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안개처럼 스며드는 서스펜스 <비스트> 이정호 감독
2019년 7월 4일 목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이정호 감독이 6년 만에 <비스트>로 관객을 찾는다. 여중생 딸을 잃은 비통한 아버지의 참담한 복수를 그렸던 <방황하는 칼날>(2013)이후 <더 폰>(2015), <석조주택 살인사건>(2017) 등 각색 위주 작업을 해왔던 그가 내놓은 신작 <비스트>는 오랜만에 만나는 진하고 딥한 형사물이다. 같은 목표를 향해 다른 길로 달려가는 두 형사의 충돌과 파국을 무겁고 진중하게 다룬다. 이성민과 유재명 그리고 전혜진까지 연기 잘하는 배우들과 일명 ‘치료’ 모임을 형성한 75년 동갑내기 촬영, 조명, 음악 감독과 함께 일군 결과물인 <비스트>. 기존 형사물과 차별화된 에너지로 관계의 역전에서 오는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비스트>는 오랜만에 만나는 웃음기 싹 거든 형사물이다. 프랑스 영화 <오르페브르 36번가>(2004)가 원작인데, 어떤 점에 끌렸나.
제안을 받고 원작을 봤는데 2000년대 영화임에도 70년 대 알랭 들롱이 주연했던 고전 프렌치 형사물 같은 느낌이었다. 결말 부분에서 두 형사가 서로 총을 겨누는데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고, 두 사람의 관계를 좀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리메이크하는 과정에서 취사선택한 부분은.
전작인 <방황하는 칼날>(2013)도 그렇고 각색하면서 원칙이 있는데 바로 정서는 유지하되 스토리는 변주한다는 것이다.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닮은 듯한 느낌이 들도록 한다. 원작은 초반 은행 강도 사건이 메인인데 우린 실종과 살인 사건을 다룬다. 두 형사와 정보원, 세 인물 관계만 그대로 따오고 나머지는 대부분 바뀌었다. 또 원작은 실화가 바탕이지만 <비스트>는 그렇지 않아 장르적으로 다가갔던 초반과 달리 후반부 드라마로 이어가는 데 있어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괴물화 되기 전 경계에 있는 형사와 30% 정도 본색이 드러난 또 다른 형사 그리고 완전한 비스트(괴물), 세 짐승이 충돌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

전작 <방황하는 칼날>(2013)과 마찬가지로 이번 역시 피해자가 여학생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단지 인간으로 바라볼 뿐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여학생이 지닌 순수한 이미지로 인해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들이 좀 더 연민이 생길 거로 생각했다. 스포일러지만, 극 중 범인으로 지목당하는 예비 사제와의 관계에서도 남학생보다 더 자연스럽지 않겠나.

분위기가 굉장히 다크하다. 개인적으로 그 점이 좋았지만, 대중적으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게. 얼마 전 ‘골목식당’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는데 대중은 마름모의 가장 넓은 부분에 포진해 있다는 말이 나오더라. 그 이야기를 듣고 영화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비롯한 모든 감독이 흥행을 떠나 많은 관객이 호응하기를 원할 거다. 지인들이 상업 영화를 하라고 하는데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게 상업 영화가 아니고 뭔가! (웃음) 내가 흥미 느끼는 것을 최대한 장르적으로 재미있게 접근한 건데 말이다. 그래도 봉준호 감독님의 <기생충>이 900만 돌파하는 걸 보고 점차 대중의 영화 감상 폭이 확장되고 있다고 느꼈다.

경계에선 선 형사 ‘한수’(이성민)와 (당신의 표현을 따르자면) 30% 정도 비스트화된 ‘민태’(유재명), 캐릭터를 구축하며 둔 주안점은.
말했듯이 ‘민태’는 30% 정도만 넘어간 사람이라 (웃음) 어떤 명확성을 주지 않았으면 했다. 그는 범인을 잡고자 하는 마음은 강하지만, 좀 더 정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는 인물로 어떻게 보면 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에 반해 ‘한수’(이성민)는 범죄자를 정보원으로 이용하는 등 무엇보다 악의 타도와 범인 잡는 것을 우선시한다. 현재 그는 잡아도 잡아도 끝없이 범죄가 반복되는 현실에 어느 정도 지친 상태다.

