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지금도 불한당원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분을 종종 만나요, 참 고마운 작품이죠.” 변성현 감독이 <킹메이커> 이야기에 앞서 전작 <불한당>을 향한 애정을 드러낸다. 호평과 팬덤 형성도 뜻깊지만, 지금 함께 작업하는 팀과 설경구라는 페르소나를 만나게 해 준 각별한 작품이다. <불한당> 제작진과 배우가 다시 만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완성한 <킹메이커>. <불한당>보다 더 만족스러운 결과물이라고 자평하는 변 감독을 화상으로 만났다. 영화를 한층 더 흥미롭게 보게 할 그의 코멘터리에 귀 기울여 본다.
팬덤을 형성한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6, 이후 <불한당>) 이후 첫 작품이라 부담감은 없었나. 코로나 국면과 맞물리며 개봉이 수차례 연기되면서 예상보다 훨씬 늦게 관객과 만나게 됐다.
2년이나 지연됐지만, 일단 개봉해서 기분이 좋다. 힘든 시기라 아쉽긴 하지만, 공들여 찍은 영화로 관객과 만난다는 게 기쁘다. 지금 촬영 중인 <길복순>도 열심히 찍고 있지만, 오늘도 강원도에서 촬영하다 왔다, (웃음) <킹메이커>는 나와 제작진 그리고 배우들 모두 특히 열심히 한 작품이라 더 그렇다. <불한당>이 크게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좋게 평가한 분도 꽤 있고 무엇보다 마니아층이 생겨서 부담감이 상당했다. 나와 (설) 경구 선배뿐만 아니라 미술 감독과 촬영 감독 등 그때의 팀이 거의 그대로 다시 뭉쳤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우리끼린 <불한당>보다 만족할 결과물이 나왔다고 자평하고 있다. 흥행에 상관없이 말이다. 그간 몇 편 찍지 않았지만, 내 작품 중 가장 만족한다. (웃음)
<불한당>의 인기는 당시 어떤 신드롬을 형성하지 않았나 싶다. 설경구 배우가 ‘지천명 아이돌’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고. 의미가 남다르겠다.
지금 나와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지금의 팀을 만들어 준 작품이다. 꽤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시사회 같은 자리에서 가끔 마주치면 ‘불한당원’이라며 인사를 하는 분들이 계신다. 정말 고마운 영화다.
<불한당>에 이어 이번 <킹메이커>까지, 설경구 배우는 명실상부하게 당신의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했다. 게다가 촬영 중인 <길복순>도 함께 한다. 사실 고 김대중 대통령을 모티브로 한 인물인 ‘김운범’ 역에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 시선도 있지 않았나.
주변에서 그런 얘기를 하기도 했으나 경구 선배라면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김운범은 ‘서창대’(이선균)에 비해 욕망을 드러내거나 아픔이 없는 듯한, 자칫하면 플랫하게 보이는 인물인데 이를 입체적으로 표현할 배우가 몇 분 안 떠올랐고 그중 한 분이 경구 선배라… 마침 그때 <불한당>을 작업 중이라 선배가 하는 게 당연하다 싶었다.
설경구 배우는 처음에 부담감이 컸다고 하던데.
고 김대중 대통령이 현대사에 있어 너무 큰 어른이라 이름 자체가 주는 부담감이 큰 게 사실이었다. 특히 선배는 더 그랬고. 그래서 새롭게 이름을 지어서 인물 설정에 있어 창작의 여지를 부여했다. 또 그분이 실제로 한 말씀 중 일부를 뺀 부분도 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 중 이선균 배우가 연기한 ‘서창대’의 모델이 된 ‘엄창록’이라는 인물에 관한 몇 줄 안되는 언급에서부터 영화가 시작됐다고 알고 있다. 그 부분이 눈에 들어온 이유는 뭘까.
