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옴니버스 영화 <그리다>(2017) 중 당신이 연출한 두 번째 에피소드의 제목도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이었다. 타이틀에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웃음)
<그리다>의 에피소드는 실향민 할머니를 인터뷰했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거였다. ‘앵두’라고 불린 할머니로 남쪽으로 피난 오기 전 밤에 남편에게 한글을 배웠던 애틋한 기억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사신 분이다. 생각해보면 공부라고 하지만, 두 분은 그렇게 알콩달콩하게 연애를 나눈 것 아닌가. 남편과 이별한 후 그 행복한 기억으로 긴 시간을 견디신 거지. 당시 인터뷰하면서 할머니와 서로 붙잡고 울었었다.(웃음) 행복하면서도 슬프고 가슴 아프지만 아름다운 에피소드라 한동안 잊히지 않았고 이후 아주 큰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다> 속 앵두 할머니가 한글을 매개로 가나다에 멈춰 있다면(남편과 다시는 못 만났으니), 이번 영화의 ‘민규’(은해성)와 ‘한나’(오하늬)는 다큐멘터리를 매개로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시기라 딱 관계의 가나다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볼 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혹시 ‘가나다’ 이후 ‘마바사’도 있는 건가. 문득 스친 생각이다.
가나다 마바사 파타하 3부작은 평생 프로젝트로 안고 가야 할 염원 같은 거다! (웃음) ‘마바사’는 현재 진행 중인 연인 ‘상규’(박준휘)와 ‘지숙’(주보영)의 이야기, 나아가 ‘파타하’는 헤어진 연인 관계인 다큐멘터리 감독 ‘태인’(김지나)과 봉피디 이야기로 꾸리고 싶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 연작이라니 기대된다.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은 다큐를 품은 픽션 혹은 픽션의 테두리 안에 펼친 다큐로 보인다. 이산가족(실향민) 외에 해고 노동자와 해외 입양아 이슈를 가져왔다.
2008년 영화 집단 웨이필름에 소속돼 있었다. 당시 막내로 여러 작업에 조금씩 참여하고 있었는데, 극 중 ‘상규’가 ‘한나’에게 거절해도 좋다면서 제안하는 것처럼 나도 비슷한 제안을 받았었다. ‘인의 씨, 내일 콜트·콜텍 인터뷰가는데 시간되냐고’ 하시더라. 하루만 도와주러 갔다가 3년가량 작업에 참여했다.(웃음) 그렇게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를 다룬 다큐멘터리 <기타이야기>(2009), <꿈의 공장>(2010)에 함께했다. 물론 김성균 감독님처럼 매일 촬영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마다 멀티로 이것저것 도움을 드렸다. 또 내 작품할 때는 거꾸로 도움받고 그렇게 품앗이하듯 작업해왔다. 극 중 인물들이 작업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로 입양된 ‘주희’(이서윤)는 친생부모를 찾아 한국을 방문하지만, 개인정보보호법으로 인해 친생부모의 정보를 얻지 못한다. 해외 입양아 이슈도 다큐 작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건가.
‘주희’와 비슷한 상황의 친구가 있어 해외 입양과 관련한 여러 사례를 알게 됐다. 2010~2020년 사이 약 1,500~2,000명가량의 해외입양인이 친생부모를 찾아 한국에 왔고, 실제로 찾은 비율은 3% 정도 밖에 안된다고 한다. 다행히 친구는 친생부모를 찾았지만, 정말 힘든 일인 거지. 입양기관 등 관계 기관과의 인터뷰와 리서치를 통해 알아보니 제도적, 시스템적으로 찾기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꼭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에도 언급되지만, 문제점을 다시 한번 짚는다면.
부모가 직접 출생 신고를 하는 국내와 달리 영국이나 미국 등 해외는 신생아가 태어나면 병원에서 바로 출생 등록을 한다. 출생하는 순간 이름을 붙이고 바로 인권이 발생해 사회 시스템 안에서 보호받는 구조다. 우리 같은 시스템, 즉 부모가 출생신고 하는 방식은 주로 입양을 많이 보내는 나라가 채택하고 있더라. 예전에 해외 입양을 장려한 것은 해외로 아이를 보낼 시 (국가가) 받을 수 있는 경제적인 대가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사회적 경비를 줄이는 게 목적이었다고 본다. 아이를 보육 기관에서 케어할 경우 한 명당 지원금이 수백만 원에 이르거든. 문제는 국가가 시스템을 그렇게 만들어 (입양을) 유도해 놓고 세월이 지나니 모든 책임을 입양을 보낸 부모에게 전가한다는 점이다. 또 해외 입양인이 부모를 찾고자 해도 기관에서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절대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이 자리를 빌려 꼭 전하고 싶은 점이 있다.
