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 박꽃 기자]
전태일은 알지만 청계피복노조는 잘 모른다. “근로기준법을 보장하라!”는 외침은 익숙하지만 ‘제2의 전태일이 필요하다’던 간절한 읊조림은 낯설다. 전태일 이후에도 청계천 평화시장에 노동운동은 있었다. 홍준표 감독 애니메이션 <태일이>에 등장하듯, 전태일 ‘오빠’가 건네는 빵 쪼가리로 배고픔을 겨우 달래던 10대 소녀들이 그 주인공이다. 채 다 크지 않은 몸을 구부정하게 접어두고 ‘7번 시다’가 ‘1번 오야 미싱사’가 될 때까지, 하루 15시간 일하던 어린아이들이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 이후에도 평화시장의 혹독한 노동 조건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소녀들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집이 가난해서, 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못해서, 무작정 공장으로 향해 돈을 벌어야 했던 그들은 무엇이든 ‘배우고’ 싶었고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 1973년 동화상가 옥상에 차린 간이 노동 교실이 근처 유림빌딩으로 정식으로 옮겨가는 동안, 일단 최대한 일부터 시키고 보자던 평화시장의 노동 관행도 출퇴근 시간을 고정하는 쪽으로 차츰 개선됐다. 일말의 성취였다.
1977년 9월 9일, 대부분이 알지 못하는 ‘99사건’ 이후 청계피복노조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던 소녀들의 열망이 참혹하게 꺾인 그 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미싱타는 여자들>이 불러내는 것은 바로 그 시절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다. 이야기되지 못했던 역사가 비로소 제 격에 어울리는 무대에 서고, 저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응어리진 마음이 부드럽게 보듬어진다. 김정영, 이혁래 감독의 손을 거쳐 완성된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누군가를 호명하고, 치유한다.
10대 소녀 시절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했고 이제는 중년의 여인이 된 주인공들을 다큐멘터리 카메라 앞에 세웠다. 그들 이야기를 다루게 된 시작점은.
김정영 :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에서 영상 인터뷰 작업을 의뢰받은 적이 있다. 봉제인의 구술 생애사를 기록하는 작업이다. 그때 과거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했던 이숙희 선생님을 만났다. 노동 교실에서 교육선전부장으로 일하던 이야기를 마치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처럼 이야기해 주셨다. 그 뒤에 신순애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때는 노동 교실을 다니던 학생 입장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시더라. 이분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보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미싱타는 여자들> 작업에 생명력이 생겼다.
언급했던 이숙희, 신순애는 또 다른 주인공 임미경과 함께 청계피복노조 활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3인방과 그 주변인들 모두 흐르는 눈물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안고 있더라.
김정영 : 창고형 갤러리를 하나 빌렸다. 그렇게 세 분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임미경 선생님은 첫 만남에서 당시 같이 노조활동을 했던 친구의 편지나 공소장 같은 것을 다 들고 오셨다. (아이들이 대학에 갈 때까지도 노조 활동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데) 그 자료는 그때까지 다 가지고 있으셨던 거다.
각각을 인터뷰한 뒤에는 두 사람을 서로 마주 앉히고 마치 친구끼리 대화하듯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내게 한다. 그 ‘수다’를 듣던 관객은 그 시절을 마치 직접 겪어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리게 된다. 예컨대 버스를 타면 기사들이 교복 입은 또래 아이들은 학생 요금을 내게 하는데 자기들한테는 꼭 성인 요금을 받았다는 성토(웃음) 같은 것이 기억에 또렷이 남는다.
이혁래 : 다큐멘터리는 관객에게 진실함을 느끼게 해줘야 하는 장르다. 관객도 그걸 기대한다. 그들이 열 몇 살이던 어린 나이에 무엇을 느꼈고 어떤 감정을 지녔는지, 또 뭘 하고 싶었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 간의) 대화라는 설정을 가져왔다. 아무리 편하게 진행한다고 해도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관계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리고 대화 장소에 설치한 스크린을 통해 과거 사진이나 텍스트 자료 같은 걸 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했다. 말의 내용도 중요했지만, 말하는 사람들이 그 자료를 보면서 순간순간 반응하는 것까지 잘 잡아내려고 했다.
