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 박은영 기자]
한국 교회에 몸담고 있는 특별히 신실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평신도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신연식 감독. 그가 목도한 교회 내부의 문제는 충격적이었다. 이후 이를 표면화할 것인지에 관한 긴 고민의 시간이 이어졌고 마침내 결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못 할 게 확실했기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5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로마서 8:37>, 철저하게 기독교 관점에서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기독교 영화가 아닐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종교를 초월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가 묻는다. 스스로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알고 있다고 확신하냐고. 보고 싶지 않아서 혹은 잘 알고 있다는 착각으로 나를, 주위를 외면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개인과 부조리가 만연한 사회. 비종교인이든 종교인이든 ‘성찰’이 필요한 시간이다.
(해당 인터뷰는 <로마서 8:37> 관련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37>(이하 <로마서>)은 교회 내부의 비리를 드러낸다. 아주 민감한, 섣불리 건드리기 힘든 소재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비판도 옹호도 아니라고 느꼈다.
음, 한국 사회의 문화적 토대의 척박함을 증명하는 질문인 거 같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옹호도 아니고 비판도 아니라는 거 말이다. 한국사회에서는 늘 진영 논리가 적용된다.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거지. 그렇게 구분하여 모든 담론을 소비하고 사유하고 그걸 가십화 한다. 비판이 아닌 이유는 내가 현재 한국 교회에 속해 있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로마서>를 통해 이야기 하고자 했던 건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성찰’과 ‘자기반영’이다. 기독교 철학을 아주 심플하게 얘기하자면 하나님과 인간은 창조물과 피조물로 굉장히 건강한 관계로 있었는데 한 사람으로 인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면서 그 관계가 훼손된 거다. 그게 지금의 세상이고 훼손된 세상을 단 한 사람, 즉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다시 회복시키는 거다.
비종교인 입장에서 지금 말한 논리가 쉽게 와닿지 않는다. 신앙을 가지기 위해 여러 번 시도해 봤는데 잘 안되더라. 첫 고비를 못 넘긴다고 할까.
그건 당연한 거다. 고비를 못 넘긴다는 것도 이해된다. 한국 교회가 비대화, 조직화되다 보니 기업화되기에 이르고 마치 종교 서비스적인 성격이 강해졌다. 아마 그래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기독교 철학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반대되기 때문일 거다. 쉽게 말하면 내가 피조물이고 굉장히 수동적인 존재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인류를 창조한 것이 나를 위해서라고 하니까 받아들이기 힘든 거지. 내가 남을 위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건 인간 본성에 굉장히 위배된다. 못 받아들이는 게 이상한 게 아니고 지극히 당연한 거다. 한국교회는 가장 예민하고 가장 불편한 부분을 잘 얘기하지 않는다. 사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었더니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더라. 성공하고 돈도 잘 벌더라’ 이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그걸 강조한다. 그러니까 안 믿는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는 거지. ‘내 죄를 위해 죽었다고? 얼굴도 모르는데? 이상해!’ 이렇게 되는 거다. 그건 어떻게 보면 아주 상식적인 반응이다. 교회가 불편한 얘기는 안 하고 이해할 수 있고 편리한 방향으로만 설명하려 하는 게 문제였던 거지. 한국 교회가 비난받는 것은 너무 기독교적이고 너무 종교적이라서가 아니라 그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교회답지 않고, 기독교가 기독교답지 않아서인 거다.
성경의 많은 구절 중 ‘로마서 8장 37절’을 선택한 이유는
<로마서>는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거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이란 세상에 죄가 들어왔는데 죄가 들어온 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리셋, 즉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있었다. 그 증언이 구약 내내 나온다. 약속의 증표로 예수그리스도가 온 거다. 이 세상을 어떻게 구원할지 그 샘플을 예수그리스도가 보여준 거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실행하실 거라 믿는다. 그게 기독교인이다. 우리가 잘 해서가 아니고, 그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 구원이 오는 거다. 다만 주려고 했는데 싫어하는 사람에겐 못 준다.
