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창작 뮤지컬로 한 획을 그은 ‘영웅’이 윤제균 감독의 손에 영화로 재탄생했다. 뮤지컬의 확고부동한 ‘안중근’ 정성화가 캐릭터를 그대로 이어가고, 가슴 울리는 넘버들이 스크린에 재현됐다. 어느새 객석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는 영화 <영웅>, 그 눈물은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솔로에서 비롯된다. 아들을 형장의 이슬로 보낸 어머니로 분한 나문희 선생을 만났다.
“영화 <하모니> 때 감독님이 대접을 잘해줬어요.”(웃음) 나문희 선생과 윤제균 감독과의 인연은 감독이 제작한 영화 <하모니>(2010)로 거슬러 간다. 이때 서로 신뢰를 쌓았고, 뮤지컬이라는 쉽지 않은 장르에 도전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조마리아 여사에 대해서는 남들만큼 알고 있었어요. 안중근 의사만큼이나 존경스러운 분이죠. 자식을 형장의 이슬로 보낸다는 게 말이 그렇지, 정말 어렵고 힘든 결정이잖아요. 그 심정이 차마 실감나지 않아서 쉽진 않았지만, 연기로 표현하고자 노력했어요. 아들을 보낸 후의 삶이 어땠을지 상상하면 지금도 먹먹합니다.” 실존 인물이라는 무게감과 부모로서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아픔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에서 고민했지만, ‘연기자는 시키면 한다’는 평소의 생각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 노래는 음악을 전공한 첫째 딸에게 레슨받으며 익혔다.
“갠 좀 잔인해요. 그래서 좋은 면도 있긴 한데…” 딸과의 레슨이 어땠냐는 질문에 웃으며 답하는 선생이다. 하지만 직설적인 딸도 <영웅>을 보며 눈물을 쏟았단다.
사실 나문희 선생은 음악과 관련이 깊고 조예도 깊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선생은 MBC 라디오(당시 문화방송) 1기 공채 성우로 데뷔했다. 입사 직후 가난한 시절에 기간제로 고전 음악 디제이로 일한 적이 있다고. 당시 책을 읽고 음악을 틀며 관련 공부를 많이 한 덕분에 지금까지도 든든한 문화적 자산이 됐다. 두 딸 역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전공한 까닭에 음악과 밀접한 생활을 지속했고, 지금도 고전 음악 감상을 즐기고 있다.
“촬영할 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어려웠지만, 결과물을 보면 뿌듯하고요. 아, 그런데 서대문 형무소 장면은 감독이 미울 정도로 힘들었는데 편집됐더군요!” (웃음) 노래를 라이브로 그것도 주어진 시간 내에 소화했고, 테이크를 여러 번 간 장면도 많아 쉽지 않았던 현장이었다는 후문.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는 프로다운 답변이다.
“고약하죠. 하늘에서 우리를 많이 도와줄 거라는 생각이에요.” 2017년 각종 영화제를 휩쓴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일제 만행을 폭로한 위안부에 이어 <영웅>의 조마리아 여사까지 선생은 당시의 엄혹한 시대적 상황을 ‘고약’하다는 점잖은 단어로 함축한다.
“연출자로 제작자로 아주 훌륭한 감독이에요. 남자답고 작품도 잘 보죠. 캐스팅도 잘하고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어요. 좋아합니다. (웃음)” 윤제균 감독이 다시 뮤지컬을 제안한다면 또 한 번 도전하겠다는 선생이다.
20세에 데뷔해 인생의 대부분을 연기자로 보내며 자녀를 키운 선생은 어떻게 보면 일과 육아를 양립한 워킹 맘의 원조라 할 만하다. 엄마로 할머니로 수많은 작품을 통해 진솔한 삶의 얼굴과 코믹한 모습을 선보여 온, 팔색조 같은 배우. 그의 연기 원동력은 뭘까.
“좋아하니까요. 연기 자체는 힘들 때도 있고 전날에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죠, 일단 현장에 가면 너무 신이 나요! 아직 철이 덜 들어서일까요 (웃음) 이런 감정들이 모여 계속 연기하게 되는 것 같네요.”
음식물 쓰레기는 손수 버린다, 가족이 먹고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데 남의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아서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는 걸 즐기고, 하루에 한 번은 햇볕을 쬐고 집에서 자전거 등을 타고 스트레칭을 꾸준히 한다. 쇼핑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중목욕탕은 타인의 시선에 부담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평범한 일상을 사는 편이 배우 나문희의 연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하다못해 된장찌개를 직접 끓일 수 있는 것과 그냥 연기하는 건 차이가 나니까요. 할 수 있는 일상을 영위하려고 합니다.”
“배우는 평소 제대로, 잘 살아야 해요. 평소 모습이 연기에 다 묻어나니까요. 악역을 하면서도 환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악하게 됐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편이에요. 저를 통해서 그 인물이 창조되는 것이니 생활에서 뭐 하나를 해도 바르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관찰을 잘해야 해요.” 선생이 생각하는 배우가 갖춰야 할 자질이다.
“어느 나이까지는 내키지 않아도 참고 연기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네요. 어떤 구석이든지 매력이 느껴져야 마음이 움직입니다.” 현실적으로 공감이 가고, 작품만의 개성 즉 독창성이 있을 것. 선생의 작품 선택 기준이다.
선생은 지난해 가을부터 틱톡(동영상 숏폼 플랫폼)을 시작했다. “매니저의 권유로 시작했는데 막상 해보니 재밌어요. 뭐라도 움직일 수 있고, 젊은 세대의 감각을 익힐 수 있어 도움이 돼요.” 이뿐만 아니라 지난해 초에는 ‘진격의 할매’라는 예능에 참여하는 등 장르불문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이다.
그간 맡은 수많은 역할 중 가장 애정 하는 캐릭터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호박고구마’이고, 인생의 많은 부분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랐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열등감에서부터 자유롭게 해준 값진 영화다.
“호박고구마는 재미있잖아요. 희극적이고 코믹한 캐릭터라 좋아요. <아이 캔 스피크> 전까지는 어느 정도 열등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영화로 상을 많이 타고 나니 오히려 여한이 없어졌다고 할까요. 누구와 경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이 자유로워졌어요. 예전에 큰 스님께서 부처님은 항상 제 옆에 계신다고 했어요. 그래서 작은 일이라도 바르게 하려고 노력하고, 이런 자세가 이제는 몸에 밴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하겠냐는 질문에 “배우는 그만이요. 사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고 우울증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요.” 불교도는 괴로움으로 가득 찬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인 해탈과 열반을 추구한다. 선생의 깊은 불심이 감지되는 말씀이다.
사진제공. CJ ENM
2023년 1월 17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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