김정영 : 이런 방식은 예능에도 많이 나왔다. 예를 들어 ‘1박 2일’에서 아버지 김무생의 옛날 사진이 스크린에 나온 걸 본 아들 김주혁이 울먹이는 장면 같은 것. 잘 사용하면 (보는 사람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효과적인 접근이다.
이혁래 : 다큐멘터리는 자료 화면을 많이 쓰는 장르다. 그런데 보통은 관객만 그걸 볼 수 있다. 인터뷰에 응하는 출연자는 그런 건 보지 못한 채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촬영이 단지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아픈 기억만 털어놓게 하는 수준에서 끝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출연자들이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면서 반응하는 과정을 통해서, 힘은 들었지만 그럼에도 빛나고 아름다웠던 자신의 지난 시절과 다시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연자들의 말솜씨가 상당히 좋다. 입담 있는 주인공을 만난 건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운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혁래 : 그런 데다가 세 분이 각기 다른 스타일로 말씀을 잘하신다. 그걸 섞어 놓으면 정말 듣는 재미가 있다.
김정영 : 더 재미있는 건 영화관 예매 앱에서 관객 분석을 보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항목이 ‘배우’라는 것이다.(웃음) 세 분 모두 서울과 지방에서 열리는 GV에 참석하실 것 같다. 그분들이 모이는 상영 회차는 아마 전부 매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1977년, 경찰은 9월 10일까지 유림빌딩에 있던 청계피복노조 노동 교실을 철거하겠다는 공문을 보낸다. 하루 전인 9월 9일 노조원들이 노동 교실을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가 사람이 다치고 잡혀가는 등 사달이 나고 만다. 소위 ‘99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날에 대해서 미리 알고 취재한 건가. 사실 내 경우에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건이다.
이혁래 : 나도 몰랐다. 사실 지금도 인터넷에 찾아보면 잘 안 나올 거다. 사회적인 파장이 큰 사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큰 마음의 상처를 안긴 일이다. 노동 교실은 1970년대 중반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숙희 선생님 표현에 따르면 배움터였고 놀이터였고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걸 누군가가 ‘그래, 너희들 수고하는구나 옛다’ 하고 줬겠는가. 처음에는 줄 것처럼 했다가 빼앗았고, 싸워서 다시 얻어낸 거다. 그러니 더 소중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러니 노동교실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을 때 이분들이 어떻게 행동을 했을 것인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99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이야기가 파생되고 맥락이 확장된다. 중부경찰서에 끌려간 일이나 유치장에서 겪은 부당한 대우를 증언하는 대목에서는 관객의 감정도 함께 고조된다. 대표적인 게 경찰이 신순애의 귀싸대기를 갈기며 쌍욕을 했다는 대목. 학생운동 하다가 잡혀 온 대학생은 화장실도 보내주고 사식도 받아주는데 자기는 얻어맞기만 해 고막이 터졌다는 것이다. 그때, 아무 상관도 없이 듣기만 하던 내가 어찌나 울컥, 억울하던지.
김정영 : 신순애 선생님은 인터뷰를 할 때마다 그때 이야기를 하신다. 얼마나 분했으면 그러겠는가. 마치 무슨 시처럼, 라임이 착착착 맞아 떨어질 정도로 말씀하신다.
이혁래 : 그런 차별은 70년대뿐 아니라 80년대에도 계속 있었다고 한다. 조형근 교수가 한겨레 신문에 쓴 칼럼* 중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대학을 다니던 80년대에 노동자들과 같이 구치소에 갇혔는데, 자신에 대한 대우와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너무 다른 걸 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얼마나 대우를 받고 살았는지 다시 한번 느꼈다는 내용이다. 그게 당시 대학생의 입을 통해서 나온 솔직한 증언이라면, <미싱타는 여자들> 속 이야기는 그 반대편에 있던 노동자의 입장에서 나온 증언이다. 그로 인한 울림은 아마 많이 다를 것이다.
(* [세상읽기] 그 대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나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8150.html )
지금 기준으로 돌이켜 보면 대학생이라는 게 그렇게 큰 특권이었다는 게 생소하다. 대략 80년대 이후 출생부터는 ‘개나 소나 4년제 대학을 간다’는 우스갯소리를 듣고 컸다.
