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19살 ‘준’(윤찬영)은 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카드회사 미수금 전담 콜센터로 실습 파견된다. 전화가 끊기면 다음 전화로, 또 다음 전화로 자동 발신되는 시스템 안에서 화장실 갈 시간마저 부족한 그는 속수무책으로 자리를 지킨다. 유일한 휴식은 편의점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사 먹는 점심시간, 곁에 앉은 친구 도시락의 계란후라이 반쪽을 냉큼 빼앗아 먹는 일 정도다. 옥상에 올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던 ‘준’ 앞에 나타난 콜센터 센터장 ‘세연’(김호정)은 “인생 실습한다고 생각하라”는 조언을 남긴다. 서늘함을 깊이 숨긴 위로에 ‘준’은 잠시 안도하지만, 머지않은 시간 그는 젊고 빛나는 삶의 의지를 기어코 꺾어버릴 큰 절망 앞에 서게 된다. 그날 밤, 연체된 카드대금을 받기 위해 찾아간 남루한 집에서 ‘준’은 무슨 일을 겪은 걸까.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강경한 어투로 ‘준’을 몰아붙인 콜센터 센터장 ‘세연’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인생 실습”이라는 말의 무게를 책임질 수 있을까. ‘준’과 ‘세연’을 바라보는 관객은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답답한 숨을 내쉰다. 두 사람은 이대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지독한 현실의 일면을 담아낸 작품이다. 왜 이 영화를 기획했나.
2016년 ‘구의역 김군’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 그 잔상이 오랫동안 남았다. 그 뒤에 방송 다큐멘터리에서 콜센터에서 일하던 19살 실습생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봤는데, 20대 청춘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구 없이, 모든 것으로부터 막혀 있는 세대인 것 같았다. 다만 내가 이미 기성세대이다 보니 그 나이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될 것 같아서 센터장 ‘세연’이라는 여성 관리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보기로 했다. ‘나이스’해 보이지만, 실적을 위주로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굉장한 꼰대 상사다. 그의 시선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실습생 ‘준’과 센터장 ‘세연’이 만나는 곳은 카드회사 미수금 문제를 전담 해결하는 콜센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곳으로 온 실습생들은 끊김과 동시에 다시 전화가 걸리는 자동 시스템에 속수무책으로 붙잡혀 있다. ‘준’은 결국 기저귀를 차고 일하는데.
마이스터고에서 퇴직한 선생님이나, 노무사를 만나 취재를 했다. 그들이 만나온 학생은 인문계 고등학생과는 다른 상황을 겪는다. 학교는 교육 기간에는 나름대로 전문적인 것을 가르치지만, 취업할 때가 되면 취업률을 위해 학생을 마구 파견한다. 그런데 파견된 곳에서 버티지 못하고 학교로 돌아오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그러면 학생은 징계를 받는다. 영화에서도 ‘준’과 친구가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먹을 때 징계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19살이라는 나이에 강요받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은 더욱 비참해진다. ‘준’은 카드 연체금을 받으러 간 집에서 충격적인 상황을 경험하고, 이후 종적을 감춘 뒤 ‘세연’에게 연이은 메시지를 보낸다. “아직도 인생 실습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이 기억에 남는다.
‘세연’이 옥상에서 만난 ‘준’에게 먼저 했던 말이다. “인생 실습한다고 생각하라”고. 시나리오 작업 당시 그 대사를 쓰고 나니 자연스럽게 뒤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 사라진 ‘준’이 ‘세연’에게 역으로 그 말을 쓰면 공포감을 줄 수 있겠다 싶었다. 인생에 실습이 있다고 생각하냐고 되묻는 대사를 쓰면서 나 역시 “그치, 인생에 실습은 없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무슨 그런 게 있겠는가.
‘세연’은 ‘구의역 김군’처럼 비참하게 사그라든 젊은 목숨 이야기가 나오는 어느 순간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소리친다. 아마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겠지. <젊은이의 양지>를 본 소설가 한 분께서 이 영화의 다른 제목은 ‘세연이의 음지’일 거라고 하더라. ‘세연’은 실적을 위해 ‘준’을 카드 연체자의 집으로 보냈고, ‘준’은 거기에서 이 사회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만약 그런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세연’은 그다지 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우리 중 누구 하나가 돌을 던지면 그것이 날아가면서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는 취약하고 치명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맞지 않을까.
