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2016년에 촬영해 2018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후 드디어 개봉하게 됐다. 축하한다. 소감은.
촬영할 때는 어떻게든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큰 영화제에 걸릴 기회를 얻은 데다 상까지 받아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데 이후 거짓말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배급하겠다고 나서는 데가 없어 2년여를 기다리다 직접 해야겠다는 생각에 영진위(영화진흥위원회) 배급지원에 공모했고 다행히 선정됐다. 이후 배급사가 정해지면서 원활히 진행 중이었는데 코로나19로 또 상황이 이렇게 됐다. 매번 운을 테스트하는 느낌이다. (웃음)
영화를 만들었던 당시와 현재,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태도에 변화가 있다면.
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영화를 보게 되면서 부족한 점이 보여 얼굴이 빨개진다. 원래 일기 쓰듯이 영화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거짓이 없었으면 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고, 지금도 이런 생각은 변함없다. 단지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를 했었다면 최근엔 좀 라이트한 얘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최근에 모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나오는 길에 현실도 어두운데 굳이 영화에서까지 보는 게 좋은가라는 물음이 따르더라.
라이트한 이야기라 한다면, 어떤 종류일까.
성을 주제로 한 핑크 무비? 코믹하고 귀여운 성 소수자 혹은 그에 준하는 특이한 취향을 지닌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 그들의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다.
여성 감독과 배우 중심의 여성 서사가 요즘 트렌드라면 트렌드라 오랜만에 만나는 남성 중심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반가웠다. <비행>은 비행(飛行)을 위해 비행(非行)에 몸담는 두 청년, 탈북자 ‘근수’(홍근택)와 양아치 ‘지혁’(차지현)의 이야기다. 양아치와 탈북민을 파트너로 설정한 이유는.
지혁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가 있다.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못 해 한국을 떠나려 하는 마음을 지닌 친구다. 지혁과 대조적인 인물을 생각하다 탈북민으로 설정하게 됐다. 떠나고 싶은 지혁과 달리 근수는 무엇보다 한국에 정착하고 싶은 인물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가져가려고 했나. 레퍼런스로 삼은 작품이 있다면.
특정 영화를 참고하지는 않았고 대비가 강한 영화를 찍고 싶었다. 캐릭터, 비주얼, 남과 북 등 콘트라스트에 집중했다. 영화의 전반적인 톤은 라이트한 느낌보다 다소 어둡고 무겁게 가져갔다.
날아오르기 위한 수단으로 ‘돈’을 선택한 두 청년은 운반하던 마약을 빼돌리게 된다. 극 중 ‘빙두’, ‘얼음’ 등 마약을 지칭하는 속어를 비롯해 마약을 껌 통 안에 넣어 실외기 옆에 놓거나 우체통 안에 넣는 등 마약 유통 현장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취재하느라 고생했겠다.
전세계적으로 북한산 필로폰이 퀄리티 면에서 인정받고 실제로 국내로 밀수가 많이 된다고 들었다. 처음에 자료 조사차 경찰서를 찾아갔는데 공식적인 이야기만 할 수밖에 없으니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상에서 마약상에게 접근했다. 계속 살 것처럼 굴다 끝내 안 사니 욕하면서 연락을 차단하더라. (웃음) 그러던 중 한 명이 자신이 걸어온 길 즉 마약 운반책이 된 이유 등을 상세히 알려줬다. 나 역시 영화 준비 중이라고 솔직하게 다가갔다. 극 중 껌통, 우체통, 실외기 등등은 실제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특히 실외기 옆에 잘 놓고 간다고 하더라.
앞으로 실외기를 보면 그 옆을 유심히 쳐다볼 것 같다.(웃음) 근수를 연기한 홍근택 배우와 지혁을 연기한 차지현 배우 모두 개성이 강한데 묘하게 극에 녹아든다.