두 형사가 조직 내에서 다툼하는 과장이라는 지위가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한편으론 대립각을 세우기에 상대적으로 작은 권력이라는 인상이다.
‘한수’나 ‘민태’나 자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한수’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는 사람이다. 범죄를 접할수록 그가 행사하는 폭력의 강도가 세지는데, 그것을 제어 못 하는 스스로에 흠칫 놀라기도 한다. ‘시지프스’ 같다고 자신을 표현할 정도로 거듭되는 범죄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있고 이는 그를 범죄자와 형사의 선을 왔다 갔다 하게 한다. ‘민태’는 ‘한수’를 향한 라이벌 의식과 열등감 그리고 질시를 마음 깊숙이 지녔는데 그게 승진을 놓고 다투는 모습으로 표출됐다고 보면 된다.

두 형사가 원래 파트너였다고 나온다. 무언가 전사가 있을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캐릭터 간에 좀 더 뚜렷한 과거사가 있었다. 둘이 틀어진 계기도 확실했는데 이상하게 원고를 거듭할수록 자꾸 거둬내게 됐다. 선명하지 않고 다소 모호하게 지켜보는 느낌으로 가게 되더라. 아마도 원작이 지녔던 아주 건조하고 쓸쓸한 정서가 뇌리에 남아서가 아닐까 한다.
 <비스트> 스틸컷
<비스트> 스틸컷

극 중 캐릭터를 이야기하면서 ‘춘배’(전혜진)를 빼놓을 수 없겠다. 트러블메이커라고 할 정도로 대부분의 사건이 그로부터 추동된다.
원래 원작에서는 남자였고 시나리오도 남자로 생각해서 썼었다. 한 선배를 떠올리며 썼는데 연기는 정말 잘하겠지만, 인물에 호기심이 별로 안 생길 것 같더라. 그래서 정말 생양아치 같은 젊은 배우를 물색했는데 결국 못 찾았다. 색다른 숨결을 불어 넣고 싶던 차에 전혜진 배우를 만났다. 기존에 그녀가 지닌 도시적이고 세련된 모습 위에 어딘지 건들거리고 삐딱선 타는 인상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묘한 에너지를 품고 있더라. 제안하니 의외로 쉽게 OK 했고, 이후 제작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춘배’가 등장하면 배우 보는 맛으로 극을 끌고 갈 수 있겠다고 말이다.

특이한 외양과 점핑하는 불안정한 감정 등 독특한 모습이다.
머리를 다 밀지 혹은 전체 문신으로 할지 등 외양 관련해 논의를 많이 하다가 결국 최대한 걷어내고 손에만 임팩트 있게 문신하는 거로 했다. 어릴 때부터 뒷골목에서 거칠게 살아온 아이라 마치 갑옷 같은 느낌으로 문신이 필요했고, 후드를 써서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감추는 모습을 보이려 했다.

이성민 배우와는 데뷔작 <베스트셀러>(2010)부터 <방황하는 칼날>에 이어 벌써 세 번째 호흡이다.
원래 다른 영화 스케줄이 잡혀 있었는데 마침 11월과 12월이 빈 상태라 다행이었다. 우리가 작년 11월에 크랭크인했거든. 전작을 함께 했기에 별 고민 없이 수락하신 듯하고 서로 잘 아는 사이라 아주 편했다. 원래 수줍고 말이 없는 분인데 주연급으로 활동하시면서 성격이 좀 변하셨더라. 아무래도 책임감과 의무감을 많이 느낀다고 하시면서 말씀 그대로 현장이나 마케팅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주연 배우로서 역할을 다 하셨다. 또 내게 조언도 많이 해 주셨다.

어떤 조언인가. 궁금하다.(웃음)
요즘엔 근로 환경이 바뀌었다고, 평소처럼 느긋하게 하면 안 된다고 하시더라. <방황하는 칼날>(2013) 이후 오랜만에 작업하는 데다 작업 스타일이 좀 느린 편이거든. (웃음) 상대역인 유재명 배우와의 호흡도 아주 좋았던 게 이번엔 거의 리허설 없이 처음 부딪쳐 한 연기가 많았다. 두 분이 서로 상대 연기를 보며 재밌어 하셨다.
 <비스트> 스틸컷
<비스트> 스틸컷

최종하 조명감독과 주성림 촬영감독, 홍주희 미술감독 그리고 모그 음악감독까지 모두 <비스트>의 진하고 딥한 분위기에 일조한 모양새다. 특히 푸른 톤의 안개와 붉은 톤의 술집, 육탄전이 벌어지는 미로 같은 공간과 낡은 아파트 등 미장센이 뛰어나다.
어쩌다 보니 우리가 75년생 모두 동갑이었다. 그래서 ‘치료’가 필요한 모임을 만들 정도로 정말 호흡이 최고였다. 아무래도 비슷한 시대와 문화를 공유했으니 공감대가 넓고 깊었다. 밤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모노톤으로 가면 너무 무거울 듯해서 비주얼적으로 분위기를 업할 수 있는 컨셉을 가져갔고 그에 맞춰 서로 아이디어를 많이 냈었다. 과 한지 덜 한지 제약에 갇히지 말고 과감하게 시도해 보라고 주문했었다. 음악도 극을 너무 짓누르지 않는 선에서 힘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니 기타 선율을 들려줬었다. 그간 모그 음악감독이 여러 작품을 했지만, 새롭게 시도할 수 있어 좋았다고 하더라.

