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미처 몰랐는데 '내 말'을 찾는 데 재미를 느낀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한강에게>에서 오랫동안 함께했던 연인을 떠나보내는 중인 젊은 시인 '진아'가 돼 그 감정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이한 배우 강진아의 작업 소감이다. 평소 피 같은 음악을 찾아 그것을 집요할 정도로 반복해 듣으며 즐기는 것처럼 이제 '자신'만의 말을 찾는 기쁨에 눈을 떴다고. 언어를 발굴하고 새 생명을 불어넣어 그 환태를 지켜보는 게 시라고 한다면, 강진아는 이미 시인의 자질을 갖췄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잠재된 시인의 본능을 간파한 박근영 감독과 수많은 독립 영화를 통해 연기력을 다져온 강진아가 만나 완성한 <한강에게>. 한 편의 시처럼 스며든다.
#<한강에게>
<한강에게>는 긴 시간을 함께한 연인을 잃은 젊은 시인 '진아'(강진아)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에게 '한강'은 슬픔과 기쁨 등 여러 감정이 복합된 장소인데 당신에게 '한강'이란 공간은.
강진아 배우 (이하 강진아) 교복 입고 서울로 연습실을 다녔었는데 그때 보는 한강이 반짝반짝 너무 예뻐서 꼭 서울에 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내게 한강은 꿈과 설렘의 이미지로 크게 다가온다.
박근영 감독 (이하 박근영) 젊은 시절을 보낸 가장 낭만적인 장소이자 생각보다 매우 큰 강이라서 가끔은 공포로 다가오는 강이기도 하다. 청춘을 보낸 중요한 배경이면서 매우 일상적인 장소였다. 한강에서 꽤 떨어진 학교에 다녔는데 학교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별일 없어도 친구들과 한강까지 걸어갔다 돌아오곤 했으니 말이다. 동시에 개인적인 큰 아픔이 담긴 곳이다. 지금도 5분 거리 근처에 살며 자주 걷고 운동하고 자전거도 타는데 그때마다 다른 감정을 느끼고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른다.
시나리오의 대사를 지우며 촬영했다고 하던데... 대사를 지운다는 것의 의미는.
강진아 말 그대로 시나리오에 구체적인 대사가 없었다.(웃음) 감독님의 전작 <사일런트 보이>(2014)가 매우 꼼꼼하게 써진 시나리오였기에 사전에 대략 설명을 들었지만, 실제 시나리오를 받고 놀랐다.
박근영 대사나 전개가 직접적인 것보다 가늘게 영화의 맥락에 맞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연기자가 해당 장면의 목표를 명확히 알기에 엉뚱한 대사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배우가 일상의 말을 해주길 바랐다. 그의 감정과 생각을 가늘게 표현하는 대사가 나온다면 성공적이라 생각했기에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돌려서 말하고 유도하는 방식으로 연출했다. 그렇게 하는 게 시적이라고 생각했다. 시는 은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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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각본을 집필했는데, 집필 과정에서도 대사가 특정되지 않았던 건가. 연출하는 입장에서 생각했던 것과 다른 대사가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또 배우 입장에서 연기하는 데 어렵지 않았나.
박근영 소설처럼 혹은 대사를 정식으로 따며 쓰는 등 여러 버전으로 각본을 썼었다. 최종 대본에는 대사를 지웠지만, 예시로 몇몇 부분은 남겨뒀었는데 그것 역시 은유적이고 상징적이었다. 주요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예시조차 없이 해당 장면의 주제와 목표만 정하고 들어갔는데, 워딩은 다르되 분위기는 대체로 생각했던 것과 비슷했다.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건네기 전에 여백이 많은 시나리오이니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찾아가고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미리 메모를 전달했었다. 이후 내가 없는 자리에서 배우끼리 만나 전사 혹은 캐릭터에 관한 개인적인 생각들, 자신이 좋아하고 집중하는 것 등등 서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 달라고 부탁했었다.
강진아 촬영 들어가기 전에 함께할 배우들과 만나 상대에 대해 점차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모르게 은근하게 그 분위기가 주입된 것 같다.
