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유해진의 연기에는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그간 개성 있는 조연으로 참여했던 수많은 작품에서 능청, 순박, 지질, 악독 등등 모습은 다르지만, 사람 냄새 깊이 배어있는 연기를 선보였었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자리바꿈한 <럭키>(2015)의 멋진 성공 이후, <택시운전사> 와 <1987> 이라는 참여만으로 의미 있는 두 작품에 겸허하게 함께했던 유해진이 <레슬러>로 돌아왔다. 이번에 아들 바보, 싱글대디 '귀보'씨로 코믹, 뭉클, 달달하게 내리사랑 쏟으며, 또 내리사랑 받으며 가족 이야기를 전한다. 유해진은 미혼에 자식 없는 자신이 간접적이나마 부모를 경험했고, 자식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레슬러>에 애정을 드러낸다. 또, 극 중 '귀보'와 청소, 빨래, 조리 등 살림 하는 모습이 아주 비슷하다며 웃는다. 외롭지 않냐고 묻자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하는 유해진. 그래도 그를 독점하고픈 겨울이가 곁에 있고, 좋아하는 EBS 다큐가 있으니 꽤 괜찮은 싱글라이프가 아닐까.
요즘 <레슬러> 홍보로 바쁜 시간을 보낼 것 같다.
홍보도 홍보지만, 다음 작품 <말모이> 촬영하러 다닌다. 이번 연휴에도 계속 일한다.(웃음)
<럭키>, <공조>, <택시운전사>, <1987> 까지 그간 흥행하지 않은 작품이 없었다.
그게 뭐 나 혼자 힘으로 인기를 얻은 건가. 작품들이 좋았던 덕분이다. 특히, <택시운전사>와 <1987>은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좋았었다. 참! 어제 2018 백상예술대상에서 (김)윤석 형과 어머니 나문희 선배(기자 주: <레슬러>에서 나문희와 유해진이 모자지간임)가 각각 남녀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해서 너무 기뻤다. 또, 개인적으로 친한 박희순이 상 타서 아주 기뻤다.
<택시운전사>나 <1987>로 조연상을 탐낼 만도 한데? (웃음)
아이고,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좋은 작품에 참여한 것만으로 의미 있고 충분하다. 민주화에 큰 족적을 남긴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에 내가 함께했다는 것, 그것도 드러난 인물이 아니라 음지에서 묵묵히 도움을 줬던 서민을 연기했다는 것에 만족한다. 사실 <택시운전사>에 이어 <1987>을 하며 내가 이런 좋은 역할을 연달아한다는 사실에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은 정말! 꿈도 안 꾸고, 생각도 안 해봤다. (김) 윤석 형이 수상 소감에서 ‘영화는 노력과 재능이 바탕이 되어야지만, 거기에 정성이 더해져야 한다’며 장준환 감독에게 공을 돌리고 싶다고 했는데, 어쩜 그렇게 장 감독님을 잘 표현했는지! 감탄했다. 감독님이 정말 현장에서 노력을 많이 하셨다. 정성에, 또, 정성에, 아휴 말로 다 표현 못 한다. 음....그래서 약간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정성 아닌가, 하하!
<럭키>(2015) 이후 첫 단독 주연작인데 코미디를 선택한 것이 좀 의외였다.
음, 코미디에 초점을 맞춰 홍보할 수는 있겠지만, 난 <레슬러>를 코미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 드라마인데 좀 더 유쾌하고 밝은 톤을 지녔다고 본다. 또, <럭키>는 주인공이 ‘킬러’라는 설정 때문인지 인물 자체도 선명하고 이야기도 진하다. 이번 ‘귀보’(유해진)는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아버지다.
<레슬러>로 올해 처음으로 관객을 찾는데, 워낙 강적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만났다.
대작 틈바구니에서 우리 같은 작은 영화도 필요하리라 본다. 큰 나무 틈 사이로 새싹들이 쏙쏙 꿋꿋하게 돋아나곤 하지 않나. 영화 후반부 ‘귀보’(유해진)가 아들 ‘성웅’(김민재)과 갈등이 폭발해서 엎어치기 하는데, 그 장면을 보고 (내가 나온 영화지만) 순간 찔끔했다. 우리 부모님도 나를 바라보며 행복해하셨겠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하긴, 어느 부모가 안 그렇겠나. 부모와 자녀 서로 간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주는 영화라고 본다.
가정의 달인 5월에 가족 관람하면 좋을 듯하더라.