이혁래 : 그 시절 대학에 다닌다는 건 대단히 선택받은 사람들만의 일이었다. 1970년도 통계를 보면 중학교 취학률이 36%쯤 된다. 그러니까 열 중의 여섯은 중학교도 못 갔던 시절이다. 대학생은 5%쯤 됐다. 상당히 소수다. 그런데 지금 보면 그렇게 소수였던 분들이 굉장히 많은 수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않나.
그 특별한 소수가 지면, 방송 등 사회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을 대부분 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영 :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육성도 들어야 한다. 그 목소리가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영화에는 담지 않았지만 청계피복노조원들은 99사건 이후인 80년대에도 억울한 일이 많았다. 노동 교실이 폐쇄되고 그곳에 다니던 노동자들이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평화시장에서 취업을 할 수가 없었다. 신순애 선생님은 김밥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전셋집 주인이 빨갱이라면서 내쫓은 일도 있었다. 99사건 이후로도 말이 안 되는 일을 쭉 겪었기 때문에 <미싱타는 여자들> 인터뷰를 안 하려고 하신 분도 있다. 그런 일을 경험했다는 것 자체를 시가 어른들이나 가족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거다.
한 가지 궁금한 점도 생겼다. 경찰이 9월 10일에 노동 교실을 철거하겠다고 통보했으니 하루 전날인 9월 9일부터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이 모여들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나중에는 경찰들이 ‘9월 9일이 무슨 날인 줄 모르냐’며 빨갱이라고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그날이 북한의 정권수립일이라면서. 제3자의 시선에서 봤을 때는, 진압의 명분을 세우기 좋은 날짜를 사전에 기획하고 통보한 게 아닌가 싶은 의구심도 들더라.
이혁래 : 우리도 사실 좀 미심쩍은 부분은 있었다. 하필 그 날짜에 퇴거 명령을 내린 건 의도가 있지 않겠나. 진실을 밝혀야 하는 건가? 싶은 마음에 여러 사람을 만나 질문하고 알아봤다. 우리 영화 중에 빨간 옷을 입고 출연한 부부 중 남자분인 신광용 선생님께도 물었다. 어쩌면 정권에 의해 특정한 날에 시위가 벌어지도록 유도된 일종의 공작 아니었을까요? 하고 말이다. 그런데 딱 대답하시더라.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근데 상관없어요. 우리는 그때 진심이었으니까.”
김정영 : 그 얘기를 듣고 흔들렸던 마음을 고쳐먹고 초심으로 돌아갔다.(웃음) 선생님들의 진심에 더 집중하고 그들의 증언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는 게 맞겠다고. 그 사건의 객관적인 실체가 어찌 됐건, 설령 진짜 공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영화에서는 그 몫은 굉장히 적다.
예컨대 <김군>같은 다큐멘터리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실제 상황을 추적하는 접근을 보여줬다면, 그와는 결이 다른 종류의 작업이라는 말이겠다.
김정영 : <미싱타는 여자들>이 <김군>처럼 추적하고 분석하는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혁래 : 그렇지. <김군>은 워낙 새로운 시각인 데다가 결과물도 좋은 다큐멘터리다. 만약 그 작품과 같은 방향으로 갔다면 <김군>의 성과까지는 가야 하지 않겠나.(웃음) 그와는 다른 결로 접근하는 게 우리에게도 훨씬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신 <미싱타는 여자들>에는 잊혔던 사람들을 호명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이 있다고 느낀다. 단순히 촬영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시절 이야기를 조명해주고, 그때 함께했던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그때 불렀던 노래를 다시 합창하게 해주면서 말이다. 청계피복노조원들의 마음을 치료해 주는 정성스러운 과정에 관객이 동행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혁래 : 이를테면 출연자들이 진짜 예쁘고 빛나던 16살 시절 그 아이를 왜 지금까지 계속 외면하고 숨겨왔을까? 싶은 마음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게 아픈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 것에 대한 당연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시절에 했던 활동을 잠깐씩이라도 체험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노래 부르고 춤추고 글을 써서 같이 나눠서 읽고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정말 즐겁게들 참여해주시더라.