영화 외적 질문인데 그렇다면 다른 조건 없이 약속을 믿기만 하면 되는 건가?(웃음)
그럼! (하하) 어떻게 보면 믿음이라는 게 사람의 노력과 의지로 쟁취되는 게 아닌 부분도 있다.
교회의 부패한 모습을 통해서 기독교의 본질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
극 중 한국 교회의 모습들은 철저한 취재에 의한 거다. 일부러 극적이고 자극적으로 묘사한 건 단 한 장면도 없다.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는 부패와 부조리는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과 결국은 똑같다고 본다. 교회가 교회답고 기독교가 기독교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사회의 문화적 토대의 척박함을 증명하는 질문을 해서 미안한데 (웃음), 첫 질문에 언급한 비판도 옹호도 아니라고 느꼈다는 건 이런 의미였다. 교회 입장에서는 그들의 치부를 표면화하는 것을 비난할 거고, 비종교인이나 교회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부조리함을 드러냈음에도 그에 대한 시원한 해결책이 없음이 답답할 거다. 왜냐하면 극 중 교회의 내부 비리를 고발하던 ‘기섭’(이현호 분)이 결국 장인 ‘강원로’(최종률 분)을 대신하여 교인을 대상으로 설교하면서 마무리되지 않나. 교회를 박차고 나가는 것도 그렇다고 반기를 더 세게 드는 것도 아니다. 한편으론 현실과 타협했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게 철저한 기독교 영화이고 철저하게 기독교 관점에서 만들어서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가 샘플로 와서 구원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러면서 ‘다 이루었노라’ 라고 승리를 선언했다. 이상하지 않나? 왜 죄 많은 사람들이, 나쁜 놈들이 더 잘 사는지. 거기에 대해 분명히 이 세상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선언, 그러니까 약속이 있었다. 그건 이미 예수그리스도가 획득한 승리였고 우리가 인간적인 노력으로 성취하는 게 아니다. 또, 기독교 관점을 떠나서라도 나쁜 놈을 때려잡고 응징하고 등등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지금까지 이래저래 취재해 본 결과 그렇다. 현실은 늘 영화보다 드라마틱한 과정이 전개되는데 결말은 영화보다 훨씬 더 지리멸렬하다.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고 응징하면서 끝나지 않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힘 있는 사람 혹은 돈 있는 사람이 ‘그래서 뭐?’ 이러면 끝인 거다. 그 싸움을 계속 이어 가려면 한쪽이 결국 자신의 패배를 시인해야 한다. 시인하지 않으면 안 끝난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단죄가 없는 건가.
무엇보다 현실을 반영한 결과라 본다. 오래전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도 응징과 단죄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따랐었다. 왜냐면 물 위를 걷는 것, 오병이어(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인 기적) 등 여러 가지 기적을 보여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도 세상적, 세속적 승리를 기대한 거지. 예를 들면 로마군을 시원하게 물리치고 그들이 무릎 꿇고 잘못을 빈다든지 말이다. 재미있게 요즘 기준으로 표현하자면 김정은이 청와대 앞에서 무릎 꿇고 석고대죄 한다고 할까. 그런데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을 거 같은, 기적을 행하던 분이 말도 안 되게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았나. 예수님이 죽고 부활한 후에야 제자들이 그리스도 승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세상적 승리가 아님을 깨달은다. 그 이전에는 제자들도 몰랐다.
극 중 ‘기섭’도 제자들과 같은 심정인 건가.
극 중 ‘기섭’은 싸우지만, 자신이 어떤 이유로 싸우는지 잘 모를 수 있다. 아끼는 동생 ‘지민’(이지민 분)을 위한 사심인지, 형 ‘요섭’(서동갑 분)을 향한 컴플렉스 때문인 건지, 정말 정의를 위한 건지 말이다. 어쨌건 세상적으로 짓밟히고 끝장이 나고 졌을 때,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보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다. 그게 기독교적인 관점이다.