‘엄창록은 선거의 귀재였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면서 몸이 아팠다’ 라고 정말 몇 줄 안되는 내용이었다. (표현은 좀 다를 수 있다) 엄창록에 대한 화나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 게 오히려 크게 애착을 가졌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편으로 넘어갔으면 화가 나는 게 보통 아닌가. 짧게 표현됐기에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했다. 만약 길게 묘사되어 있었다면, 시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킹메이커>는 대의를 위한 정의롭지 못한 수단과 방법의 허용치가 어느 정도인지 묻는다고 본다. 김운범과 서창대가 상충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킹메이커>의 시나리오를 쓰던 당시가, 한참 전인데 스스로 이런 물음이 많았던 때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열심히 가면서도 한편으론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은 치사한 지점도 있었고, 이에 죄책감을 느끼곤 했었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이런 물음을 던져보면 좋겠다 싶은 차에 발견한 소재였다. 정치 영화를 만들고자 찾은 소재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이런 물음을 던질 소재와 인물을 찾아서 나온 결과물이라 하겠다.
조명을 적재적소로 활용, 서사와 캐릭터를 은은히 부각하더라.
조명으로 많은 걸 표현하려고 했다. 빛과 그림자, 욕망 등 어둠이 좀 부정적인 기운이라면 빛은 밝은 기운인데 반대로 얘기한다면 빛은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상대가 욕망을 드러낼 때 그 얼굴에 빛이 비취지는 등 여러 의미로 빛과 그림자를 활용했다.
전반부가 실제 사건을 재구성해 과거 선거전의 일면을 흥미롭게 전달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 간의 갈등과 대립 속에 주제를 드러내는 인상이다. 언급했듯 조명의 디자인도 달라지는데 연출의 큰 그림을 짚는다면.
1막은 목포 선거, 2막은 신민당 경선, 3막은 대선 이렇게 형식적으로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3막으로 구성했다. 이들 막을 각기 다른 톤과 스타일로 간다는 게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구별하고 싶었다. 그래서 1막은 서창대를 중심으로 벌이는 선거전을 긴박하면서 한편으로는 귀엽게, 2막은 서창대는 좀 뒤로 빠지더라도 정치드라마라는 장르에 가장 어울릴 톤으로, 3막은 1막과 완전하게 대비를 이루게 하려고 했다. 1막과 3막을 보면 서창대는 똑같은 행동을 하는데 이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관객이 다르게 느끼길 바랐다. 사실 목포 선거와 대선에서 그가 벌인 행동은 원론적으로는 같거든. 그런데 언제는 가볍게 느끼고, 또 언젠 무겁게 느껴지는지, 이런 다른 체감도 자체가 영화가 주는 하나의 질문이라는 생각으로 구성했다.
50년 전의 선거 공방을 다루면서 당대의 분위기를 전하는 데 노력했을 것 같다. 실제 과거 영상 자료의 활용, 인물 간에 오가는 만담 등으로 이해력을 높였다.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 총선과 대선도 헷갈릴 수 있다. 이렇게 관심 없는 분들이 사전 정보가 없이 봐도 이해할 수 있도록 예전 방식의 선거를 잘 그리려 노력했다. 만담, 스틸 컷 삽입도 그 일환이다. 보통 전달할 정보가 많은 경우 상황을 설명하고 정리할 캐릭터를 등장시키는데, 우리 영화에 이런 기능적인 캐릭터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이런 설명적인 캐릭터 없이 당시의 분위기를 어떻게 전달할지 시나리오 단계부터 많이 고민했고, 공을 들인 부분 중 하나다.
좋아하는 장면을 꼽는다면.
