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그래서일까. 그는 굳이 전작의 이미지를 지우는 것을 목적으로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하지 않는다. <말모이>에서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우직한 엘리트 ‘정환’은 그 자체로 그의 마음을 움직였단다. 마음 모아 뜻 모아 헌신했던 그들의 신념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지만, 예상보다 아주 힘들었다고 털어놓는 그. 무엇을 바꾸려 하기 보다 흐름에 몸을 맡기고 순간순간을 걷어가는 요즘이란다.
일제 강점기하 조선어학회 우리말 사전 편찬 사업을 모티브로 한 <말모이>는 울림 있는 이야기다. 처음 캐스팅 제안받고 어떤 기분이었나.
무엇보다 역사에 기반해서 좋았고 시나리오 읽으며 울컥한 부분이 많았다. 막연히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는 이야기가 영화로 재해석돼 많은 분이 봤으면 좋겠다 싶었다. (해진) 형과 함께 하는 거라 더 끌린 것도 있다.
<범죄도시>에서 ‘장첸’(윤계상)으로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많은 이들이 당신의 차기작을 기다렸는데 조선어학회를 이끄는 엘리트 ‘정환’(윤계상)을 맡아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돌아왔다. 혹시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한 선택인 건가.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거나 혹은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한 게 아니다. 보면 알겠지만 참여 자체에 의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극 중 ‘정환’은 신념을 지닌 우직한 인물이다. 한편으론 ‘정환’의 한결같은 모습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라는 인상인데 연기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은.
그렇게 보였다면 어쩔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평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극 중 지르지 않는 캐릭터인데 바로 그 부분이 배우로서 욕심났었다. 어떻게 하면 지르지 않되 지르는 것처럼 보이게 할지 고민했다. 사실 촬영에 들어가면서 지르던 안 지르던 장면 하나하나가 힘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힘들었나.
극 중 인물들이 지녔던 신념을 표현하는 게 힘들었고 내 연기가 앞서 헌신한 분들의 힘듦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 고민했었다. 특히, 후반부에 우는 장면이 있는데 그 울음이 어떤 울음인지 상상하니 저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표현해 당시의 비통함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는데…. 나중에 체력이 떨어지니 육체적으로 힘들기도 했고, 연기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도 있다.
영화가 살포시 다가와 결국 감정의 폭풍을 일으키더라. 시나리오 읽으며 울컥했다고 했는데 특히 그런 장면을 꼽는다면.
음, 후반부 표준어 공청회 할 때로 각 지역의 우리말 선생님을 모시고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완성본을 보니 그 표정이 화면에도 잡혔더라. 정말 눈물이 글썽글썽했었다.
<택시운전사>의 각본가인 엄유나 작가의 연출 데뷔작이다. 캐릭터를 구축함에 별도의 주문이 있었는지.
‘정환’이 다소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인물로 보일지라도 절실함이 묻어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나 역시 그 방향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보면 알겠지만 극 중 ‘판수’(유해진)만 각성하는 게 아니라 ‘판수’를 통해 ‘정환’역시 변화하고 깨우치고 함께 성장한다.
유해진 배우와는 <소수의견>(2013) 이후 두 번째 만남이다. 호흡은 어땠나.
(해진) 형과 극 중 인물의 감정선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눴었다. 형은 하나의 신을 여러 버전으로 촬영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여러 버전을 만드는 건 장점이기도 단점이기도 하다. 모험 수라고도 볼 수 있다. 촬영할 때마다 연기가 (조금씩) 미세하게 다르기에 힘들더라도 여러 번 하다 보면 살아 있는 것 같이 생생한 장면을 뽑아낼 수 있어서 좋았다.
<말모이>의 매력 혹은 관객에서 소구점은.
영화 속에 푹 빠져 아픔이든 기쁨이든 웃음이든 그 감정을 즐기며 현실 세계를 잠시 잊게 하는 게 영화의 매력인 것 같다. <말모이>를 보면서 기쁘고 뭉클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자긍심과 행복함 그리고 고마움을 동시에 맛볼 수 있을 거다.