참 어렵다. (웃음) 주변 기독교인의 <로마서>에 대한 반응이 궁금하다.
제각각이다. 개인적으로 대단히 많은 사람이 한국 교회 자체가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에 공감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주 보수적인 분도 있고 별로 생각 없는 분 등 다양하겠지만. 일부 보수적인 분들은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냐고 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다룰 게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의 본성은 죄성인데 그럼에도 나를 구원해 줬음을 믿는 거기 때문이다.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의 본질이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 사용하는 ‘은혜’라는 개념은 ‘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됐어. 기도했더니 내가 희망하는 것을 다 들어 주셨어’ 이렇게 변질됐다.
잠깐, ‘죄성’이라는 건 원죄와 비슷한 개념인가.
그렇게 볼 수 있다. 원죄가 뭐냐면 선과 악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한다는 거다. 혹은 가치 판단하고자 하는 그 욕망. 그건 쉽게 말하면 하나님같이 되고 싶다는 거지. 더 쉽게 얘기하면 이 세상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다. 그게 인간의 ‘원죄’ 다. 바로 죄성이지. 이상하지 않나? 내 인생인데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게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맞다,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게 죄성인 거다. 비기독교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죄라고 생각 안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런데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생각을 가진다는 건 내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거다. 일부의 사람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는 다 우연의 존재, 즉 나도, 너도, 태양도, 산도, 달도, 지구도 다 우연에 의한 존재라 본다. 그럼 하나님과 나는 동등한 존재인가? 어차피 우연에 의한 존재로 우연히 생겼는데? 이런 관점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또, 무언가 절대자가 있긴 있는 거 같은데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아닐 수도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기독교인, 즉 크리스천이라고 청하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창조주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걸, 그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행동은 그렇게 안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지. 비기독교인 입장에서 ‘못 받아들이겠어!’ 이럴 순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계약서에 싸인했는데 권리를 주기 싫어서 바지사장 내세우고 대포 통장 만드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교회 목사의 성추행 사건은 요사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곤 했다. 교회 내 많은 문제 중에서 특히 이 부분을 다룬 이유는.
아까 말했듯 처음에 복음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독교 교리 순서상 ‘로마서 6장’을 다루려 했다. 그 장이 죄의 문제를 다루는 장이다. 그래서 취재를 시작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나도 이런 일을 모르고 취재를 시작한 거지. 여러 교회를 취재하다 보니 나도 몰랐던 일들을 알게 되면서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너무 자극적이라 영화로 만드는 게 옳은 걸까를 5년 동안 고민했다. 사실 소재가 상업적인 면도 있고,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는 로직은 한국 영화상 실패한 적이 없기에 상업 영화로 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건 피해자의 목소리, 영화 속에서 세 번 나오는데, 즉 증언을 직접 듣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국 사회, 한국 교회, 비단 교회와 우리나라뿐 아니라 요사이 할리우드도 그렇고, 오만가지 성 관련 이슈들이 터져 나오지 않나. 그런 뉴스를 들을 때 사실 남의 일처럼 보인다. 누가 그렇다더라 하면서 마치 가십처럼 들리는 거지. 아마 대다수 사람이 그럴 거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어떤 고통을 받았었는지 구체적인 증언을 듣고 나니 나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더라. 내 시각이 변한 것처럼 그런 체험을 관객도 하길 바랬다. 남의 일이나 일부의 일이 아니다. 일부 목사의 일탈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일부의 행동을 왜 전체인양 얘기하냐고 하기도 한다. 아까 말했듯 기독교는 한 사람에 의해 죄가 들어왔고, 한 사람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일부도 아닌 단 한 사람 말이다! 일부라는 게 뭔가, 십 분의 일? 백 분의 일? 만 분의 일?
