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금용 기자]
<영웅>이 지난 12월 21일(수) 개봉했다. <국제시장>(2014)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연출작인 데다 지난 2년간 코로나로 개봉이 여러 차례 미뤄진 만큼 감회가 남다르겠다.
쉽게 말해 영화는 감독에게 자식 같은 존재다. 영화가 개봉한다는 건 자식을 결혼시키는 일에 비유할 수 있겠다. 결혼식 전날까지 온갖 만감이 교차하다가 막상 결혼식 당일에는 혼이 쏙 빠질 만큼 정신 없지 않나. 영화도 마찬가지다. 개봉 전까지는 엄청 떨렸는데 개봉 직후엔 무대 인사하고 인터뷰하느라 정신이 없다. (웃음) 개봉 당일 빡빡한 일정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데 오히려 덤덤해지더라. 부모가 ‘우리 애가 잘 살아야할 텐데’ 기도하는 것처럼 그저 나도 내 자식같은 <영웅>이 관객에게 많은 사랑을 받길 바랄뿐이다.
국내 첫 뮤지컬 장르, 거기에 위인을 소재로 한 시대극이다. 여러모로 위험 부담이 커 보이는데.
작품을 하면서 두 가지 부담이 있었다. 하나는 국내 최초 뮤지컬 영화인 만큼 더 잘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 <레미제라블>(2012)이나 <라라랜드>(2016)처럼 세계 시장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컸고, 워낙 인기 있는 뮤지컬이 원작이니 거기에 대한 조심스러움도 없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다룬다는 것 역시 부담으로 작용했다. 조심스럽게 다뤄야하는 소재이지 않나. 조금이라도 내용적으로 잘못되면 비난이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고증을 위해 공부를 많이 했다. (웃음)
뮤지컬을 영화에 맞게 각색하면서 설정상의 변화와 추가된 시퀀스가 있다고.
요즘처럼 K 콘텐츠가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때가 없었다. 당연히 <영웅>도 국내 관객뿐만 아니라 해외 관객까지 염두에 둬야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야 어느 정도 역사적 흐름을 알고 있지만 외국인들 입장에선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겠나. 그래서 영화를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대결 구도로 끌고 가는 대신, 모자의 사랑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감정에 주안을 뒀다. 만약 전자가 영화의 주제라면 클라이맥스는 안중근의 저격 장면이 될 거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죽고 나서도 영화가 30분 넘게 지속된다. (웃음) 중요한 건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비애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인종이더라도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웃음)
이밖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건 다들 아는데,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잘 없더라. 대한제국의병군 참모로서 국내 진공 작전을 두 번이나 이끌었는데 말이다. 특히 회령 전투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더라. 그래서 꼭 영화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국내에서도 뮤지컬 영화 제작이 처음이다 보니 배우들은 물론 제작진에게도 큰 도전이었을 텐데.
사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음향팀과 같이 작업하고 싶었는데 그쪽 팀 스케줄 문제로 불발됐다. 대신 음향팀 헤드들과 화상 인터뷰로 많은 조언을 얻었다. 우리끼리 하려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이 거쳤고 거기다 라이브 녹음까지 진행하느라 열 배는 더 힘들었던 거 같다. (웃음) 배우들도 고생이었지만 제작진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한겨울에 촬영하는데 옷 소리가 녹음에 들어갈까 봐 두꺼운 옷도 못 입었고 신발 소리 때문에 세트장 바닥에 전부 담요를 깔고 얇은 덧신을 신고 다녔다. 단지 동맹 장면이나 ‘설희’가 죽는 장면에선 강풍기를 동원했는데, 또 바람 소리가 음향이랑 맞물리는 게 아니겠나. 세트장 밖에 강풍기를 설치하고 지름이 50cm 되는 호스를 연결해서 촬영했다. 숲에서 촬영하는 신에선 벌레 소리 때문에 광범위로 방역도 하고. (웃음) 후반 작업도 고생의 연속이었다. 모든 장면에서 배우들이 차고 있는 인이어와 마이크를 지워야 했으니까. 제작진들, 특히 특수효과 팀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라이브를 고집한 이유는 뭔가.
<레미제라블>의 경우 넘버의 90% 이상 라이브로 진행됐다. 이게 가능했던 건 영화 대부분이 세트장에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사실 세트에서 녹음하면 환경이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장면을 세트장을 만들어 촬영하려면 제작비가 두 배가 든다. (웃음)
정성화 배우가 뮤지컬 영화에선 노래보다 감정, 연기가 중요하다더라. 해외 뮤지컬 영화의 경우 노래 실력을 우선으로 두고 캐스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작품엔 기성 배우들 위주여서 놀랐다.