<범죄도시>(2017)의 흥행 성공 후 차기작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그런 질문을 많이 듣는데 흥행은…(내 소속사) 대표님이 걱정하시지 않을까. (웃음)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범죄도시>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게 그렇게 체감되지 않았었다. 단지 이후 시나리오가 좀 더 들어온다는 정도?
다만 <범죄도시> 전후로 차이가 있다면 내 마음가짐이 좀 달라졌다. 이전에는 매번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면 <범죄도시> 이후에 연기자로서 가야 할 방법을 알게 된 것 같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은 비슷하지만, 지금은 감독님과 동료 배우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됐다. 예전에 혼자 고민했다면 이젠 편하게 조언을 구하고 의견을 나누곤 한다.
혼자 고민했던 이유는.
당시에는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게 아니라 나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었다. 이젠 그렇지 않다. 작품 속 내가 어떻게 나왔는지보다 작품이 잘 나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한마디로 이전에는 내 연기적 욕심이 컸다면 이젠 나와 작품 간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았다고 할까.
GOD 20주년 기념 콘서트 등 여러 행사를 진행 중이다.
예전 가수로 GOD 활동할 때 멤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고, 이후 연기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라는 게 감독님과 동료 배우와 스태프들, 수많은 이들의 힘이 모여 완성되는 거 아닌가. 최근 GOD 멤버와 다시 뭉쳐 이런저런 활동하면서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게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다시 함께하게 돼 감사하고 행복하다.
연기를 시작한 초반에는 일부러 가수 이미지를 벗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 재결합해서 다시 활동하니 혼자였을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이게 내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믿음이 있는데)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능 ‘같이 걸을까’에 GOD 멤버들과 출연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걷는 동안 어떤 생각이 들던가.
정말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 걷다 보면 드라마가 펼쳐진다. 처음 걷기 시작한 후 다리가 너무 아파서 ‘괜한 짓을 했구나’ 싶었는데 결국 걷게 된다. 걸으면서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나와 관련된 일은 물론 같이 걷는 멤버들에 관한 기억, 지나가는 강아지, 심지어 갓난아기였을 때의 경험도 떠오른다니까!
그렇게 온갖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감각이 없어지며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고 할까. 3일 정도 지나면 그냥 걷게 되는데 내 존재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은 마음이 들며 서서히 좋았던 일들이 떠오른다. 어느 공원에서 순례자 동상을 보며 내 여정의 마지막도 저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제법 연륜이 느껴진다. 나이 든 덕분일까. (웃음)
그런가. 언제부터라고 콕 집긴 힘들지만, 나를 바꾸려는 생각을 버렸다. 이렇게 40년 동안 살아왔는데 바꾸고자 한다고 바꿔질까. 그냥 현재의 나를 고맙게 생각하고 지난 세월을 바라보게 된다. 믿음이 생긴 지 2년 정도 되는데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이번 산티아고를 걸으며 체험하게 됐다. 나이 들면서 점차 아주 기쁜 일도 맹렬히 원하는 것도 사라지는 것 같다. 막연하게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된다. 또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하게 되고 나보다 어린 친구의 말을 듣고 있으면 재미있고 그렇다. 이렇게 순간순간을 걷는 거겠지.
요즘 많은 아이돌 출신 가수가 연기를 병행하고 있다. 1세대 아이돌 출신으로 배우로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했다. 후배에게 조언한다면.
음, 내가 조언을 할 입장인지 모르겠지만….(웃음)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성실히 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당신도 (연기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는지.
생각해 본적 없다. 힘들었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장점이자 단점인데 뭔가를 시작하면 그 하나만을 바라본다. 익숙해질 정도로 실패가 거듭됐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말모이> 속 ‘정환’과 비슷한 게 고집이 세고 내 세계가 강한 편이다.
차기작은 어떤 작품인가.
영화를 준비 중인데 아직 말하긴 이르다. 예전엔 착하고 순수한 캐릭터 제안이 많았는데 요즘엔 호러 장르와 악역 등 좀 더 다양한 역할이 들어온다.
마지막 질문! 요즘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은.
음, 내일 내 생일이다!
2019년 1월 16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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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