극 중 '진아'(강진아)의 선배로 이요섭, 전고은 감독 부부가 출연한다. 두 감독이 나눈 대화가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실제 사연이라고 미루어 짐작했었는데.. 아닌 건가?(웃음)
박근영 음, 시사회 마친 후 그들이 그 장면의 모든 것이 각본이었다고 해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말했듯이) 그 신에 대한 목표와 주제를 정하고 들어간 후 현장에서 모두 채워나갔다는 거다. 사실과 허구가 혼재돼있다고 보면 된다. 두 감독이 노련하게 스스로 연기를 연출한 결과 리듬감이 잘 살아날 수 있었다.
강진아 당시 두 감독님이 작품 준비 중이라 많이 지친 상태였는데 함께 해주셨었다. 평소 문학을 사랑해서 가능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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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아
200여 편의 장·단편 독립 영화에 출연했지만, 정작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전고은 감독의 <소공녀>(2017)에서 주인공 '미소'(이솜)의 친구, 일명 '링겔녀'로 이다.
사실 <한강에게>가 <소공녀>보다 먼저 촬영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자신이 참여한 영화를 많은 이가 봐주길 희망하는 건 모든 배우의 공통적인 바람일 거다. 독립영화의 한계에 대해 고민했던 시기도 있었을 것 같다.
솔직히 내가 좀 피곤한 스타일이다. 연기는 하고 싶은데 유명해지고 널리 알려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크다. 연기를 계속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항시 하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요리 교실에서 서브 요리사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한 학생 어머니가 <소공녀>를 네 번이나 봤다면서 알아봐 주셨는데 기분이 좋으면서도 쑥스러워 묘하게 뒤로 숨게 되더라. 마치 소라게처럼.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두고싶지 않다. 얼마 전에 드라마를 잠깐 했는데, 크지 않은 배역임에도 마치 도토리 모이듯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더라. 아르바이트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또 드라마 현장을 경험하며 많은 걸 깨달았다. 정말 철저하게 준비해가지 않으면 낙오된다는 거다. 다음 기회가 온다면 제대로 해보고 싶다.
내성적이라고 했는데 가만 보면 의외로 배우들이 내성적인 성격이 많더라. (웃음)
그럴지도. 성격은 내성적인데 내 안에 에너지가 아주 많다. 아마 너무 틀 안에 갇혀 자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그 에너지를 쏟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TV 드라마 속 배우를 보며 문득 사람을 연구하면서 나를 반성하고 또 보는 이에게 감동도 줄 수 있는 일이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진로를 정했다. 물론 주목받고 싶은 열망도 컸을 거다. 이후 대학 진학 후 뭐라도 금방 될 줄 알았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러 현재에 이르렀다. 이제껏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연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 눈에 안 띄었어도 연기를 쉰 적은 없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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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없는 곳에 카메라도 없다고 할 정도로 오롯이 극을 끌어간다. 첫 장편 주연 소감은.
작업할 때는 못 느꼈던 부분으로 단편과 장편에 구분 없이 임하는 태도는 여전하다. 다만 관객을 대함에 있어 내 역할에 변화가 있다. 무대 인사 혹은 GV 등 행사에서 내가 좀 더 능동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커졌다. 마음의 열을 올리려 한달까. <한강에게>가 개봉까지 이어져 감사하고 강물처럼 잘 흘려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오랜 연인을 상실한 젊은 시인 '진아'를 연기한다. 시공부를 꽤 했을 것 같다.
감독님의 권유로 이영주 시인의 시수업에 참석했었다. 시를 좋아하는 분과 등단을 준비하는 분 등 5~6명이 구성된 소규모 수업이었는데 매주 시를 한 편씩 써와 발표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었다. 초반에는 시를 배우는 것도 쓰는 것도 처음이라 겁이 나고 두려워 다른 사람의 시를 듣는 것에 집중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할아버지와의 통화를 소재로 시를 썼다. 할아버지가 아주 엄격하셔서 어릴 때부터 무서워했는데 지금은 가끔 전화를 거셔서 악착같이 살라고 하시며 당신이 후회하는 부분을 쏟아내곤 하신다. 그런 할아버지를 향한 애증?으로 똘똘 뭉친 그로테스크한 시였던 것 같다.(웃음)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시수업 끝난 후 같이 먹던 쌀국수가 참 맛있었다는 거다.
시수업을 통해 느낀점이 있다면.