홍근택 배우는 같은 학교 출신으로 당시에도 꽤 안정적으로 연기를 뽑아내는 배우라고 우리 사이에서 평이 자자했다. 차지현 배우의 경우 단편 <햄버거맨>(2015)을 함께 했는데 특유의 날 것 같은 느낌이 좋았고 다시 뭉치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비행>은 취업준비생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이야기가 주축인 단편으로 준비했었다. 그러다 마약과 탈북민 코드가 들어오면서 보여줄 게 많아져 장편화됐고 캐릭터에도 변화가 생겼다.
배우에게 특별히 주문한 연기 방향이 있다면.
근택 배우에게는 자제를, 지현 배우에게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했다. 근택 배우의 경우 침묵에서 오는 힘이 좋아 이점을 살리고 싶었다. 그런데 근택 배우는 왜 못하게 하냐고 또 지현 배우는 왜 구체적인 디렉팅을 안 주냐고 묻더라. 중간에 한 번 서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바로 화해했지만 말이다. 당시는 화가 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다 이해된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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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를 돌이켜 볼 때 쫓기는 느낌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극 중 두 청년 역시 무언가 혹은 누군가로부터 늘 쫓기는 인상이다.
쫓는 것의 실체가 없다는 게 중요하다. 영화를 유심히 보면 두 청년이 아무도 안 쫓아오는 데도 계속 뛰고 있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당시에는 금전적인 압박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된 지금 돌이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실체 없는 압박에 쫓겼던 거지.
그 외 당신의 20대가 투영된 지점이 있나.
코인 세탁소 신이다. 빨래 돌리다가 정말 눈물 난 적이 있다. 한때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아까 잠시 말했듯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후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잘 안되기 시작하더라. 재작년쯤 도망가려고 했는데 벌여 놓은 일이 있어 도저히 나갈 수 없었다.
떠나고 싶었던 이유가 뭘까.
한국은 자유롭게 창작하기 힘든 환경인 것 같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개인적으로 일기 쓰듯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그게 힘들다. 상업적인 잣대로 재단하니 몇 개의 시나리오를 보여줬지만, 안 팔렸다. 지금 광고 일을 하고 있는데 광고주의 입맛에 휘둘리다 보니 더 심하게 느낀다. 그래도 <비행>으로 희망과 가능성을 발견해 놀랍고 감사하다. 내 뜻대로 촬영해 개봉까지 했으니 말이다!
<비행>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나.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으면 한다. 잘못된 방법일지라도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있으니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도 힘내시면 좋겠다.
일기 쓰듯 솔직하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일기를 전하는 매체로 영화를 선택한 까닭은.
어릴 때부터 뷰파인더를 통해 무언가를 보는 게 좋았다. 중3 즈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파인더에 눈을 대고 있는 사람이 감독이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영화를 전공했다. 영화는 사각형 프레임 안에 신념과 가치와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매력적인 매체다. 사각형 프레임 안에서 내가 본 것과 또 내가 선택한 프레임으로 바라본 세상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대학교 가 보니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보는 사람은 촬영 감독이더라. (웃음) 그래서인지 지금 친구와 함께 광고 회사를 운영 중인데 주로 촬영 작업을 담당하고 있다. 와중에 가끔 연출 본능이 꿈틀거리기도 한다. 특히 외부 감독과 일할 때 그렇다. 최근 들어 창작 에너지가 다시 타오르는 중이다.
차기작 계획은.
일단 <비행>을 개봉하고 난 후 옴니버스 단편에 들어갈 것 같다. 아까 얘기한 라이트한 핑크 무비를 옴니버스로 생각 중이다. 계획만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 영향으로 일이 다 끊긴 덕분(?)에 착수가 빨라졌다.
마지막 질문! 소소한 행복을 꼽는다면.
집에서 풀스(플레이스테이션)로 철권 등 격투 게임을 한 시간 정도 하는 거다. 아, 그리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비행>을 함께 해준 배우들이 잘됐으면 좋겠고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출중한 재능을 갖춘 친구들이고, 그 능력이 빛을 발하는 데 <비행>이 작게나마 도움됐으면 한다.
2020년 3월 19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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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써드 아이비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