그런 ‘세연’에게도 ‘준’ 또래의 딸 ‘미래’가 있다. 연이은 취업 실패로 좌절감이 극에 달해 우울증약을 먹는 인물이다.
‘미래’는 이 시대를 사는 취준생의 모습이다. 취준생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개중에는 40번 정도 면접을 보러 가서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도 있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취업을 아예 포기한 친구들도 태반이라고 하더라. 이야기를 나눠보면 전부 멀쩡하고 똘똘한 친구들인데, 자신이 서류전형 통과조차 못 하는 인물이라는 걸 알았을 때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마치 스스로가 쓰레기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팬데믹이 오면서 상황은 더 심해진 것 같다. 아르바이트 경쟁률마저 높아졌으니까.
젊은 세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게 어려울 때는 없었나. 창작자로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굳어진 생각 때문에 타인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시나리오를 쓰고 취재를 하면서 나도 좀 바뀌었다. 어쨌든 나도 나이를 먹었고, 그 세대도 아니지 않나. 물론 그 시절을 지나오기는 했지만 지금의 현실을 겪고 있는 건 아니니까. 한쪽 귀를 열고 있지만 한쪽 귀는 닫혀 있다는 걸 느낄 때도 많았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그 귀를 조금 더 열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 비정규직 일을 하는 친구 중 하나는 자신이 쪽팔리다고 했다. 내가 고작 이런 일을 하려고 20여 년을 달려왔나 싶은 생각 때문에 수치심을 느낀다고 말이다.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친구도 많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굉장히 아프더라.
지극히 비참한 영화 속 현실 묘사 속에는 삶을 낙관할 만한 어떤 종류의 판타지도 없는 것 같다. 전작 <유리정원>(2017)에서는 ‘재연’(문근영)이 자유롭게 춤을 추는 아름다운 판타지 시퀀스를 넣지 않았나. 어째서 이번 영화에서는 일말의 희망을 느낄 대목조차 없는지.
이야기를 기획한 순간부터, 행복한 순간이 떠오르지 않더라. 물론 소수에게는 여전히 행복할 수도 있는 세상이다. 평범한 사람들 역시 극장을 나서고 맛있는 걸 먹고 행복하게 수다도 떨면서 살아가기는 한다. 하지만 동시에 ‘준’처럼 닭장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코로나19가 콜센터에서 가장 빠르게 확산했던 게 무슨 의미인가. 내가 바라본 젊은이들의 공간은 그만큼 숨이 막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젊은이의 양지>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지었다. 10대, 20대, 30대의 청춘들에게 양지라는 게 없는 것 아닌가 싶어서.
이 숨 막히는 현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나. 비단 이번 작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명왕성>(2012) <마돈나>(2014) <유리정원> <젊은이의 양지>까지, 낙관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줘 온 당신의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 건가.
생각 좀 하고 살자고. 숨 좀 쉬고 살자고. 아마 그게 영화의 주제 아닐까. 그런데 코로나19로 숨이 더 막히는 시대가 왔다.(웃음) 촬영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모두 마스크를 써야 한다. 언론시사회 때 좌석 간 거리 두기를 하고 모두 마스크를 쓴 채로 앉아있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와 주셔서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비극적인 세상이 왔다고 할까. 나에게는 이런 현실이 큰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새로운 작품 <오마주>의 촬영까지 마친 거로 안다.
내 전작 <레인보우>(2009)의 연장 같은 영화다. <기생충>의 이정은 씨가 주연한다. 1960년대에 활동하던 홍은원 감독의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가는 내용으로 블랙 코미디 요소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지난주 <오마주>를 크랭크업하고 바로 <젊은이의 양지>를 개봉하는 상황이다.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날씨 좋은 날 마스크를 벗고 하늘을 볼 때는 너무나 행복하다. 숨을 쉬는 느낌이다.
사진_ 이종훈(스튜디오 레일라)
2020년 10월 28일 수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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