직접 각본(각색)을 맡아 하는데 평소 현장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호하나?. 아니면 철저하게 계획하고 들어가는 편인가.
영화란 해석의 놀이터 같은 느낌이다. 그만큼 같은 시나리오를 봐도 제각각 의견이 다르다.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배우 역시 나름 캐릭터를 분석해 오는데 내가 생각한 모습도 있지만, 다른 해석을 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다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기조는 잡아 놓는다. 그 안에서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현장에서 형성되는 에너지를 선호하고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편이다. 계속 고치는 작업을 거듭해야 하니 한편으론 고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즐거움도 크다.

폭력과 잔인의 노골적인 전시가 없지만,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많이 순화했다고 밝힌 바 있다.
솔직히 그렇게 잔인한 장면은 없었다. 다만 극 중 여자인 ‘춘배’가 얻어 맞고 형사와 노인이 싸움하는 장면이 불편할 것 같다는 반응은 있었다. 첫 장면에 수건을 씌운 채 때린 것도 직접 타격하면 너무 잔인할 것 같아서였는데.. 봐서 알겠지만, 영화 속에서 직접적인 학대와 가학적인 장면은 하나도 없다. 과시를 위한 폭력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방향으로 끌고 갔다. 원래 호러 마니아로 고어물 역시 즐겼었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나 역시 잘 안 보게 되더라.

영화라는 게 참 긴 시간이 소요되는 장기 프로젝트다. 작품 준비하며 힘들었던 점은.
일이라는 게 하다 보면 여유가 생기고 노하우가 쌓여야 하는데 영화는 하면 할수록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굉장히 골초인데 <비스트> 시작하며 금연을 선언했다. 그만큼 나 자신을 한계 속에 밀어 넣고 작업했다.

외적으로는 아파트 습격 장면이 가장 힘들었다. ‘한수’(이성민)와 ‘민태’(유재명)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치고 들어오면서 야기되는 서스펜스가 격돌하는, 혼란의 도가니탕 같은 장면인데 촬영 현장도 정말 혼돈 그 자체였다. 둘이 물리적인 액팅 없이 시선이 교차하며 정적인 서스펜스를 형성해야 하는 만큼 밀도 있는 촬영이 요구됐거든. 촬영 후 탈진할 정도로 진이 다 빠졌었다.

<비스트>만의 차별화된 쾌감은 뭘까. 마음껏 자랑해달라! (웃음)
음.. 스토리보다는 어쩌면 평범하고 한편으론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두 형사를 중심으로 관계의 역전에서 오는 서스펜스가 아닌가 한다. 기존의 발로 뛰는 형사의 모습이 아니기에 다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방식일 수 있지만, 두 인물이 변해가는 모습에 어느새 영화에 젖어 들 거다. 극 중 안개 낀 장면이 많은 데 선명하지 않은 안개같이 서서히 스며드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맛볼 수 있을 거다.

차기작 소개를 부탁한다.
2년 동안의 작업을 마치며 <비스트> 개봉 후 잠시 쉬려고 했는데, 봉준호 감독님이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시나리오 작업했다는 인터뷰를 읽고 순간 ‘놀면 뭐 하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웃음) 일단 그동안 못 본 책과 영화를 좀 챙겨 보려고 한다. 한마디로 아직 정해진 게 없다는 얘기다!

마지막 질문! 최근 당신을 사로잡은 주제는 뭘까. 즉 관심사는.
좀 집착? 하는 버릇이 있다. 가령 물건을 산다고 하면, 그 기원과 탄생까지 탐색하기에 보통 보름 정도 걸린다. 밥을 먹을 때도 식당 한곳을 정하면 주야장천 그 집만 가곤 한다. 아까 잠시 말했듯 호러를 매우 좋아했었는데 이젠 미스터리 스릴러가 지닌 이야기 변주와 긴장감 형성에서 오는 서스펜스에 관심이 생겼다. 앞으로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서스펜스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슬쩍 든다.


2019년 7월 4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사진제공. NEW

0 )
1

 

1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