잠시만, 얘기를 듣다 보니 의문점이 생긴다. 한 사람에 의해 죄가 들어 왔고, 한 사람에 의해 구원받았다고 했는데 구원한 사람은 예수그리스도고, 죄를 가져온 한 사람은 누구인가? 아담? 이브?
아담. 아무튼 그 일부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런 상황과 자신은 상관없다는 생각이 가득한 거다. 교회를 기독교에서는 ‘지체’라고 부른다. 한 몸이라는 거지.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도 아픈데, 내 몸의 극히 일부인데 고통이 없을까? 상처를 대일밴드로 숨기고 있어도, 숨겼기 때문에 오히려 독이 퍼져서 몸 전체가 죽을 수 있다. 이건 교회 안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 밖으로 나와서 보자. 예를 든다면, 어떤 회사가 남녀 공용 화장실을 사용했더니 성추행이 발생했다. 그래서 회사는 남녀 화장실을 분리하는 공사를 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남성들이 일부에서 일어난 일을 왜 전체로 확대 해석하여 남자를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하냐고 따지는 거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불필요한 거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다. 남녀 화장실을 분리해서 현 상황보다 나아진다면 하면 된다. 우린 타인의 고통에 너무나 무관심한 세상에 살고 있고, 타인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기에 그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다. <로마서>를 통해 한국사회가 왜 그렇게 됐는가를 말하고 싶었다.
지금 얘기한 부분인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에 대해 얘기하는 게 <로마서>의 또 다른 목적인 거 같다.
기독교인에게는 보다 본질적인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비기독교인에게는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아까 성찰이라고 하지 않았나. 성찰은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는 게 시작인데 이건 비기독교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돌아보는 게 시작이다. 대한민국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나쁜 놈 때려잡자’라는 건 시작이 아니다. 범죄 뉴스나 기사의 리플을 보면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얼마나 쉽게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로마서>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개개인의 ‘성찰’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그렇다.
좀 전에 5년 간의 고민이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 이 시기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예를 들면 창의력이 솟았다든지 자금의 여유가 생겼다든지 아니면 전에 비해 자유로워진 사회 분위기 등등
음.... 사회적 분위기까진 계산을 안 했고, 내 개인적 상황들만 고려했다. 아까 말했듯 취재하면서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할까 말까를 끝없이 망설였다. 나 자신은 그렇게 정의로운 사람도 아니고 특별히 신실하지도 않고 아주 지극히 평균적인 평신도다. 평범한 평신도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기에 사실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중에도 한 가지 확실한 생각이 하나 있었는데 만약 이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절대로 영화 산업 내에서 투자를 안 받고 하겠다는 거였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 영화 산업의 생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어떻게 마케팅이 되고 어떤 식으로 포장되어 나갈지가 불 보듯 뻔한 거다. 아마 내가 투자 담당자라도 그런 식으로 풀어나갈 거고 말이다. 그래서 절대로 상업적인 자본은 안 받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동주>(2015)로 빚을 갚고 나서 좀 남은 것도 있고, (하하), 또 앞으로 독립영화를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기에 더 이상 미룰 수 없겠더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지 않을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을 사리게 된다는 소리로도 들린다.
사실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옵션이 많은데 굳이 내가 이걸.... 이런 생각을 지금도 하는데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낮아지는 건 확실하니까 도전한 거지! 지금 이 시점에 뭔가 엄청난 의미가 있어 그에 따라 움직인 건 아니다.
좀 전에 얘기한 독립영화를 그만두려고 결심한 이유는 뭔가?
그간 여러 가지 실험과 모험을 했지만 나도 스탭들도 더 이상 그럴 수 있는 나이가 아닌 거 같다. 또, 이제는 법인 대표이고 책임질 식구도 많아져서이다.
