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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감정이 뭘까, 생각하게 돼 <미나리> 한예리
2021년 2월 25일 목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모니카’(한예리)의 미국 생활은 실로 녹록지 않다. ‘아메리칸 드림’을 말하던 젊은 시절의 ‘제이콥’(스티븐 연)은 어느덧 자신과 함께 두 아이 ‘앤’(노엘 조), ‘데이빗’(앨런 S.김)을 키우는 가장이 됐지만, 부부의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십수 년 동안 병아리 성별을 감별하며 집안을 건사한 ‘제이콥’은 이제 한국인에게 판매할 식자재를 직접 기르는 농장을 운영하는 모험을 벌이려 한다. ‘모니카’는 어쩔 수 없이 ‘제이콥’을 따라 아칸소의 작은 마을로 이사하지만, 허허벌판에 놓인 지나치게 낡은 간이 주택은 절망스러울 뿐이다. 허리케인이라도 들이닥치면 통째로 날아갈 듯한 위태로운 이곳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까. 심장이 아픈 둘째 ‘데이빗’을 업고 달려갈 병원마저 멀리 떨어져 있는 현실이 ‘모니카’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한다.

‘모니카’는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을 지키려 한다. 한국에서 지내던 엄마 ‘순자’(윤여정)를 모셔 두 아이를 맡기고, 남편이 하던 병아리 성별 감별 일에 뛰어들어 돈을 벌기로 한다. 수월치 않은 의사소통, 제한된 능력, 뻔한 현실은 그들 부부에게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는 마음을 다스리고 포기할 건 포기하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맨땅에서 농장을 일궈보겠다는 남편을 마냥 무모하다고 몰아붙일 수만도 없다. 그 방향성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가족과 함께 더 나은 삶을 살아내기 위해 무어라도 해내려는 남편의 마음을 알고, 그런 그를 ‘사랑’해왔고, 그와 함께 세상에 내어놓은 소중한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미나리>에 출연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는, 한예리와의 대화를 전한다.




<미나리>라는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나.
처음 번역본을 받았을 때는 영화의 전체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미나리>라는 작품과 ‘모니카’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아이작 감독님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를 해보니 감독님이 어린 시절 생각했던 부모님의 모습과 내가 생각한 ‘모니카’의 모습이 그렇게 다르지 않더라. 우리의 유년 시절이 비슷했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와 조율해가면서 ‘모니카’라는 인물을 만들어나갈 만한 여지가 충분하겠다 싶었다.

영화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살아가는 한국계 미국인 부모 ‘모니카’와 ‘제이콥’, 그리고 둘을 바라보는 어린 아들 ‘앨런’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이민이라는 게 많은 사람이 경험하는 일은 아니지만, 한국 관객에게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 가족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렇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유년 시절, 혹은 누군가의 엄마 아빠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들 조금씩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을 것이다.

녹록지 않은 미국살이를 과장 없이, 현실적으로 그려낸 덤덤한 느낌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제일 좋았던 건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등장인물이 모두 자기 의견과 생각을 이야기할 뿐이다. 한국 상황으로 말하자면 ‘신파’ 보다는 담담하고 무던한 표현 방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었어’라는 식의 전달이 더 많은 관객에게 스며들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다.


아칸소로 이사한 첫날 허름한 간이 주택을 본 ‘모니카’는 크게 실망한다. ‘제이콥’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장면도 등장한다. 애틋한 부부의 모습은 아니다.
‘모니카’가 왜 ‘제이콥’과 함께 있는 걸까. 왜 그를 사랑하는 걸까. 이 상황을 버티게 하는 힘이 뭘까. 그런 점을 가장 많이 생각하며 연기했던 것 같다. 아마도 ‘모니카’는 20대 초반쯤 어디선가 ‘제이콥’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큰 꿈을 가진 그 남자와의 미래를 그리게 됐을 것이다. ‘제이콥’이 아메리칸 드림에 대해 말할 때 그가 얼마나 빛나 보였겠는가. 어린 ‘모니카’는 자기 꿈을 생각할 정도로 자아를 성장시키기도 전에, 사랑하는 사람의 꿈이 자기 꿈처럼 돼버린 것이다. 그렇게 같이 미국에 왔지만,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서로 조금씩 각자의 빛을 잃어갔던 것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모니카’는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어떤 마음으로 가족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나.
‘모니카’에게 당장의 목표는 아이들을 잘 기르고 이 가족의 해체를 막는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또 ‘제이콥’이 가만히 앉아서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남자가 아니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내려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를 믿고 끝까지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반짝였던 과거 ‘제이콥’의 모습을 아직 잊지 못하는 상태에서 말이다.

