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신세계>(2012)를 연출한 박훈정 감독의 신작 <브이아이피>로 돌아왔다. 이정범 감독의 <우는 남자> 이후 또다시 누아르 전문 감독과 만났다.
워낙 누아르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라는 걸 처음 접하고 좋아하게 된 계기가 <대부>(1972) <스카페이스>(1983)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같은 누아르 작품이다. 홍콩 누아르가 유행하던 시대에 자란 전형적인 세대이기도 하고 말이다. 박훈정 감독도 작가 시절부터 좋아했다. 이번 영화는 신선한 소재임에도 진짜 있을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끌렸다.
북한의 VIP ‘김광일’을 남한으로 데려오는 기획귀순을 주도하는 국정원 요원 ‘박재혁’을 연기했다. 인물의 매력 포인트를 짚어준다면.
‘박재혁’은 국정원 현장 요원으로 활동하던 사람이지만, 기획귀순 건을 잘 처리한 대가로 편한 사무직으로 승진한 사람이다. 마치 직장인처럼 현실적이고 체제순응적이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왠지 가정이 있는 사람일 것 같았다. 그러니까 회사에서 승진하는 게 중요한 거다. 때마침 능력도 좀 있는 편이니 회사 입장에서도 좋은 직원이었겠지. 배우 입장에서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역할이고, 캐릭터 중 유일하게 심리적 변화를 경험하기 때문에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심리적 변화는 상대적으로 건조하게 표현됐더라.
이번 작품은 인물의 사연이나 그 사람의 내면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특정한 사건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박재혁’이 왜 그런 삶을 사는지 소개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어떤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의 마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는데, 그 변화를 얼만큼 드러내느냐가 고민스러웠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하고 나면 마지막(반전)이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았다. 이번 영화는 전반적으로 ‘뺄셈’ 작업이었다.
예컨대 무엇을 빼야 했나.
초반에서 이종석이 연기한 ‘김광일’을 구타하는 장면이 있다. ‘박재혁’은 현장을 뛰던 첩보원인 만큼 업무상 사람도 몇 번 죽여봤을 것 같은 인물 아닌가. 그렇다면 무시무시한 폭력을 휘두를 것 같은데, 초반부터 그렇게 강렬한 걸 보여주면 맨 마지막 부분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더라. 수위 조절이 필요했다.
이 영화가 잔인한 이유는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 ‘김광일’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해서다. 사실 잔인하다는 평가의 기준은 너무 다양해서, 어떤 사람들은 생각보다 덜 잔인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선에서 묘사할 것인지는 결국 감독이 선택할 영역이다.
특히 ‘김광일’은 잔혹한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뽀얀 얼굴의 이종석이 그 역할을 연기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
처음에는 상당히 의외였지만, 되레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본인이 먼저 역할을 맡겠다고 찾아왔다고 들었다. 현장에서도 큰마음 먹은 게 느껴지더라. 이 친구, 변화에 대한 갈증이 크구나 싶었다.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약점, 단점을 공개하고 도와달라는 자세로 나오니 선배 배우들이나 감독, 스탭까지도 모두 도와주려는 분위기였다.
본인도 그만큼 간절한 시절이 있었을 텐데.(웃음)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2002) 때 그랬다. 내가 먼저 참여의사를 밝히고 찾아갔던 작품이다. 종석이가 그때 내 심정인가보다 싶더라. 어떤 심정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응원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간 ‘원탑’ 영화에 주로 출연해왔는데, 이번 작품은 이종석뿐만 아니라 김명민, 박희순까지 당신과 동등하게 영화를 책임지는 멀티캐스팅 작품이다.
그래서 좋더라. 부담이 없다.(웃음) 친구 같은 배우들과 함께하니까 일이 좀 더 즐겁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3년 만에 영화 홍보를 하려니 시스템과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더라. VIP 시사라는 것도 해야 하고, 모바일로 생중계되는 무비토크도 소화해야 했다. 원탑 영화였다면 나 혼자 어떻게 했을까 싶다.
네 사람 모두 시나리오로 볼 때보다 영화가 더 재미있다고 말하던데.(웃음)
반농담식으로 얘기한 거긴 하지만, 아마 다들 현장에서 자기 분량이 정해져 있어서 다른 분량은 어떻게 찍혔는지 몰랐을 거다. 영상으로 쭉 붙여놓은 걸 봤을 때 풍성해 보이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김명민씨가 주로…(웃음)
연이어 개봉할 <7년의 밤>이나 <창궐>도 각각 류승룡, 현빈과 함께하는 작품이다. 동료 배우와 함께하는 즐거움도 작품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한 가지일 것이다.
매번 작품에 끌리는 지점이 다르다. 어떨 때는 저 감독과 꼭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이고, 어떨 때는 역할이 정말 좋다는 생각이다. 반대로 그간 내가 해오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고 도전할만한 부분도 많지 않지만, 이야기가 재미있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이 과거에 비해 꽤 달라진 것 같다.
어떻게 달라졌나.
예전에는 좋은 점이 70, 안 좋은 점 30인 작품이라면 대체로 고사했다.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은 좋은 점 70을 보고 선택한다. 장점을 더 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변화한 이유가 있을 텐데.