노석미 작가가 세 명의 주인공 이야기를 함께 들었고, 그들을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 영화의 포스터가 됐다.
이혁래 : <미싱타는 여자들> 제작 과정에서 DMZ다큐멘터리영화제 피칭을 했다. 사실 그때는 그렇게 많은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식당에서 우연히 캐나다 핫독스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앤지 드리스콜 프로그래머를 만나고 영문 소개자료를 보여줬는데, ‘제3세계 아동 노동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굉장히 많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이 작품이 관심을 끌려면 다른 요소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그때 머릿속에 노석미 작가가 떠올랐다. 휴대폰에서 노석미 작가의 그림을 검색해 보여드리면서 이분이 우리 영화의 애니메이션을 맡아주기로 했다고 하니 그 화풍을 참 좋아해 주시더라. 이런 그림이 들어가면 새로움이 느껴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날 앤지 드리스콜 프로그래머는 “어쩌면 이분들은 자신이 10대였는지도 모르고 10대 시절을 보낸 분들이겠네요” 라는 말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이야기 이후로 작품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방향이 잡힌 것 같다.
옥상에서 ‘흔들리지않게’라는 곡을 합창하기도 한다.
김정영 : 평화의나무 합창단에게 영화 이야기를 했더니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 주셨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다만 코로나19 때문에 출연하신 분들의 목소리는 전부 따로 녹음해야 했다.
이혁래 : 출연자들이 실제로 일했던 공간에서 뭔가를 찍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던 차에 동화상가 옥상에서 촬영할 기회가 생겼다. 관객은 아마 모르겠지만 처음 청계피복노동조합 노동교실이 생겼던 바로 그 곳이다. 그 장면을 찍을 땐 좀 통쾌한 느낌도 있더라.
주인공들이 실제로 일했던 평화시장을 찾는 대목은 영화적 정점이다. 흰 천이 씌워진 점포들 사이로 그들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준다.
김정영 : 장소 헌팅을 갔을 때 우리끼리 ‘기적 같은 공간’이라고 했다. 대개 평화시장은 밤에만 열기 때문에 낮에는 점포마다 다 하얀색 천막을 쳐 놓는데, 그게 마치 거대한 설치 미술장 같더라고.
이혁래 : 그 장소를 섭외할 때는 당시 전태일재단 박계현 사무총장님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셨다.
핫독스 프로그래머, 평화의 나무 합창단,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등 많은 사람의 의견과 도움을 얻어 <미싱타는 여자들>의 기획이 더욱 힘을 얻은 거겠다.
김정영 : 물론이다. 주인공 선생님들의 역할도 컸다. 한 분 한 분이 다 감독님이셨다. 평화상가에서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고 스크린 위로 자신들의 어린시절 사진만 보여드렸을 뿐인데 거기서도 술술 자기 이야기를 꺼내 들려주시더라. 또 한 가지 놀랐던 건, 여기에 어린시절 사진이 있다는 걸 대기 장소에 가서 다른 분들께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정말 그 비밀을 다들 지켜주셨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여쭤보니 “저희가 원래 조직 활동을 했잖아요” 하시더라.(웃음)
<미싱타는 여자들>이 1/20(목) 개봉했다. 이 프로젝트의 의미를 짚는다면.
김정영 : 선생님들 이야기를 듣던 어느 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선생님의 자제분이 공무원노조에 들어가고 싶은데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는 거다. “그래, 노동 3권은 네가 스스로 챙겨야지!”라고 답했더니 “엄마가 어떻게 노동 3권을 알아?”라고 되물었다고 한다.(웃음) 그래서 “그걸 내가 왜 몰라!” 하면서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쭉 읊어주셨다고 한다. 자제분은 당연히 크게 놀라셨고.
자식은 참 이렇게나 엄마를 모른다.(웃음)
김정영: (그동안 청계피복노조 시절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시절 경험과 배움이 이곳저곳에서 새어 나오는 삶을 살고 계시더라. 부당한 일이 있을 때는 먼저 나섰다고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미싱타는 여자들> 작업에 한층 활력이 생겼다. 그게 참 좋았다.
사진 제공_영화사 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