영화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형 ‘요섭’의 죄를 알고 괴로워하던 동생이 화재로 죽는데, 그 화재는 여신도가 ‘요섭’에게 선물한 양초에 의해 발생한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영화 전반에 기독교적인 메타포를, 과욕일 수 있겠지만, 정말 많이 넣었다. 삼위일체, 원죄 등등 말이다. 죄와 구원을 다루는 성경 전체의 방식이 한 사람에 의해 죄가 들어 오고 한 사람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좀 전에 말했듯이, 사실 아담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계보가 쭉 나온다. 하나의 집안으로 연결된다고 할까,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원래 접붙임 된 하나의 가지다. 비단 기독교 공동체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로 연결돼 있어서 누군가의 고통, 누군가의 죄, 누군가의 구원, 누군가의 희생 그것이 별개가 아니라는 거다. 세대와 세대를 잇는 반복되는 메타포가 성경 구약에 대단히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그것을 하나의 가문, 즉 ‘강원로’ 라는 집안에 차용해서 넣은 거다.
극 중 성경의 구절이 많이 인용되는데, 그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지나가 버려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었다. ‘요섭’을 ‘강원로’의 아들로 설정한 이유는.
극 중 여신도를 성추행한 ‘강요섭’ 목사만 죄인이 아니다. 거듭말하지만 (웃음) 여기 나오는 모든 사람이 죄인인 거지. 본인이 갖고 있는 죄성이 어떻게 발현되느냐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약점에 따라 드러나는 모습이 다르다. 극 중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사실은 다 죄성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단 두 명, ‘강원로’목사와 ‘기섭’이다. 그런데 ‘강원로’목사는 ‘요섭’이 혼외 자식임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죄를 고백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비겁한 거다. 극 중에서 ‘너가 앞에서 사람을 이끌 때 나는 뒤에서 지원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거지.
그래서 한편으로 기독교인의 위선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게 우리 모습이고 드러내야 하는 모습이다. 우리의 더러운 면을 감췄을 때 교회가 건강해지겠나, 아니면 우리 모습을 드러냈을 때 건강해지겠나. 예수그리스도는 병자 곁에 있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병이 없다고 말한다고 병이 고쳐지는 게 아니다. 드러내는 게 기독교적인 거지.
개인적인 얘기로 들어가 보자. 오랜 기간 영화를 해왔는데 종교가 영화에 미친 영향이 클 거 같다.
음, 개인적 체험? 사건이 있었다. 난 영화를 20세부터 했는데 그때는 286 컴퓨터 시대로 당시 연출부 막내는 돈을 못 받는 게 당연한 시기였다. (웃음) 지금 같은 표준계약서는 상상도 못 했던 시기지. 감독님이 그냥 소설 던져주고 시나리오 써오라고 주문하기도 하고. 당시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꽤 쓰곤 했다. 그런 식으로 10년을 보냈던 거 같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영화를 한 게 아니고 단지 창작을 하고 싶었던 거 같다. 늘 소설이나 시를 썼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나리오를 썼는데, 시나리오를 쓰고 나면 만들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영화를 한 거다. 영화가 너무 좋아서 시작한 게 아니기에 영화가 나한테 굴레이거나 우상이 될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다 29살때 영화를 그만두려고 했었다. 그때 알았다. 영화나 예술이라는 게 나한테 굴레였고 우상이었다는걸.
‘굴레와 우상’이라는 의미를 좀 더 풀어 얘기한다면.
우상이라는 건 쉽게 말하면 내가 못 버리겠는 거다. 버려보니까 ‘우상’ 이었음을 알겠더라. 영화를 시작한 20대 초반부터 10년 동안 갖은 고생과 경험을 했는데 그게 다 제각각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것들이 연결되면서 그런 어려움을 왜 겪어야 했는지 조금은 알겠더라. 그러면서 내가 영화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리가 됐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영화를 찍고 있더라. 부산영화제에도 가고 또 여러 해외영화제를 좀 돌고 왔더니, 서른 살까지는 영화사 가서 제작부장도 못 만났던 처지였는데 이상하게 서른한 살부터 실무진을 안 만나고 대표나 회장님 등을 만나고 있는 거다!