돌아보니, 25년간 연기를 했는데 기간에 비해 출연한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더라. 후회됐다. 그렇게 신중하게 선택한 게 꼭 잘 되는 것도 아니었다. 여러 편이 잘 안 돼 봤는데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고.(하하하)
그런 의미에서 또다시 잔혹한 누아르로 돌아온 것인가.(웃음)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장르가 같은 전작의 흥행 실패가 마음에 걸릴 텐데…
흥행, 많이 안됐다.(하하) 하지만 배우는 먼저 (제작사와 연출의) 선택을 받은 뒤에야 실질적인 선택권이 생긴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남성적인 영화들이 주로 들어온다.
그동안 비슷한 장르에 많이 출연해서 고정된 이미지가 남아있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요즘 제작되는 한국영화 중에는 생각나는 멜로 작품이 별로 없는데, 다양한 작품이 많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대표작으로 회자되는 <친구>(2001)의 인상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다. 6개월이나 극장에 걸려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신기한 경험이다. 무엇보다 관객이 나를 색다르게 봐준 작품이다. 지금은 영화 주인공이 사투리를 쓰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청춘스타가 부산 사투리를 쓰면서 깡패 역할을 소화한다는 건 전례없이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흥행과 연결지어 선택할 수도 없었다. 지금처럼 멀티플렉스가 존재하던 시절도 아니었으니... 당시 감독과 목표 관객을 40만 명으로 잡았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누아르 장르의 미덕은 무엇인가.
우울한 노래를 듣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슬프고 힘들 때 경쾌하고 신나는 음악을 듣는 것보다, 우울한 음악을 들을 때 더 위안받는다. 남자들은 누아르 장르에 판타지가 있다.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당신도 잘 모르겠지?(웃음) 확실히 남녀 관객 사이에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다.
여성 관객이 누아르를 선호하지 않는 건 장르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여성 캐릭터나 여성에 대한 서사가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여성 배우가 참여할 수 있는 작품이 많이 나오지 않는 상황과 맞물려있는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는… 글쎄. 왜 그럴까.(웃음)
복잡한 현상이니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긴 어려울 것 같다.(웃음) 드라마 <신사의 품격> 처럼 화려하고 매력 넘치는 ‘연애하고 싶은 남자’ 캐릭터로 사랑받기도 했다.
그 작품은, 지금 다시 하면 훨씬 더 재밌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다.(웃음) 그때는 그런 연기를 처음 해본 탓에,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음에도 스스로 즐기지는 못했다. 단순히 망가지고, 안 망가지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조금 더 내려놓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요즘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 과장되더라도 재미있는 연기에 관심이 많다.
나도 그런 마음은 있는데, 현실과는 괴리가 좀 있다. 부드러운 역할이 잘 안 들어온다. 애니메이션 더빙이라도 해야 하나…(웃음)
평소에도 영화를 자주 보는지.
요즘 들어 다시 보기 시작했다. <우는 남자> 이후 2~3년쯤 영화를 안 보던 시절이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분석하면서 보느라 워낙 영화를 즐기지도 못했지만, 스스로에 관심이 떨어지고 자기애가 없어져서 뭘 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연기하는 것도 재미없고 내가 나에게 질리는 것 같은 느낌? 2~3년 정도 그랬다. 돌아보니 그때가 슬럼프였던 것 같다.
꽤 길게 갔다.
지금은 또 괜찮다. 이제는 내가 다시 멋있어 보이기 시작한다.(웃음)
워낙 ‘잘생김’의 대명사니…
장동건, 정우성. 그 둘이지.(하하하)
잘생겼다고 말하는 분들도 뭐가 정말 궁금해서 묻겠는가. 내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 궁금해서 그럴 거다. 그래서 이럴 땐 가볍게 장난도 친다. 예전엔 영화를 너무나 엄숙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홍보 과정에서 장난을 치는 게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결례가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대중과 이정도 장난은 치고 받아줄 법한 관계가 되지 않았나 싶다.(웃음)
그런데, 슬럼프라고 칭한 기간에도 촬영은 계속 한 걸로 안다.
대중 앞에 영화를 선보이는 건 3년 만이지만 그동안 <브이아이피>도 찍고 <7년의 밤>(개봉예정)도 찍고 중국에서 드라마도 한 편했다. 스케줄로 보면 긴 텀은 없었다. 확실히 일은 일로 극복해야 하는 것 같다.
극복되던가.
사실 좀 넋 놓고 있을 때도 있었다.(웃음) 그래도 <7년의 밤>을 찍을 때는 확실히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게 느껴지고 재밌더라. 매력적인 텍스트였다. 착한 사람이 가해자가 되고, 나쁜 사람이 피해자가 된 거다. 그래서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을 쫓게 된다. 선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줄만한 영화다.
기대하겠다. 관객에게, 또 당신에게 <브이아이피>가 어떤 영화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지.
관객 입장에서는 장르영화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내게는, 결론적으로는 관객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다. 그런 작품이 오래 남더라. 결과가 좋아야 함께 만든 사람들도 행복해진다. 어쨌든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영화 아닌가.
손익분기점 250만 명을 넘는 것. 감독님 전작 <신세계> 기록을 경신하면 제일 행복할 것 같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아이들이 커가면서 업그레이드된 행동을 하나씩 한다. 얼마 전에 내가 발가락을 좀 다쳤는데 8살짜리 큰아들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더라. 그렇게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준 게 처음이다. 정말 행복했다.
2017년 8월 24일 목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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