 것도 새로움을 향한 움직임의 한 걸음이겠다. <거미집>의 각본을 담당한 신연식 감독이 연출과 극본을 맡은 드라마다. 또 개봉예정인 스포츠 영화 <1승>에서도 감독과 배우로 함께했다. 서로 신뢰감이 두터운 것 같다.
신연식 감독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임에도 누구도 주시하지 않을 때 영화적인 시선, 그러니까 드라마적 시선을 들이대는 사람이다. 작가로서 훌륭한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감독도 나도 처음이라 두려웠는데 후배들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많이 배웠다. 하루에 촬영할 분량이 많고, 따라서 집중력을 더욱더 요구하는 현장이더라. 좋은 후배들 덕분에 많은 걸 배운 작업이었다.
마지막 질문이다. 의례적으로 대두되던 한국영화 위기론이 이제는 정말 ‘현실’이라는 생각이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으로서 해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수많은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이를 볼 채널 역시 다각화되면서 영화라는 입지가 상대적으로 협소해졌다고 생각한다. 새롭고 파격적이면서 도발적인, 영화만의 매력이 살아있는 영화를 만든다면 관객의 발걸음을 다시 극장으로 향하게 할 거로 생각한다. ‘역시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맛이지!’ 하면서, 부흥의 시기가 다시 올 거다. 양적인 팽창도 필요하지만, 질적으로 업그레이드된다면 관객에게 분명히 어필할 것이라 생각한다.
사진제공. 바른손이앤에이
2023년 9월 22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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