작품으로 인정을 받은 건가.
꼭 인정을 받았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게 맞다. 약간 특이한 경우였던 거지.
어떤 작품인가.
<좋은 배우>(2005)다. 이후 <페어 러브>(2009)를 제작하면서 제작사를 다섯 군데를 옮겼다. 웃긴 게 엎어져서 제작사를 옮긴 건데 옮길 때마다 제작사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거다. 당시 안성기 선배님이 CJ 대표를 소개해줬는데, 사실 삼십 대 중반 감독이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닌데 안성기 선배님이 보증하는 감독이라고 소개하니 가능했던 거지. 그래서 결론은 내가 왜 영화를 해야 하는 지에 대해 스물아홉, 서른 살에 분명히 신앙적인 어떤 철학과 관점이 정리된 계기가 있었고, 그 후 그것들이 내 작품 속에 많이 반영 됐다는 거다.
그 계기를 자세히 묻는 건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겠지! (웃음)
그렇지. 영화제 때나 아니면 우연히 포장마차에서 만나 소주 한잔하면서 하면 모를까, 인터뷰하면서 얘길 할 성질은 좀 아니다.(웃음) 매체에 실을 만한 내용도 아니고 말이다.
20대 초반 연출부 막내로 시작해 이젠 제작사 대표로 많은 이들의 밥그릇을 챙기고 있는데. 격세지감이라고 할까, 세대차이도 많이 느끼겠다.
밥그릇 챙길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당연히 느낀다. 그래도 시대가 좋아져서 여러 모로 다행이다. 표준계약서도 작성하고 영화 근로자의 환경이 많이 개선됐다. 우리 땐 어땠는데, 이런 얘기 하면 꼰대 되는 건데....훗.... 분명한 건 2000년부터 10년간 아주 급격하게 변한 건 사실이다. 나는 90년대 막내로 일했는데 영화가 산업화되기 이전이다. 그때는 소위 도제식이라고 불리던 시기라 지금과 직접 비교할 바는 아니다.
스스로는 싫어도 나이가 들다보면 꼰대스러움이 생긴다. 혹 자각하는 순간이 있다면.
스스로 느끼면 꼰대가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주변 스탭들한테 부탁을 했다. 내가 혹시 그런 모습 보이면 ‘꼰대주의보’, 엘로카드를 달라고. ‘감독님,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이다. 꼰대라는 걸 인식하면 꼰대가 아니고, 갑질하는 사람도 자신이 갑질한다고 느끼진 않는다.
음, 알면서 하는 사람도 분명 있는데....(웃음)
그건 진짜 중증이지! 그렇다면 환자다. 나도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행동 안 하려 조심한다. 지금부터 이 악물어야지 더 나이 먹어 50대, 60대가 됐을 때 안 그럴 수 있겠더라. 다행히 주변 선배님 중에, 이준익 감독님도 그렇고, 안 그런 분이 계시니 보고 배우려 한다. 본인의 자각이 필요한 거 같다. 그래서 성찰이 중요하다. 종교인, 비종교인을 떠나서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런데 사실은 잘 모르기도 하고, 잘 안다고 착각해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결국 <로마서>는 기독교 종교 영화라기보다 인간의 성찰에 관한 영화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래야 더 많은 분이 보고 스스로 성찰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을 듯하다.
넓게 보면 그렇지. 그렇게 써 달라. 비기독교인 기자가 본 <로마서>는 성찰을 말한다. 이렇게 정리하면 아주 좋을 거 같다. 하하
단편과 장편 등 다양한 작품을 많이 했는데, 영화적 동반자가 있다면.