김운범과 서창대가 서재에서 대화하는 이별 장면이다. 7분에 이르는 긴 대화씬인데, 크게 동선도 없고 컷 분할도 없이 투샷과 배우의 단독샷만으로 구성된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인데 이유는 두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다. (웃음)
마지막에 이실장(조우진)이 “각하에게도 대의가 있다”고 하지 않나. 당신이 품었던 질문, 그러니까 영화를 시작하게 된 물음이 함축된 대사라는 인상이다.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생각에 어느 순간 갇혀 버릴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실장의 이 말은 서창대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악역인 그의 입을 빌려 ‘네 행동도 나와 같을 수도 있다’는 걸 넌지시 알린다고도 볼 수 있다. 좀 전에 말했듯 1막과 3막을 대비하여 전하는, 같은 행동 다른 느낌과 같은 맥락일 수 있다. 솔직히 대의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어서 이렇게 시나리오를 쓰지 않았나 싶다. 나도 틀린 수도 있다는 걸 은유적으로 드러낸 것 같다.
정치 영화로만 비치지 않길 바란다고 했는데.
원래 2년전에 개봉해야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선거철에 개봉하게 됐다. 선거 흐름에 동조하거나 편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정치 영화로 받아들이길 바라지 않는다고 강조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정치를 다룬 상업 영화, 재미있으면서 약간의 의미도 있는 영화, 또 빨리 잊히기보다 서서히 잊히면서 스스로나 누군가에게 질문할 수 있는 영화였으면 한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고 대화를 많이 나눴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청불 로코 <나의 PS 파트너>(2012), 누아르 <불한당> 그리고 이번 <킹메이커>까지 전혀 다른 장르를 연이어 선보이고 있다. 모두 각본도 직접 썼는데, 본질적으로 끌리는 이야기가 있다면.
호러 영화를 빼고는 다 좋아하고 다양한 장르를 하고 싶다. 호러는 무서워서 못 본다.(웃음) 직접 글을 써서 찍는지라 소재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답답하기도 하고 순간 쓸모없는 인간이 돼 버린 것 같기도. (웃음) 그러다가 소재가 갑자기 찾아오는 것 같다. 본질적으로 끌리는 이야기라 하면… 사실 잘 모르겠지만, 이번 <길복순>을 찍으면서 한 연출부 친구가 이런 얘길 하더라. 보통의 상업 영화가 서로 맞지 않는 두 사람이 만나 티격태격하다가 화합을 도모하는 과정을 그리는 반면, 나는 오히려 뜻이 잘 맞던 인물이 결국 헤어지게 된다고 해서… ‘어! 그렇네…’ 했다.
<불한당>도 <킹메이커>도 오프닝이 인상적이다.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 뜬금없이 느껴지다가도 영화를 다 본 후에는 되새기게 한다. 인장 같기도.
글을 쓸 때 오프닝부터 잡고 들어간다. 내게 인장이라는 표현을 붙이기엔 너무 이른 듯하지만, 이런 표현 방식을 인장으로 삼고 싶은 마음은 있다. (웃음) 만약, 앞으로 이 작법을 안 쓴다면 상상력의 고갈이랄지, 내적 한계에 다다랐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촬영 중인 <길복순>을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전도연 선배가 주인공인 넷플릭스 영화로 시나리오부터 배우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선배는 내 원픽이라 할 수 있는, 평소 너무 같이하고 싶었던 분이다. 눈빛만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세계에서 연기를 가장 잘하는 배우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장르 영화보다는 좀 더 내공 있는 감독과 하는 깊이 있는 감정 드라마가 어울릴 듯해서 캐스팅 제안을 망설였다. 그러다 선배가 지닌 어떤 처연한 모습이 먹이사슬의 포식자 같은 면과 어우러지면 어떨지 궁금해서 장르 영화를 제안 드렸더니 선뜻 수락해 주셨다. 뭐랄까, 배우들이 액션을 엄청 많이 하는 액션 영화지만 액션 영화로 봐주지 않았으면 하는 영화다. 생각해 보니 <불한당>은 누아르지만 멜로로, <킹메이커>는 정치영화이지만 정치영화로 봐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앞으로 나올 <길복순>도 그렇다. 액션영화지만, 액션영화는 아닌!
사진제공_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2022년 1월 27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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