무엇인지.
입양을 보낼 당시 친생부모의 주소나 이름 등을 다르게 기재해 놓는 경우가 많아 해외 입양인들이 친생부모를 찾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아동권리보장원’에 DNA를 등록해 놓고 기다리는데 문제는 입양을 보낸 친생부모가 자신의 DNA를 등록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사회의 부적정인 인식과 죄책감이 맞물린 결과인데 사실 국가가 정책적으로 조장했던 결과물인데 친생부모에게도 부당한 것 아닌가. 그분들이 조금만 용기를 내주시면 좋겠다. 등록하는 절차도 아주 간단하다. 아동권리보장원에 전화 한 통이면 된다.
극 영화 안에 세 가지 이슈를 녹여내면서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게 힘들었을 것 같다. 어떤가.
사실 그 점이 제일 힘들었다. 콜트·콜텍을 다룬 진지한 작품이 이미 두 편이나 있기에 픽션화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관객이 ‘한나’가 처음 고공투쟁장에 갔을 때 경험한 감정을 느끼기를 바랐다. 한나의 감정이 내가 처음 다큐멘터리 세계를 접했을 때의 감정이거든. 영화를 전공한 후 픽션만 다루다가, 그전에는 노동이나 투쟁과는 거리가 멀었던지라, 고공투쟁하는 노동자를 보면서 그들은 언제 내려오냐고 질문했던 기억이 있다. 고공에서 먹고 자고 배설물을 처리해 아래로 내려보내는 그 광경을 접하고 솔직히 충격받았었다. 그때의 충격을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그 초심을 따라가면서 ‘민규-한나’의 성장영화 느낌으로 가져가면 어떨까 했다. 다시 말해 민규-한나의 시선을 통해 내가 처음 다큐멘터리 현장을 접했던 느낌을 전달하고자 한 거지. 다큐멘터리는 대상자 중심이라 연출자의 감정과 생각을 담기 힘든 지점이 있다. 픽션화하면서 내 감정과 생각, 특히 초심을 따라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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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로 분한 오하늬 배우의 경우 개인적으로 팔색조 같은 인상이다. 연기 경력이 꽤 긴 데도 어떨 때 보면 아주 신인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번에도 그랬다.
‘상규’역의 장준휘 배우가 친할머니를 ‘앵두’라고 부를 때 어울릴 만한 배우를 생각해보니 ‘오하늬’ 밖에 없다고 하더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장준휘와는 1년 선후배요 20년 친구다. 이번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까지 그간 총 13편을 연출했는데 그중 7편에 장준휘가 출연했다. 한마디로 나의 페르소나라고 할까.(웃음) 그가 인맥이 넓어 은해성, 오하늬 등을 비롯해 거의 캐스팅 디렉터 역할을 해줬다. 다만 오하늬가 당시 영화 <디바> 촬영으로 바쁜 데다 인지도가 있어 수락할지 의문이었다. 미친 척(?)하고 부탁 아닌 부탁을 드렸더니 시나리오를 잘 봤다고 하면서 스케줄 정리되면 하겠다고 OK해줬다. 작업해보니 프로페셔널한 배우이고 생각했던 이상을 보여줬다.
한나는 맥주귀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놀이터에서 혼맥을 즐긴다. 젊은 여성이 홀로 술을 마시는 게 안전상의 문제도 있고 특이하다면 특이해 보였다.
