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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의 어려움은 자기가 아니면 극복할 수 없다 <파이터> 윤재호
2021년 3월 24일 수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탈북한 젊은 여자 ‘진아’(임성미)는 식당 일과 복싱 체육관 청소 일을 병행하며 살아간다. 엄마는 십수 년 전 먼저 탈북해 남한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고, 아빠는 여전히 탈북 기회를 노리며 북한에서 생활한다. 사실상 해체된 것과 다름없는 복잡한 집안 상황과 홀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깜깜한 현실 사이에 놓인 ‘진아’는 무언가를 쉽게 낙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일하던 체육관 관장(오광록)과 코치(백서빈)의 도움 끝에 복싱이라는 새로운 관심사를 찾게 되고, 선수로 데뷔해 링 위에 오른다. 윤재호 감독은 누구를 죽도록 미워하거나 자기 삶의 고삐를 풀고 체념하는 탈북인 대신, 자기 삶과 대면하고 근성 있게 살아 내기로 한 젊은 주인공의 모습을 <파이터>에 담았다. “자기 삶의 어려움은 자기가 아니면 극복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달 초 기자간담회에서 <파이터>는 칸영화제의 젊은 감독 육성 프로그램인 시네파운데이션의 ‘레지던스’ 과정을 통해 개발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시네파운데이션’ 프로그램 중 학생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셀렉션’ 부문에 선정하고, 학생 신분을 떠나서 첫 번째나 두 번째 장편 작업을 하는 감독을 ‘레지던스’ 부문에 선정한다. 프로듀서를 위한 부문(‘아뜰리에’)도 있다. 봄, 가을 시즌마다 5명씩 뽑아서 글(시나리오)을 쓸 수 있도록 지원하는데, 숙소를 제공하고 파트너 관계에 있는 영화제나 제작사와의 미팅도 주선해준다.

프랑스 유학 생활을 거치면서 유력 영화제의 인력 양성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접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원체 유명한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들어가는 게 내 목표 중 하나였다. 레지던시에 들어가면 일단 ‘칸 영화제의 가족’이라고 표현해주는데, 그 (그룹) 안에 들어가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칸영화제의 규모가 크기는 하지만 실제 ‘메인’에서 영화제를 운영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그래서 전부 가족 같다. 젊은 감독 중에 제작사가 없거나, 시나리오는 있는데 경험이 없거나… 여러 이유로 자기 작품을 못 하고 있는 경우라면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레지던시에 참여했다고 전부 자기 작품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내 경우에는 거기에 참여한 2012년 이후로 일이 잘 풀렸다.


<파이터> 외에도 당시 기획했던 여러 작품이 있을 것 같은데.
본래는 <아버지의 비밀>이라는 작품이 당시의 메인이었다. 남북관계에 따라서 내용과 방향성이 바뀔 수도 있는 복잡하고 민감한 시나리오다. 칸 영화제와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피칭도 했지만 아직 만들지 못했고, 버전이 다른 원고만 열 몇 개가 있을 정도다. 그 작품의 어려움과 한계를 잘 알고 있다 보니, 거기서 파생된 <뷰티풀 데이즈>(2018)와 <파이터>를 더 빨리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파이터>는 극영화 <뷰티풀 데이즈>에 이어 다시 한번 탈북인을 주인공으로 한다. 다만 곳곳에 로맨스와 유머가 녹아들면서 전작보다 가벼운 느낌의 분위기 변화도 엿보인다.
<뷰티풀 데이즈>가 대학생이 된 청년과 엄마의 관계를 통해 가족애와 모성애를 보여줬다면 <파이터>는 그보다 젊은 세대와 그들 또래의 이야기를 통해 타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다뤄보고 싶었다. <뷰티풀 데이즈>의 여성이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면 <파이터>의 여성은 일단 자기가 생존하고 동시에 가족도 지키려고 하는 면도 있다. 적절한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너무 가볍지는 않은 중간 정도의 톤으로 연출하려고 노력했다.

주인공 ‘진아’ 역을 맡은 임성미의 연기 에너지가 특히 도드라지는데. 음색이 독특하고 눈빛이 깊은 배우다.
임성미 배우와는 ‘필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를 만났을 때 마침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파이터>는 투자도 받지 못하고 각종 지원 사업에서도 여러 차례 퇴짜를 맞은 작품이다. 그러던 차에 <극한직업>을 공동제작한 제작사 해그림의 모성진 대표가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내가 투자하겠다”고 한 거다. 부랴부랴 배우를 찾다가 (임)성미 씨를 만나게 됐는데, 30분 정도 미팅 끝에 내면적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왔다. 쫄딱 망할 수도 있었지만(웃음) 내 감을 믿었다.