영화를 기획하면서부터 뮤지컬 <영웅>을 본 관객들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큰 목표가 있었다. 영화가 조금만 부족해도 원작 팬덤이 엄청 비난할 텐데 솔직히 그게 너무 두렵더라. (웃음) 그리고 뛰어난 해외 뮤지컬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의 평가 기준이 더 엄격할 걸 알기 때문에 부담이 더 컸다. 그래서 무조건 실력으로 캐스팅 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정성화 배우보다 안중근 역할을 잘 해낼 배우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더라. 스타성, 티켓파워 같은 건 다 제쳐 놓고 오로지 실력으로 봤을 때 대안이 없었다.
안중근 역할을 제외하고 다른 배역은 배우들 쪽에서 찾았다. 모든 배우들을 뮤지컬 배우로 기용하면 영화가 아니라 뮤지컬이 되지 않겠나. 설희 역은 연기력과 가창력 모두를 겸비해야 했는데 여기저기 물어봤더니 하나같이 입을 모아 김고은 배우를 추천하더라. 사실 그 전엔 김고은 배우가 노래를 잘 하는지 전혀 몰랐다. (웃음) 조 마리아 여사 역에는 나문희 선생님 외엔 생각이 안 났다. 선생님께서 악극을 했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어서 더 그랬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가장 공을 들인 캐스팅은 이토 히로부미다. 독창이 두 곡이나 있어서 다른 주연 배우들 만큼이나 중요했다. 일본에서 연기와 노래 모두 잘 하는 배우를 수소문했더니 재일교포인 김승락 배우의 이름이 나왔다. 알고 보니 일본 뮤지컬계의 정성화라더라. (웃음) 뮤지컬 제작사 에이콤에 부탁해서 김승락 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었다.
당신을 쌍천만 감독으로 만들어준 <해운대>(2006)와 <국제시장> 등 전작들이 소위 ‘울리는’ 영화로 유명하지 않나. (웃음) 여기에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다 보니 감정적 과잉에 대해 걱정했는데 예상을 빗겨가더라. 정성화 배우는 오히려 힘을 빼고 담담하게 연기하라는 디렉션을 자주 받았다고 하던데.
아예 신파로 가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엔딩 크레딧에 사진 같은 역사적 사료를 넣는다든가 배우가 철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넣으면 더 상업적이고 대중적일 수 있지만 완성도를 생각하면 그러고 싶지 않더라. 강한 ‘국뽕’, 과한 신파는 최대한 절제하려고 했다. 오로지 웰메이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웃음)
영화 감독이면서 제작자이고 동시에 JK필름의 수장이다. 최근엔 CJ스튜디오스 대표이사까지 올랐다. 작품을 만들면서 감독으로서, 제작자로서, 또 경영인으로서의 의견이 상충할 때는 없나.
제작자나 경영인 입장에선 당연히 비즈니스적인 부분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 흥행이 안 될 게 뻔히 보이는 작품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연출은 좀 다른 거 같다. 아마 연출을 해보신 분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다. ‘삘’이 꽂히면 아무도 못 말린다. (웃음) 연출은 사랑과 비슷하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의 직업, 집안, 학벌, 능력… 이런 게 안 보이지 않나. 연출도 마찬가지다. <영웅> 때도 아주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 주변에서 뭐라 해도 하나도 안 들리더라. 이 영화를 안 만들면 죽을 거 같았고 누구보다 간절히 잘 만들고 싶었다. (웃음)
차기작으로 할리우드와 협업해 K팝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차은우를 비롯해 여러 인기 아이돌들이 출연하는 < K팝: 로스트 인 아메리카 >라는 영화의 연출을 맡았다. 이미 프리프로덕션에 착수한 상태다. 다만 나 혼자 주도하는 게 아니라 할리우드와 함께하는 작업이다 보니 진행이 좀 더디다. (웃음)
< K팝: 로스트 인 아메리카 >에도 사랑에 빠졌나. (웃음)
당연하다. 영화를 제작하는 데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이 넘게 걸린다. 사랑하지 않으면 고역이다. (웃음)
5년의 제작기간, 160억 원이라는 당시 기준으로 어마어마한 자본이 투입된 한국식 재난영화 <해운대>나 <영웅>, 그리고 차기작까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 같다.
창작자는 안정적인 걸 택하는 순간 퇴보한다고 생각한다. 퇴보 아니면 진보, 그게 창작자가 가지는 숙명인 거 같다. 과거의 영광을 이어가려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건 곧장 퇴보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끊임없이 나아가는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다.
사진제공_CJ E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