두 가지가 부합해 나온 상황이요 시퀀스다. 일단 내가 혼맥을 즐긴다. (웃음) 예전에 청소년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작업했던 경험이 반영됐다. 당시 한 공원을 간 적이 있는데 십 대 후반에서 갓 스물을 넘은 청소년이 몇몇 모여 있더라. 학교에 가야할 시간에 공원에 모여 흔히 떠오르는 비행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해서 가서 인터뷰한 적이 있다. 가정폭력에 시달린 친구들이 모여 자가치료하는 그룹이더라. 왜 공원에서 노느냐고 하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났는데 전라도, 경기 지역 등등 사는 곳이 제각각이라 서울역 근처에서 모인다는 거다. 모여 마땅히 갈 곳이 없으니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거지. 아직 삶의 방향이 결정되지 않은 친구들의 모임, 그 정서가 ‘한나’의 놀이터로 표현됐다.
민규-한나의 만남의 공간인 놀이터, 앵두 할머니 집 등 동네가 참 정감어리더라. 주요 촬영지는 어디인가. 또 제작 기간과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인천영상위원회에서 제작지원을 받은 작품이라 어느 정도 쿼터가 있어 인천 로케이션을 많이 다녔었다. 무의도, 영종도, 또 연탄을 나르는 시퀀스를 촬영한 숭의동 등 50% 이상을 인천에서 촬영했다. 앵두 할머니네는 인천인데 놀이터와 민규네 집은 서울이다. 로케이션이 많아 제작팀이 고생 많이 했다.
2019년 3월 2일에 크랭크인해 19회차로 30일에 크랭크업했다. 제작비는 영진위(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 1억 원으로 시작했다. 중간에 제작비가 바닥났지만, 다행히 경기와 인천 두 영상위원회에서 촬영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또 서울독립영화제에 후반제작지원이 2019년에 처음 신설됐는데 거기 선정됐었다. 참, 완성까지 여러 곳의 도움이 있었다. (웃음)
각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대사를 꼽는다면.
가장 좋아하는 컷은 영화상 아주 짧게 나오는데 ‘태인’(김지나)이 호텔에서 ‘주희’를 처음 인터뷰하는 장면이다. 주희가 하는 말을 듣고 태인이 특별하게 리액션을 하거나 대사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지만, 그 눈빛에 상대방에 대한 깊은 공감이 담겨있다. 그래서 좋아한다. 또 후반부 ‘민규’가 미용실에서 아픈 아버지와 홀로 남아 고생한 엄마에 관련한 과거 이야기를 하는 시퀀스다. 영화 속에 다 나오지는 않지만, 원래 3분 정도의 롱테이크로 촬영했었다. 그리고 한나가 놀이터 메리고라운드에 앉아 독백하는 신은 촬영하면서 소름이 돋았었다. 그가 ‘내 선수 생활도 끝났고, 다큐멘터리도 끝나고 남들은 앞으로 나가는데 나만 제자리에 맴도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데, 익숙한 대사인데도 오하늬가 감정을 담아 말하니 순간 울컥하더라.
첫 장편을 완성 후 소감 혹은 소회는.
그동안 제작도 하고 직접 연출도 하고 오랫동안 영화계에 몸담아 왔다. 독립영화가 힘든 게 관객과 마주할 기회가 적다. 단편과 다큐멘터리는 특히 더 그렇다. 배급사가 붙어 개봉을 준비하는 작업도 처음인데 지금이 너무 좋다. 영화감독을 하겠다고 일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이번 VIP 시사를 하고 개봉을 일주일 앞둔 지금, 이제 영화감독이 됐구나 싶더라.
다소 뜬금없지만, 당신에게 영화란 뭘까. 또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한다.
지금은 영화란 하나의 매체라는 생각이다. 나와 내 친구의 이야기를 전하는 매체말이다. 만약 작곡 능력이 있다면 음악으로 전할 수 있겠지만…그래서 영상매체라면 방송, 영화, 다큐 콕 집어 특정 분야를 고집하지 않는다. 앞으로 유튜브 채널도 만들어 볼 예정이다. 작년에 실화를 바탕으로 형사가 등장하는 추리 드라마를 하나 썼다. 시나리오 작업은 끝냈고 이후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일단 아르바이트부터 구해야! (하하)
마지막 질문!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것은.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말고 다른 거리를 말하고 싶지만, 영화에 관련해 인터뷰하고 시사회하고, GV를 통해 관객과 만나는 게 진짜 제일 좋다.
2021년 1월 28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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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광희 실장(Ultra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