내가 평소 단어를 많이 알고 있거나 어휘력이 뛰어나지 않은 편인데, 의외로 '내 말'을 찾는 데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나도 모르는 이런 내 모습을 먼저 간파해서 박근영 감독님이 세 번이나 날 불러준 건 아닌가 하고 혼자 추측해 본다. (웃음)
박근영 감독과 작업을 여러 번 했는데 옆에서 지켜본 그는 어떤 인물인가. <한강에게>를 보면 내성적이고 차분할 것 같은 인상이다.
그 느낌과 비슷하고 거기에 우직스럽다고 할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황소처럼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분으로 절대 빈말을 날리는 분이 아니다. <한강에게> 캐스팅의 경우도 이런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하길래 축하드린다고 하고 (주연이) 누군지 참 좋겠다 싶었는데, 나중에 그러니까 제작이 확실해진 후 내가 주인공이라며 전화를 주셨다. 그런 묵직함이 아주 가끔 다소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내가 살짝살짝 재촉하는데 아주 잘 받아들이신다.
'진아'는 지극한 슬픔에 잠겨있지만, 그럼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인물로 대놓고 아픔을 토해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연기하기 힘들었겠더라. '진아'가 되기 위한 과정은.
감독님이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자전적인 이야기로 이미 익숙했었고, 준비하며 배우끼리 각자가 경험한 상실에 대해 대화를 많이 나눴었다. 가족, 연인, 반려동물 등 여러 상실을 안고 살아가지 않나. 얘기하는 중에 내 안에 담겨 있던 상실이 문득문득 치고 올라오더라. 그 때문인지 작업하는 동안 내가 경험했던 상실을 보내준다는 기분이 들고, 한편으론 시원한 느낌도 있었다. 촬영할 때는 그 신과 내용에 집중했고, 함께한 배우들에 대한 호감이 컸던 덕분인지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다.
극 중 이름 역시 '진아'로 본명과 같은데 연기하는 입장에서 어떤 차이가 있나.
처음에는 내 이름으로 연기하는 데 약간 거부감이 들었지만, 감독님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접점을 활용할 의도라고 하셔서 납득했다. 확실히 도움이 됐던 게 상대 배우 역시 본명과 극 중 이름이 같으니 좀 더 빨리 그에게 다가간다고 할까. 가령 강길우 배우의 극 중 이름이 '길우'가 아닌 '철수'였다면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했을 거다. 그런 면에서 배우의 실명 사용이 도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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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했듯 <한강에게>는 시나리오의 대사를 지운 후 현장에서 채워 넣는 특별한 방식으로 완성했다. 이런 방식의 작업 후 배우로서 변화가 있다면.
연기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시기가 있다. <한강에게> 작업 후 대사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떻게 뱉는지가 의미있다는 걸 알았다. 단순히 대사를 외워 연기하는 것을 떠나 나라면 정말 이렇게 말할까. 그 인물이 어떻게 느끼고 어떤 식으로 말할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더라. 보통 연기하면서 다음 장면의 대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엔 다음 대사의 빈자리를 해당 장면에 대한 생각으로 더 채웠던 것 같다.
평소 시를 즐기는 편인가. 좋아하는 시가 있다면.
서점에 가면 시집 코너에 가서 가끔 펼쳐 보고 그러다 마음에 들면 구입하곤 한다. 김경미 시인의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에 실린 '누가사는 것일까'를 아주 좋아한다. 이번 기회에 시인이 운영하는 팟캐스트를 듣게 됐는데 많이 위로되더라. 평소 내게 맞는 피 같은 음악을 찾으면 반복해서 듣곤 하는데 시도 그런 게 아닌가 한다.
'피' 같은 음악이라.. 재미있는 표현이다. 피 같은 음악 좀 소개해달라. (웃음)
좋아하는 음악은 정말 다양한데 영화 <아무르>를 보고 황정우 음악가가 작곡한 연주곡이 있다. 기쁠 때 슬플 때 그냥 아무 때나 항상 듣는다. 그리고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Eye In The Sky'를 특히 좋아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당신을 웃게 하는 것은.
요즘 고양이 영상 보는 것에 푹 빠져서 길냥이 만났을 때 주체를 못 하고 있다. 또 평소 범죄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다. 다음 생에는 프로파일러에 도전하고 싶을 정도로 흥미가 크다.
2019년 4월 18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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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목요일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