그렇지? 아침에 운동 가려고 잠깐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나에게 영화 일이 힘들지 않냐고, 보통 영화감독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는 거다. 그래서 보통 대학에서 전공하거나, 현장에서 일하다가 데뷔하거나, 따로 아카데미를 다니는 등 다양한 경로로 감독이 된다고 얘기했다. 알고 봤더니, 아들이 영화 일을 너무 하고 싶어 했는데, 기사님이 안정적인 일을 하라고 반대를 하셨던 거다. 지금은 회사에 다니는데,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했던 것이 지금도 밟히시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부모 마음은 똑같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내가 자식이 있다면 머리로는 하고 싶은 일을 응원하겠지만, 실제로는 나 역시 잔소리하고 반대하지 않을까 싶다. 자식이 힘든 길을 걷지 않았으면 하는 게 모든 부모의 바람일 거다.
당신의 경우는? 부모님이 영화일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셨는지.
반대하셨었지. 연극을 한다는 게 고생길이 훤한데, ‘그래, 너 고생해라’하고 그냥 두시겠나. 실제로 어머니는 하고 싶다니까 그냥저냥 두고 보셨는데 아버지와는 갈등이 심했다. 원체 보수적인 분이라 당시에 돈벌이도 안되는 광대를 하려 한다고.(웃음) 처음 청주에서 연극 시작할 때 집에 안 들어가고 극단에서 살았던 적도 있다. 이후 군대 제대하니 아버지께서 이왕 할 거면 열심히 하라고 하시더라. 그때부터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이해 안 되고 정말 싫었거든. 다행히 내가 아버지가 걱정했던 것보다 밥벌이를 하고, 또 시간이 흐르니 풀어지더라. 다만, 어머니가 그 모습을 못 보셨기에 항상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있다.
<레슬러>에는 자식의 성공이 곧 내 성공이고, 맛있는 거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너무 잘 표현돼 있다. 남얘기 같지 않고 짠하더라.
이번에 간접적으로나마 부모를 경험할 수 있었고 한편으론 자식으로서의 나를 돌아봤다. 촬영하면서 <레슬러>는 부자(父子), 즉 아버지와 아들의 성장드라마다 싶었다. 자식에 올인해서 어느 순간 ‘자신’을 잃어버린 부모도 많다. 자식이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게 필요하듯이 부모 역시 자식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데 말이다.
극 중 아들 ‘성웅’(김민재)이 아버지 ‘귀보’(우해진)에게 짜증 내고 투정 부리는 모습 그대로 ‘귀보’가 어머니(나문희)에게 하는데, 참 익숙한 풍경이더라.(웃음)
그러니까! 투정 부리고 짜증 내고 말다툼하고....속으론 잘 해야지 하면서도 마음과 달리 툴툴거리고 말이다. 비가 올 것 같은데 우산 안 가져간다고 타박하고, 아픈데 병원 안 간다고 화내다가 또 화낸게 미안해서 속상해하고....그러면서도 가족이기에 이해하고 다시 웃을 수 있는 거겠지. 감독님이 자신의 어머니한테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고 하더라.
극 중 레슬링 하는 장면이 있는데 몸 만들고 기본 동작 익히는 등 준비가 만만치 않았을 거 같다.
다행히(?) 극 중 내가 직접 경기에 나가는 게 아니라서 장시간 레슬링 하는 장면은 없었다. 다만, 레슬링을 잘 알고 실제 하셨던 분들이 볼 때, ‘저게 레슬링이냐’ 이런 소리는 안 들을 정도로 준비하려 했다. 그래서 나름 열심히 연습했는데, 기본기를 흉내만 내는 것인데도 엄청 힘들더라. 서로의 몸이 부딪치며 경기를 한다는 게 그렇게 힘든 건지 몰랐다. 내가 평소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은 편임에도, 촬영을 여름에 한 것도 있지만, 잠깐만 연습해도 땀이 장난 아니게 흐르더라. 사실 내가 힘든 건 우리 아들(김민재)에 비하면 약과다. 영화라는 게 한 번 찍어서 오케이 되는 게 아니지 않나. 특히 이렇게 경기하는 장면은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번 찍는다. ‘성웅’이가 정말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했다. 나중에 우리가 부대찌개 먹으러 갔는데 사리도 안 시킬 정도였다니까!
지금 개그 날린 거 맞나? 훗....(웃음) ‘귀보’와 당신의 생활적인 면에서 싱크로율은 어느 정도?