‘진아’는 홀로 탈북해 식당 일과 복싱 체육관 청소를 병행한다. 오래전 먼저 남한으로 와 새로운 가정을 꾸린 엄마를 만나고, 여전히 북한에 남아 있는 아빠와 전화 통화를 한다. 성희롱을 하고 되레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부동산 중개업자에게는 턱하고 돈 봉투도 내놓는다. 고독하지만 근성 있게 살아나간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누가 나를 해코지하려고 해도 ‘나는 나’라는 캐릭터의 어떤 느낌을 지키고 싶었다. 나를 해치려던 남자가 (자신이 신체적 피해를 봤다는 이유로) 돈이라는 보상을 요구했을 때 ‘진아’는 (남한의) 자본주의에 입각해 그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게 그 남자에 대한, 또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깔끔한 복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가 ‘진아’를 아무리 쓰러트리려 해도 그는 자신 스스로 일어날 테니,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을 봐 달라는 게 이 영화의 목표이기도 했다.

‘진아’와 체육관 복싱 코치 ‘태수’(백서빈)의 로맨스에도 비중을 뒀다. 악의 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얼굴의 남자 ‘태수’를 통해 말랑말랑한 감정선을 전달한다.
‘태수’는 외관상 말끔해 보이는 ‘부동산 남자’와는 달리 문신을 하고 있다. ‘진아’ 역시 초반부에는 그런 이유 때문에 감정(선입견)을 갖게 되는데, 결국 중요한 건 외관이 아니라 내면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외관이 괜찮아 보이지만 내면은 썩어 있는 사람도 있고, 외적으로는 그저 그렇지만 내면은 굉장히 따뜻하고 꽉 찬 사람이 많다. 그걸 알려면 결국 상대와 함께 대화하고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을 알게 된다.

영화는 ‘진아’가 남한에서의 삶에 적응하고 주변 사람과 교류해 나가는 과정을 복싱에 빗대어 표현한다.
복싱은 링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경기다. 그게 ‘진아’의 삶과 비유적으로 잘 어울렸다. 탈북한 사람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의 세계 위에 서 있는 여성이라는 느낌도 강조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쓰러졌을 때는 스스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 누군가의 응원과 도움이 있더라도 결국 자기 삶의 어려움은 자기가 아니면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기에도 관념적으로 어울리는 소재였다고 생각한다.


‘진아’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희망적인 마무리일 거라고 여기고 싶은데.
마냥 희망적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의 마무리라고 본다. 영화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야 할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기대 반, 걱정 반 시선으로 끝이 난다. 다만 언젠가 ‘진아’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쳤을 때, 그가 혼자가 아니고 곁에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속의) 어떤 매듭을 조금은 풀어 놓은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 정도는 드러내고 싶었다.

<파이터> 이후 다큐멘터리 <송해 1927>도 선보일 예정으로 안다. 전국노래자랑을 오래 진행해온 송해 선생님의 삶을 다룬 작품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데 간단히 설명해 준다면.
곧 국내의 모 영화제에서 소개될 예정이고 하반기 개봉 계획이다. <파이터> 촬영이 한창이던 때 <송해 1927> 작업 제안을 받았다. 많은 분이 전혀 모르고 있는, 송해라는 인물의 사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결국에는 (내 전작들과) 가족이라는 주제로 엮일 수 있을 것이다. 분단도 되기 전에 태어나서 한국 사회의 밝고 어두운 면을 다 보고 경험한 역사의 생존자를 다룬다는 점에서도 굉장히 가치 있는 작품이 될 것 같다.

탈북인을 소재로 한 작품을 꾸준히 내놓는 동시에, 노르웨이 감독 마르테 볼과 함께한 다큐멘터리 <레터스>(2017)나 공개 예정인 신작 <송해 1927>같은 보다 다양한 인간상을 다루고 있는데.
그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하나만 끄집어내라면 아마 ‘사랑’ 아닐까. 타인에 대한 사랑이든, 가족에 대한 연민이든 말이다. 인간관계에서 뭔가 부족함이 느껴질 때는 결국 사랑에 대한 결핍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가족이 깨어지고 다시 재회하기 힘들어지는 경우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아마 내가 바라보는 모든 세상이 거기서부터 파생되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 질문이다.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아들, 그리고 와이프가 웃는 모습을 볼 때. 아이가 생기면서 감정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전에는 없었던 무언가를 지키고 책임져야 할 의무도 생겼다. 그런 변화 자체가 굉장히 흥미롭다. 사람의 생각은 항상 굴곡이 있고, 그래서 매일 똑같은 정신 상태나 주제 의식으로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런 속에서도 (가족과) 어떻게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사진 제공_(주)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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