우리 스탭들이다.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이 계속 함께하고 있다. 그건 내가 제작하지 않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이준익 감독님이 <동주>하자고 제안했을 때부터 스탭은 우리 스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후 <박열>에도 많이 참여했고. 내가 돈 되는 영화를 안 하고 못 하다 보니까, 앞으론 하려 한다, 스탭들한테 미안해서 주변 감독님한테 스탭 추천과 홍보를 많이 한다. 스탭 뿐만 아니라 배우들도 그런 경우가 많다. 타 감독님들이 내 작품을 많이 보는 편이라 내 영화를 보고 배우 문의가 정말 많이 들어 오는 편이다. <동주> 이후로 우리 스탭들이 조금 더 상업적으로 환경이 좋은 감독님 작품에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뿌듯하다. 이번에 대종상에서 미술상(<박열>, 이재성)을 받고, 최희서도 신인상이랑 여우주연상을 받아서 너무 기뻤다.
다른 감독의 작품을 많이 보는 편인지.
음, 감독들이 보통 다른 사람 작품을 잘 안 볼걸? 진짜로. 왜 호텔 주방장들이 집에 가서 간단히 먹는 거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감독들이 보통 자신의 작품을 하기 전에 영화를 많이 보는데 감독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면 관객의 입장에서 잘 못 본다. 관객으로서 영화를 즐기기 힘들어진다고 할까. 물론 많은 작품을 한 감독 중에도 여전히 시네필인 분도 있는데 내 생각엔 그런 비율이 더 낮을 거다.
시네필은 아니라는 거군!
내 영화를 포함해 다른 사람의 영화를 잘 안 본다. 사실 볼 시간이 없다. 노동을 너무 많이 해서(웃음). 내 작품 시나리오는 물론 의뢰받은 것도 쓰니까. 글을 쓰려면 자료를 찾아야 하지. 자료 공부를 많이 하는 편이다. 이번 <로마서>도 로마서 강해 책을 중세시대부터 현대까지 다 봤다. 그렇게 공부하지, 제작사 대표에, 심지어 배급도 하니까. 그뿐만 아니라 속한 몇몇 단체에서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오만가지 일을 하다 보니 안 보려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진짜 시간이 없는 것도 있다.
글을 쓴다는 게 창의적인 작업인데 그렇게 바쁜 와중에 가능한가. 글을 계속 쓰면서 매너리즘에 빠진 적은.
내가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가장 생산성이 좋다고 느낀 건 고등학교 중간고사 때였다.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더라. 이걸 하고 있으면 안 되는데 하고 있으니까 달콤한 거지. <동주>의 경우는 <조류인간>(2014) 촬영하면서 각본을 썼을 정도다. 그리고 글 쓰면서 매너리즘을 느껴 본적은 없고 다만 체력이 달린다고 느낀 적은 있다. 아, 그런 건 있다, 의뢰받아서 어쩔 수 없이 쓰는 경우는 힘들 때도 있다. 그런데 내가 좋아서 쓸 때는 힘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감독은 참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감독마다 다 성향이 다르다. 현장에서 촬영하는 걸 좋아한다든지, 편집을 좋아한다든지, 시나리오 쓰는 걸 좋아한다든지 말이다.
본인의 성향은 어떤가.