‘제이콥’ 역을 맡은 스티븐 연과의 연기 만남으로 얻게 된 점은.
스티븐 연은 엄청 솔직하고 ‘스윗’한 사람이다. “예리야, 난 이걸 잘 몰라. 알고 싶은 게 많으니 도와줘”라고 말한다. 촬영하다가 불편한 건 없었는지, 자기는 어떤 부분을 어떻게 느꼈는지 편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미나리>가 일정 부분 본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니 연기를 잘 해내고 싶다는 열정도 컸던 것 같다. 그 에너지가 굉장히 좋게 느껴졌다. 서로 ‘모니카’는 왜 그럴까, ‘제이콥’은 왜 그럴까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게 호흡을 맞추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만약 당신의 입장이라면, ‘모니카’와 ‘제이콥’의 서로 다른 입장 중 어느 쪽에 더 힘을 실어주겠나.
그들이 두 아이의 엄마 아빠가 아니었다면, ‘제이콥’을 응원하고 지지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아이가 둘이나 있고 그중 하나는 아프기까지 한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아이들을 잘 길러내는 게 이들 부부의 목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제이콥’의 꿈이 나중에는 가족에게 큰 힘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모니카’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더라.

‘모니카’는 교회에 나가고 싶어 한다. 남편 ‘제이콥’과 함께 농장일을 하는 ‘폴’(윌 패튼)이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걸어가는 모습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작품 전반에 신앙에 대한 감독의 함의가 묻어나는데, 이 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연기했나.
‘모니카’가 교회에 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소통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아이를 기르느라 일을 하지 않아 사회와 단절된 상황이었다. 신을 만나기 위해 주말마다 ‘자신만의 교회’를 짊어지고 가는 ‘폴’을 바라볼 때도 ‘모니카’는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아마 그게 ‘폴’이 무언가를 믿는 방법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지점이 ‘뭐라도 해야 하는’ 간절한 이들의 마음을 표현한 거라고 이해했다. ‘순자’가 쓰러지고 나서 ‘모니카’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폴’을 부르는 것도, 그렇게라도 믿음이란 걸 가져보고 싶었기 때문 아닐까.

25회차 촬영으로 현장이 그리 여유로운 여건은 아니었다고 들었다.
사실 가장 힘들었던 건 집중이 안 될 정도로 너무 더웠던 날씨다. 아이들과 윤여정 선생님이 체력적인 한계가 오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 와중에 다들 일을 해낸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장에서 윤여정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정신 차리고 해야 한다.”(웃음) 아무래도 한국의 배우로서 촬영장에 갔고 우리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아이작 감독님이 우리를 허투루 캐스팅한 게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으셨던 것 같다. 물론 나도 그랬다. 윤여정 선생님이 멋지게 일해내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참 감사했다.


한편으로는 뿌듯하고 행복했던 점도 있을 텐데. 특히 촬영이 끝난 뒤 함께 밥을 먹은 게 좋았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하루의 촬영을 끝내고 나서 따뜻한 밥을 함께 먹는 게 큰 위로가 됐다. 할 수 있는 것과 포기해야 하는 것, 그런 중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행복했다.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다.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이 감독님을 도와주러 오시기도 했다. 그들 몇 명만으로도 현장이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라서 “와, 우리 한국인들 대단한데?” 싶은 마음으로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정이삭 감독이 촬영장에서 보여준 모습은 어땠나.
시간적 여유가 없는 빠듯한 상황에서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때도, 배우가 가장 안정적으로 연기할 수 있도록 집중하고 또 노력하셨다. 하루 촬영이 다 끝나면 매번 보여주는 미소가 있다. 오늘도 무사히 주어진 일을 해내고 이 하루를 넘겼다는 달관한 듯한 따뜻한 미소.(웃음) 그게 기억난다.

앞으로 ‘모니카’와 ‘제이콥’네 가족은 어떻게 될까.
창고만 타는 게 아니라 밭이 홀라당 탈 정도로 큰, 별의별 일이 다 있겠지. 그래도 이 가족은 잘살아갔을 거다. <미나리>는 그저 그들 삶에 있었던 일 중에 한 부분을 보여준 거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어떤 일이 생기고, 또 끝없이 그 일을 수습하면서 살다 보면 ‘데이빗’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자기 배우자를 조금씩 이해하는 과정을 똑같이 겪겠구나 싶다.



당신에게 <미나리>의 의미는.
아무래도 부모님 세대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하게 된 것 같다. ‘모니카’는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성장통을 경험한다. 본인의 자아도 찾을 수 없는 시기였다. 그런 맥락에서 <미나리> 이후에는 나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고민하게 됐고, (정신적으로) 많이 건강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선댄스영화제를 시작으로 해외 유수의 시상식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는데.
선댄스영화제에서 <미나리>를 처음 봤을 때도 정말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했을 뿐 이렇게 큰 사랑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아마 욕심내지는 않으시겠지만, 감독상이든 작품상이든 아이작 감독님이 수상을 하셨으면 좋겠다.(웃음) 고생한 만큼 보람된 일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상을 받지 못해도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진 제공_판씨네마


2021년 2월 25일 목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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