음, 나야 미혼에 자식이 없지만, ‘귀보’와 생활하는 건 아주 비슷하다. ‘내 일은 내가 하자’가 신조라 지금까지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고 있다. 겨울이 밥부터 청소, 조리, 빨래 등등 다 직접 하는 편이다. 극 중 양말 빠는 게 정말 자연스럽지 않았나? 예전 자취할 때 세탁기도 없던 시절, 무궁화표 비누 슥슥 칠해 빨래판에 벅벅 문댔던, 오랜 경험이 쌓인 모습이라서다. (웃음)
극 중 두 여인 ‘가영’(이성경)과 ‘도나’(황우슬혜)의 사랑을 받는다. 무려 삼각관계의 주인공이다!
‘가영’의 감정은 성인 대 성인의 사랑이 아니라 어릴 때 선생님 좋아하듯이 막연한 동경인 거다. ‘귀보’가 ‘가영’의 감정이 일시적이라는 걸 모르겠나.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 친구(가영)가 사랑의 아픔(?)을 큰 상처 없이 극복하길 바라는 거지. 개인적으로 <레슬러>를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영’이 ‘귀보’를 향한 동경, ‘귀보’는 아들을, 또 어머니(나문희)는 ‘귀보’를 서로 짝사랑하고 내리 사랑하니 말이다.
혹 현실에서 삼각관계의 주인공이었던 경험이 있는지.
내가? 에이, 잠시 생각해보자. 아침에 잠깐 겨울이와 산책을 했는데, 겨울이가 이웃집 개를 보고 으르렁거리더라. 마치, 나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 그 순간이 문득 생각난다.
음, 남다른 유머 감각을 지녔다고 생각하겠다. (웃음) 젊은 친구들(김민재, 이선경)과 함께했는데, 호흡은 어땠나.
(이) 선경의 경우, 정말 순발력이 좋고 자신감과 활력이 가득한 친구였다. 첫 영화라고 들었는데 나중에 듣기 전까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드라마를 했었다고 해도 작업 현장이 다르다 보니 적응에 시간이 걸릴 수 있는데 정말 잘 적응하더라. 아들인 (김) 민재는 에너지가 굉장하다. 그리고 어린 친구임에도 옆에 있으면 든든한 게 있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봐라. 왠지 보호받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웃음)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2007) 이후 나문희 선생님과 다시 함께했다.
근 10년 만인데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으신지! “해진씨, 한 번 맞춰봐요” 라고 예전에도 어머니(나문희)는 항상 존칭을 쓰시면서 먼제 제안을 주셨었는데 이번에도 여전하시더라. 솔직히 그 정도 연기 연륜이면 그냥 촬영할 법도 한데, 꼭 미리 맞춰보신다. 뭐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으시다. 그런 내공으로 “넌 20년이지? 난 40년이야!” 이 대사 치시는데, 듣는 내가 다 짠해지더라.
오, 그 대사 들으며 나도 찔끔했었다. (웃음)
그게, 감독님 어머니가 진짜 한 얘기라고 들었다. 그런 대사는 머리로 만들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직접 경험했으니 가능한 거지.
개인적인 질문인데 연애는 안 하는 건가? 못 하는 건가?
촬영 현장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인연을 만나는 게 쉽지 않다. 영화 촬영하고 개봉하다 보면 1년이 훅 간다.
외롭지 않나?
당연히 외롭다. 친구들 만나 술 먹고, 다큐멘터리 좋아하니 EBS 시청하고, 겨울이랑 같이 보내고... 그렇게 지낸다.
<레슬러> 이후 활동 계획은.
음, <완벽한 타인>(연출 이재규)은 촬영을 마쳤고 지금 후반 작업 중인데 개봉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처음에 말했듯이 <말모이>(연출 엄유나)가 크랭크인해서 열심히 촬영 다니는 중이다. 이러다 보면 또 1년이 간다. (웃음)
드라마 출연은 좀처럼 안 하는 것 같다. 제의가 많을 들어오지 않나?
많이는 아니고 가끔 온다. 하고 싶은 작품도 있었는데 미리 약속해놨던 영화와 겹치면서 못 했었다. 동시에 들어갈 경우 피치 못하게 폐를 끼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서로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서다. 한 번에 한 작품, 그게 마음 편하다.
최근 행복한 순간이나 인상적인 일이 있다면.
요새 운동할 겸 촬영장이 있는 부천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때가 종종 있다. 며칠 전 가는 중에 비가 왔었다. 비 쫄딱 맞고 도착했는데 의외로 상당히 좋더라. 뭐라고 할까, 살아있다는 느낌? 마치 정말 힘들게 정상에 오른 후 뿌듯함이나 숨 가쁘게 뛴 후의 기분 좋음이랑 비슷한 기분이었다. 요새 집에서 부천까지 자전거로 다니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온전히 나만의 시간인 그 순간이 너무 좋다. 물론, 무릎은 아파 죽겠지만 말이다. (웃음)
2018년 5월 10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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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