음, 나는 글 쓰는 걸 제일 좋아하는 감독? 많은 감독이 시나라오를 직접 쓰긴 하는데 쓰는 걸 싫어하는 경우도 꽤 있다. 지금도 선배 감독님들이 글 좀 써달라고 많이 찾아온다. 예를 들면 이준익 감독님은 전형적인 기획자 형이시다. 배급사, 제작사 대표하다 감독을 한 이례적인 케이스라서, 기획자로서의 경험과 감각이 굉장히 좋으시다. 옆에 있으면 그런 점을 많이 배운다. 나는 작가로서 경험이 많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거지. 확실한 거 하나 있다. 홍보 좋아하는 감독은 아마 없을걸?(웃음)
요즘은 점점 홍보가 중요해지는데? (웃음)
이게 뭐랄까, 약간 연예인이 예능 싫어하는 거 같은 느낌이랄까. 나이는 들고 할 일은 많아지는데 에너지를 뭔가 본질적인 것에 쏟고 싶은 거지. 인터뷰와 홍보가 은근하게 에너지 소비가 많이 드는 일이다. 또 작품이 나온 이후에 하는 거기 때문에 더 본질적인 게 아닌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많이 안 본다지만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중3 때 7080년대 명작 선을 본 적이 있다. <비정성시>, <대부> 등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었다. 당시는 소설을 중요시하고 영화를 상대적으로 무시하던 시기였는데 표현 수단으로서의 영화의 대단함을 처음 깨달은 거다. 이후 70년대 80년대 걸작들을 가지고 시나리오 공부를 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되게 잘한 일인 거 같다. 지금도 학생들에게 권하기도 하고, 정말 공부하기 너무너무 좋은 작품들이다.
소설을 쓰는 게 영화에 도움이 많이 되는 거 같다.
교회에서 학생들과 연극을 하는 것도 그렇고 소설 쓰는 것도 다 영화 만들 때 도움이 되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그리고 내 영화가 문학적으로 느껴진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대사가 많아서가 아니다.
대사 때문이 아니면 어떤 이유인가.
정확히 설명하면 영화는 직관적인 매체다. 보다가 돌려 볼 수 없지 않나.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플롯을 짜야 한다. 쉽게 말하면 특히 상업영화의 경우는 ‘원 펀치 플롯’이 필요하다. 그런데 소설은 보다가 앞에 보고 싶은 걸 다시 읽을 수 있으니까 좀 더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매체다. 그래서 서브플롯이 발달해 있다. 그 점이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 내 영화가 문학적이라고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서브플롯 때문이다. <로마서>의 경우도 잠깐 등장하는 소소한 인물들까지 메인플롯과 연계된 서브플롯이 아주 강하다. 음.... 사실은 그래서 내가 돈을 못 번 거다.
서브플롯과 돈을 못 번 이유의 상관성은?
좀 전에 말했듯 영화는 직관적이어야 하니까! 나처럼 서브플롯이 많으면 영화적으로 손해를 보는 구성이다. 한 영화를 열 번 보지 않는 한 획득하기 힘든 구성이지.
쉽게 말하면 당신 영화는 음미하고 곱씹어야 느낄 수 있는 맛을 지녔다는 건가.
맞다, 그게 소설일 때는 아주 자연스럽지. 그런데 영화는 그 순간 보는 걸로 끝나야 하니까.
관객들의 취향도 다양해져서 소위 ‘촘촘한 서사’를 중시하는 관객이 느는 추세다.
반가운 일이지만, 그런 관객이 몇 백만 명 이상인 건 아니니까!
지금까지 바쁘게 달려왔는데 영화적으로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는 <로마서>에서 푼 거 같다. 그래서 어느 정도 여한이 없기는 하다. 더이상 독립 영화는 안 한다고 스탭들한테 선언을 했지만, 상업 영화와 지독한 오락 영화도 하면서 돈을 많이 모아, 30억짜리 독립 영화를 한번 하고 싶다.
30억짜리 독립 영화?
그럼, 100억짜리라도 내 돈으로 만들면 독립 영화지! 독립 영화라고 생각하면 막연히 규모가 작은 걸 생각하는데 독립이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인 거다. 그러니까 송강호 선배가 나오는 300억짜리 영화라도 내 돈으로 만든다면 독립 영화인 거지!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행복한 순간은.
우리 딸이랑 노는 재미. <로마서>에 잠깐 나왔다. 한글 수업받는 꼬맹이가 내 딸이다. 그 장면 촬영 장소가 바로 여기(인터뷰한 장소, 경복궁 근처의 모 오피스텔) 다! 하하하
2017년 11월 22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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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주) 루스이소니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